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55화 (55/105)

55. 싱숭생숭하게

55.

“고생 많았다. 그 쪽 소속사하고도 대충 얘기 끝났어.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더라.”

“미안하다면 다인가?”

준영이 백대표의 말에 그렇게 답했고 선유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쪽 소속사, 타격이 큰가봐. 퀸이 그 소속사에 거의 메인이미지 자리까지 올라갔었는데 이번 일 때문에 이미지도 안 좋아지고, 팬들도 많이 떨어져 나간 눈치야.”

“선유 형님이랑 엮여서 덕 좀 보려고 했는데 선유 형님이 뜻대로 안 움직인 거죠. 뭐.”

“그래.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

“안 그래도 그 문제로 할 얘기가 있어.”

선유가 입을 열자 백대표가 선유를 바라봤다.

“그 여자애. 계약 끝나면 우리 회사에서 좀 데려오는 게 어때?”

선유의 말에 백대표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님, 치를 떠실 때는 언제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퀸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얘기한 적이 없는 터라 전 후 사정을 모르는 준영이 그렇게 물었고, 백대표 역시 꽤나 궁금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설마 너 정말 걔 좋아 하냐?”

“그럴 리가요!”

준영이 선유를 대신해 펄쩍 뛰며 그렇게 말하며 선유를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걸 애써 외면한 선유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니야.”

“그러면?”

“그 쪽 소속사에서 돈벌이로만 쓰나봐.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계처럼.”

“아이돌이야 흔히들 그렇게 하지.”

“음악을 하고 싶대.”

“아이돌이면 음악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준영의 말에도 백대표와 선유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괜히 동정심으로 엮이면 안 되는 건 알지? 선유야.”

“알아. 동정심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지. 근데...”

거기까지 말하던 선유가 씁쓸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나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

그 말에 사무실 안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문제네.”

겨우 침묵을 깬 건 그나마 가장 나이가 많은 백대표였다. 그리고 그 말에 바통을 이어 받은 건 선유가 아닌 준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준영의 질문에 백대표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건 차차 고민해 봐야지. 아무튼 고생했어. 그 문제는 내가 고민해 볼테니까. 둘은 다음 스케줄 챙기고. 선유 너도 이참에 이미지 바꾸는 거 생각해 봐야겠다. 이런 일만 생기면 그럼 그렇지라는 내용이 계속 나오는 것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안 좋으니까.”

백대표의 말에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유가 입을 뗐다.

“그리고... 드라마 계약 건.”

“아, 그 건! 어떻게 됐어. 하기로 했어?”

“소민씨가 대표님 계신 자리에서 하는 게 맞지 않냐고 그래서요.”

“뭔 소리야? 그 때 일식집에서 소민씨가 일임해달라 그래서 자리 비켜줬는데. 자리 마련을 내가 해줬는데 나야 무조건 OK라는 뜻인 거지. 그걸 그렇게 몰라? 알아서들 하면 되지.”

선유와 준영을 향해 그렇게 말한 백대표가 답답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자 선유가 고개를 주억였다.

“알았어. 그럼 알아서 하지.”

“대신! 거절은 안 돼. 내가 용납 못해.”

“걱정 마세요. 대표님. 형님도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 준영아, 네가 복덩이다.”

“왜 쟤가 복덩인데? 돈 벌어오는 건 난데 왜 김준영이 복덩이야?”

“성격 지랄맞은 네 옆에 잘 붙어서 보필을 잘 하니까 복덩이지! 이게 다 너 위한 거야.”

“누가 들으면 내가 백대표 자식인 줄 알겠어.”

“그럼 네가 내 아들이지 남의 아들이냐? 이만큼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못난 놈.”

“아주 드라마를 찍어요.”

선유가 투덜거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아, 이거 갖고 가. 너희 이번에 맘 고생한 게 걸려서 약 한재 지었어. 먹고 몸보신 좀 해.”

“감사합니다.”

“쓴 거 안 먹는데.”

준영은 금세 감사인사를 하는 반면 선유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알아, 인마. 그래서 네 거는 덜 쓰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챙겨 먹어.”

“버리긴 아까우니까 먹어 볼게. 가도 되지?”

“말하는 폼하고는. 가라 가. 인마! 준영이 너는 좀 남고.”

“준영이는 왜?”

“쓴 약이랑 먹을 사탕 챙겨주려고 한다, 왜? 네놈은 빨리 가버려.”

“삐졌냐?”

“삐지긴 내가 애냐?”

백대표의 틱틱거리는 말투에 선유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한 번 긁고는 말했다.

“잘... 먹을게.”

그리고 그런 선유의 태도에 백대표가 피식 웃었다.

“가 봐. 으이그. 저 원수. 원수를 사랑하라니까 사랑해야지.”

그렇게 응수하는 백대표의 말을 뒤로 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온 선유가 백대표가 건넨 한약을 소중히 품에 끌어안고는 밖으로 나왔다.

