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화르륵~
54.
“이런 거야.”
그렇게 말한 선유가 고개를 내렸다. 코 앞까지 다가온 선유를 보는 소민과 시선을 맞추면서 선유가 조심스레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저 입술 위에서 지분거리며 그녀의 입술선을 따라 그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숨은 너무도 빠르게, 너무도 쉽게 그녀의 평온을 점령해 갔다.
조금씩 조금씩 깊숙이 무너지는 그녀를 따라 그가 더 깊이 내려 앉았다. 자신을 향하는 선유를 소민이 밀어냈다.
“이, 이러지 마요. 괜히 헷갈리게 이러지 말라구요.”
그녀의 움직임에 멈칫한 그를 밀어낸 소민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밀어냈다고는 해도 기껏해야 지척에 닿을 거리였다. 정말 밀어내고 싶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가까운 거리. 그가 내뱉은 숨을 느끼고 들이 마실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선유가 소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헷갈려.”
잔뜩 짙은 눈빛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선유의 시선에 끝에는 오롯이 소민이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확인해보자. 내가 널 원하는지, 너도 혹시 날 원하는지. 헷갈리지 않게.”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선유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헷갈리게 하지 말라 밀어냈지만 실상은 그가 다가와주길 바라는 모순이 자리 잡은 그 눈빛이 그의 눈동자를 통해 가감없이 비쳤다.
그녀가 핑계를 댈 수 있도록 그가 내어준 유혹이 너무도 달콤해서 소민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가 애써 만들어준 핑계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소민의 작은 그 행동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무너져 내리는 그와 함께 무너질 요량으로 소민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헷갈림 같은 건 그 순간에 없었다. 그저 서로의 향기에 취해 그가 그녀의 숨을 취하는 대로 내어주고, 그가 주는 대로 숨을 받는 달콤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유혹의 향연을 늘어놓는 그녀를 완전히 거부하기가 어려워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이었다. 망설이는 소민을 잡아 끌었고, 그 유혹에 굴복하는 소민을 취했다. 그리고 일전부터 궁금했던 그 소민의 숨이 흐르는 달콤한 영역에 도달한 선유는 소민의 향기에 취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탐할 만큼 탐했다 싶다가도 떨어질라치면 모자란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몇 번을 되돌아왔다. 겨우 입술을 뗀 그가 붉게 상기된 얼굴의 소민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그 때였다.
“형니임!”
준영의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선유가 순식간에 일어났다.
“자!”
선유가 손을 뻗어 소민을 일으켰다. 소민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은 피해야 하니까. 그리고 순식간에 식은 분위기에 소민이 선유를 외면하며 말했다.
“놔, 놔요. 누구땜에 지금 바닥에 이런 꼴로 있는 건데.”
그 말에 선유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현관으로 향했고 뒤에 남겨진 소민이 아직도 떨리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 왜 이래. 한선유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왜 이러는데? 설마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 없잖아. 헷갈린다느니 어쩐다느니 다 거짓말일 거야. 간을 주네마네 그것도 다 수작일 거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현관으로 설렁설렁 걸어가는 선유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뒷말을 내뱉고 나니 심장이 천천히 평상시와 같은 속도로 돌아갔다.
그 사이 선유는 준영과 집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근처에 소민씨 오신 것 같은데요?”
“어.”
“어? 어떻게 아세요? 밖에 차만 있던데?”
“당연하지. 사람은 내 집에 있으니까.”
“네? 언제부터요?”
“언제부터는 뭘 언제부터야. 방금 전부터지.”
“아... 난 또.”
설마 선유가 새벽에 소민을 데리고 들어온 건가 의심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근데 소민씨가 집에는 왜요?”
“계약 때문에 왔겠지.”
“별 일 없었어요?”
“뭔 일?”
선유가 심드렁하니 그렇게 말했다. 그 태도에 준영은 선유가 소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게 자신의 착각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 준영씨 왔어요?”