선유가 나가고 난 뒤, 백대표가 혀를 쯧쯧 찼다.

“저 어린애 같은 놈을 어쩌냐. 좋으면 좋다고, 감사하다 하면 되는데 괜히 어색하니까 뻗대기나 하고.”

“그래도 대표님이랑 저는 알잖아요. 형님이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

“우리만 알면 뭐하냐. 남들이 오해하기 딱 좋게 행동하는데.”

“형님이 사골국 같은 사람인 거죠. 오래 우려야 뭐가 나오는.”

“야, 사골국이라고 하지 마. 사골국에 칼슘이 생수보다도 적게 들었단다. 저 놈이 사골국보다는 낫잖아. 이번 건만 해도... 여자애가 자기가 다 잘못한 거라고 했단다.”

“그거야 당연한 소리죠.”

“뭐가 당연한 소리야?”

소민을 좋아하는 선유를 알아챈 준영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새어 나왔고, 그 말에 백대표가 반문하자 준영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형님이 그럴 사람이에요? 몇 년을 봤는데. 아무튼 사골국에 비한건 형님한테 괜히 미안하네요.”

준영이 말을 돌리자 백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 녀석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왜요?”

“전화 왔었어.”

그 말에 준영의 얼굴이 꽤나 심각한 빛을 띠고 어두워졌다. 그리고 둘 사이에 내린 침묵은 아까 선유의 말에 내려앉았던 침묵보다 한층 무거웠다.

“계약이나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하니까 목소리가 삽시간에 얼어붙더라.”

“전 형님이 이해가 되다가도 이해가 안 돼요. 저 같으면 없다 생각하고 살 것 같은데.”

“혈연이라 그래. 피가 땡기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그 사람은 혈연 아닙니까? 한 쪽만 피 땡기는게 말이 돼요?”

“알잖아. 겉만 싸가지지 저게 속까지 싸가지냐? 내 보기엔 쟤 가시 돋친 척 사는 것도 지 속 숨기려고 하는 거야. 아무도 못 믿으니까. 그래서 안쓰럽다.”

“그러게요. 대표님이 전화왔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상상이 되면서 답답하네요.”

“그러니까 너라도 잘 챙겨줘. 너한테 부려먹을 땐 부려 먹어도 챙기기도 하고 그러잖아.”

“부려먹는 거야 사실 어쩌면 당연한 거죠. 돈 받고 하는 건데... 그게 서운하지는 않아요. 그냥... 제가 받는 만큼 줘야 하는데 그럴 틈을 안 보이려고 하니까 서운한 거죠.”

“그래. 네가 정말 복덩이라니까. 저 속을 알고 감당하니까 네가 난 놈이야.”

백대표의 말에 준영이 무언가를 생각하다 어렵게 입술을 뗐다.

“근데... 대표님. 만약에요...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형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준영의 말에 백대표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정말 좋아한다고 하면 언제든 데려 와라. 내가 온 힘을 다해 밀어 줄테니까. 저 놈 속 썩은 걸 생각하면 뭐 하나라도 해피엔딩이 되게 해줘야지. 다른 문제로 더 속 썩는 거 보고 싶지 않아.”

거기까지 말하던 백대표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근데 저 녀석은 지가 밀어낼지도 몰라. 알잖아.”

“그렇긴 하겠죠.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 감정쯤은 무시해 버리실 테니까요.”

“답답한 놈. 아무튼 당분간 잘 챙겨줘. 내가 얘기 했어도 선유한테 아마 연락할 것 같아.”

백대표의 말에 준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아, 걸어, 말아?”'

소민이 손톱을 깨물며 고민을 했다.

“하겠다고 했는데 굳이 전화를 해야 하나?”

물론 소민이 전화를 할까말까 고민하는 대상은 선유였다.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기에 만나야 하지만 직접 대면하는 건 둘째치고 전화통화만으로도 충분히 어색한 기운이 감돌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선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 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왜 나한테 그런 장난을 치고 난리야.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 괜히 기대감만 생기게.”

소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빛으로는 뚫어질 리 없는 핸드폰을 노려봤다.

“뭐하냐?”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씻고 나와서부터 자신이 아침을 다 먹어가는 이 시간까지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는 소민을 향해 민규가 물었다.

“고민해.”

“뭘?”

“전화를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누군데? 남자냐?”

“어.”

소민의 대답에 민규의 눈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뭘 고민해? 걸면 되지.”

그렇게 말한 민규가 소민의 핸드폰을 낚아채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과 부모님의 번호를 제외하고 가장 위에 떠 있는 남자이름을 꾹 눌렀다.

“야!! 뭐하는 거야!!”

민규가 소민에게 핸드폰을 내밀며 자랑스레 말했다.

“고민해결. 고맙지? 나 출근한다.”

그 말과 함께 민규는 출근을 해버렸고 손에 든 전화기를 보고 놀란 소민이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였다.

-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조, 좋은 아침이네요. 하하하하하하.”

소민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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