하지만 소민을 보는 순간,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소민이 등장하는 순간 선유의 몸이 유의하지 않으면 티 나지 않을 만큼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게다가 저 둘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긴장감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그건 테디베어가 아닐까.
“예. 안녕하세요. 소민씨. 계약 때문에 오셨나 봐요?”
“아... 뭐... 네.”
소민이 약간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요, 형님. 어쩌실 건데요?”
“뭘?”
“소민씨는 계약 때문에 오셨다잖아요.”
준영의 말에 선유의 시선이 소민에게로 날아가자 소민은 짐짓 집 구경을 하는 시늉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쯤 되면 문제는 선유의 선에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훤했다. 나름의 확신이 생긴 준영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거냐니까요? 갇혀 계신동안 시놉시스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신 양반이 무슨 시치미예요?”
그 말에 소민이 약간은 놀란 눈으로 선유를 바라봤다.
“정말 그걸 봤어요?”
“그 의문형은 뭐야?”
소민의 질문에 선유가 기분이 상한 듯 부루퉁하니 그렇게 답했고, 소민은 선유의 말에 변명을 했다.
“아니 정말 그렇게 열심히 볼 거라곤 생각 안했거든요.”
“대중이 안다고 생각하는 거랑 저희 형님이 상당히 다르긴 하죠.”
“다르다구요?”
준영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봐요. 소민씨. 형님 직업이 뭘까요?”
“배우죠.”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는 배우죠. 매니저로서 이런 말하면 웃기지만 웬만한 감독들도 선유형님 나오면 안심하구요.”
그건 그랬다. 이번 캐스팅 건도 제작사는 물론이요 감독까지 나서서 캐스팅에 힘써 달라 하는 판국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민이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준영이 척하니 허리에 손까지 얹고는 말했다.
“그런데... 정말 머리가 나쁘면 어떨까요?”
“어떻다니요?”
“만약... 배우가 머리가 나빠서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스토리인지도 모른다면? 혹은 배우가 머리가 나빠서 그 역할이 왜 필요한지 이해를 못한다면 또는!! 머리가 나빠서 대사를 못 외운다면?”
“다른 사람들이 힘들겠죠. 다작하기도 어려울 거구요.”
“바로 그거예요!! 형님이 머리가 나빠서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거나 그 역할이 왜 필요한지를 모르거나 대사를 못 외운다면!! 과연 감독들이 선호할까요?”
“그래도... 얼굴마담이라는게...”
“뭐? 얼굴 마담?!”
앞에서 대놓고 하는 뒷담화 아니 앞담화에 선유가 기찬 표정을 짓자 준영이 선유의 어깨를 몇 번 토닥거리고는 소민을 향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단순히 나오면 흥행한다는 이유로요? 요새 대중이 얼마나 예민해요! 발연기니, 로봇이니. 말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선유 형님은 그런 말 한 번도 들은 적 없거든요.”
소민이 준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준영이 반색을 했다..
“맞죠? 소민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선유씨가 머리가 좋은지는 아직 못 봐서 모르겠지만 대중이 생각하는 거랑 다르다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기껏 선유가 요새 그 유명한 뇌섹남이라고 매력을 어필해줬더니 딴소리였다. 허망한 표정을 짓는 준영을 향해 소민이 싱긋 웃고는 말했다.
“연예계 대표 싸가지로 소문났는데... 측근이 앞장 서서 편을 들어주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사실은 한선유씨가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거요.”
그 말에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왠지 민망해진 선유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선유의 말에 소민이 그를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기 사람들한테만 잘하는 유형인가봐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선인장이 따로 없네요.”
그 말에 선유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한테 친절을 바라면 내 사람이 되던가.”
그 묘한 대사에 소민이 벙 찐 표정을 지었고, 준영도 그닥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소민 쪽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올려 선유를 가리키며 해맑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미쳤나 봐요.”
“김준영, 간이 부었지?”
준영이 선유의 말에 겁먹은 시늉을 하자 선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무슨 착각들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계약 얘기하는 거야. 여기 온 이유, 계약 때문이잖아? 안 할 거야? 계약?”
“아, 맞아요. 해야죠. 계약. 그런데 백대표님이 안 계시는데 괜찮을까요?”
언제나 계약에는 적극적이라던 소민이 뒤로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자 준영이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히 답했다.
“그럼, 형님이 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거 같으니까 계약서는 백대표님 계신 곳에서 사인하죠, 뭐.”
준영의 말에 선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촬영은 언제부터 들어가는 거야?”
“반사전제작 드라마라서 아마 곧 들어갈 거예요. 다른 팀들은 거의 다 맞춰두고 한선유씨랑 조연들 사인만 바라고 있는 상황이라고 들었어요. 조연들은 거의 캐스팅 확정이라고 하니까 한선유씨만 확정지으면 돼요.”
“아, 그렇구나.”
소민의 말에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형님. 두 분 사이좋은 분위기를 방해해서 죄송한데 대표님이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하셨거든요.”
준영의 말에 소민이 펄쩍 놀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사이 좋기는요. 저희 사이 굉장히 안 좋아요.”
“뭐?”
소민의 말에 선유가 인상을 구기는 모습을 준영이 흥미롭게 바라봤다.
“아! 안 좋지는 않은데 막 엄청 좋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게...”
또 선유의 반응에 맞춰 당황하며 횡설수설하는 소민을 보며 준영이 씩 웃고는 말했다.
“그럼 소민씨랑 형님 사이좋은 걸로 하죠. 나쁜 거보다야 나으니까요.”
“네? 아, 네.”
얼결에 그렇게 대답한 소민이 자신의 짐을 챙겼다.
“저... 전 가볼게요. 대표님이 찾으신다는데 얼른 가셔야죠. 다음에 뵐게요.”
황급히 인사를 하며 빠져나가는 소민이 불현 듯 돌아서더니 선유에게 다가왔다.
“이거... 감사했어요.”
쇼핑백을 그에게 안긴 소민이 다다다다 달려 그의 집을 벗어났다.
“이게 뭐야?”
쇼핑백을 열어 본 선유의 눈에 어제 자신이 소민의 차에 덮어줬던 재킷이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내 거인 줄 알았나? 어떻게 알았지?”
선유의 질문에 준영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평소와 달리 진지한 준영의 목소리에 선유가 준영을 바라봤고, 선유를 살피며 준영이 물었다.
“채소민씨... 좋아하죠?”
“무, 무슨 의미야?”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말까지 더듬대는 걸 모습이 짝사랑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사춘기 소년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게 준영은 기뻤다.
“뭐 다행이네요.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김준영. 이상한 생각하지 마. 우린 아무 일도 없었어.”
“아, 우리?”
“그... 아니 채소민이랑 나.”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고.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을 하시려거든 얼굴부터 컨트롤 하셔야죠. 좀 있으면 자연발화하겠어요. 화르륵~”
“내가 뭘!”
큰소리를 치는 선유를 보며 준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전 응원합니다. 형님.”
“뭐, 뭘 응원하는데?”
“열심히 해보세요. 솔직히 저는 형님이 환관이나 내시로 전향하려는 건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게 아니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뭐?”
“조금 더 지켜보다가 여잘 좋아하는 기미가 조금도 안 보이면 혹시 취향이 바뀌신 건지 여쭤보려고 그랬는데 다행이에요.”
장난기가 다분한 준영의 목소리에 선유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질 무렵 준영이 또 다시 한마디 촌철살인을 날렸다.
“소민씨가 좋아죽겠는데 어떻게 다른 취향이겠어요.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라고 인정합니다.”
“이..이이... 김준영 이리 안 와?”
“아, 맞다. 지금은 형님 취향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대표님이 기다리시는 게 중요한 거였죠? 가시죠. 형님. 내려오세요.”
준영이 그렇게 말하고는 한달음에 선유의 사정거리에서 멀어졌고 예기치 못하게 자신의 마음이 탄로난 선유는 당혹감에 머리카락을 거칠게 넘기고는 이내 쇼핑백을 내려놓고 준영의 뒤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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