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53화 (53/105)

53. 너랑 있어서 그래

53.

선유는 창가에서 물끄러미 자신의 재킷이 얹혀 있는 가로등 아래 붉은 자동차를 바라봤다.

“아침까지 잘 기세네.”

마음같아서는 가로등 불을 꺼주고도 싶고, 편한 침대에 눕혀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의자라도 뒤로 눕혀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선유가 불을 끄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졸던 소민은 어느 순간 고개가 꺾이자 놀라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 졸린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인지한 그녀가 앞을 보는 순간이었다.

“엄마야!!”

차 앞 유리창에 웬 남정네가 엎어져 있는 모양새가 그녀의 눈에 들어와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비명에도 아무 반응이 없자 소민이 눈을 가렸던 손을 살그머니 벌려 다시 앞을 확인했다. 놀라 잠이 확 깬 눈으로 보니 그저 재킷이었다.

“아, 깜짝이야.”

민망함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자 소민이 살그머니 차에서 내렸다.

“뭐야? 누가 여기에 옷을 버리고 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 창문에서 재킷을 드는데 그 위에 있는 작은 종이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뭐지?”

그 말과 함께 소민이 종이를 들었다.

“한선유씨 아니야, 이거?”

종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의 정체는 선유의 증명사진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지금과는 다르게 조금은 어려보이는 선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잘생기긴 잘생겼네.”

그렇게 한참을 선유의 얼굴을 쳐다보다 생각 없이 뒷면을 돌려보는데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돌아왔음’

그 글자에 소민이 고개를 돌려 불이 꺼진 선유의 집을 올려봤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불은 꺼져 있었지만 어쩐지 아까 도착해서 봤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까는 저 큰 집이 휑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선유 한 사람이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집이 아늑하고 든든해보였다. 선유의 집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 소민이 그제야 자신의 품에 있는 옷이 누구 옷인지 깨달았다.

“이거... 한선유씨 거구나.”

밖에서 재킷을 떼어내고 보니 그제야 자신의 차 위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가슴이 말랑말랑 따뜻해지는 기분에 소민이 선유의 재킷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는 바깥공기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체취를 맡으며 속삭였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아침에 눈을 뜬 선유는 오랜만에 본 자신의 집 천장이 왠지 낯설어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벌떡 일어나 침실에서 나와 거실 창가로 다가갔다.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소민의 차는 없었다. 더불어 자신의 재킷도 없었다.

“누구 건지도 모르는데 막 집어간 거야? 큰일 날 여자네. 이 여자가.”

소민이 알고 가져갔다는 걸 알 리 없는 선유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덕분에 만날 이유가 생기긴 했네.”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와 그 옆에 놓인 모서리가 너덜해진 시놉시스를 선유가 슥 바라봤다. 시놉시스는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던 기간 동안 읽고 읽고 또 읽은 상태였다. 소민의 말대로 좋은 작품이었다.

그 때 그의 집 벨이 울렸다. 준영이 벌써 올 리는 없기 때문에 의아해하며 다가간 인터폰에 등장한 인물은 소민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가 여기 온 이유는 일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선유는 인터폰에 대고 그렇게 물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소민은 쇼핑백을 하나 들어보였다.

“배 안 고파요?”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자 소민은 선유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 아.”

괜스레 목청을 가다듬으며 현관을 향해 걸은 소민은 현관입구에 나와 문을 여는 선유를 살짝 훔쳐봤다. 나름대로 마음고생을 했는지 안 그래도 날렵한 턱이 이제는 턱으로 뭐하나 썰어도 될 만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런 선유를 향해 소민이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하여간 신경 쓰이는 사람으로는 대한민국 일등이라니까요.”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미안하군.”

“이틀 뒤에 보자더니 스캔들이나 터지고.”

“말했었잖아. 아니라고”

“그래요. 나한테 밑도 끝도 없이 아니라고 했던 게 그 말일 줄은 몰랐지만요.”

“그래서 내가 한 말을 믿었어?”

“워낙에 카사노바라서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긴 했는데.”

“했는데?”

“기다리니까 결국 당신 말이 맞더라구요.”

“소속사에 전화했었다면서.”

“그야 걱정되니까...”

그렇게 말하던 소민이 말끝을 흐렸다. 집안을 둘러보는 그녀를 배려하는 것인지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선유의 시선이 등에 따갑게 와 닿는 것 같았다. 애써 무시하며 걷던 소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돌아섰다.

“맞다! 이거요.”

소민이 뒤를 따르는 선유에게 불현듯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얘기치 못했던 소민의 행동 탓에 미처 걸음을 멈추지 못했던 선유가 그대로 소민에게 다가섰고 소민은 선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길게만 느껴진 그 짧은 순간에 소민은 사실은 심장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뛰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문을 품을 만큼 크게 뛰는 심장소리 때문에 기본적인 의학지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

사과를 한 선유가 먼저 소민에게서 떨어졌다.

“괘, 괜찮아요. 갑자기 멈춘 제 탓도 있는데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발끝만 바라보다 선유를 흘깃 올려다봤을 때였다. 카사노바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붉어진 얼굴을 한 선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왈칵 걱정이 됐다.

“한선유씨, 몸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뭐? 아니야. 괜찮아.”

걱정스런 마음에 소민이 들고 있던 쇼핑백도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고 그녀가 가까이 갈수록 선유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빨개요. 열 있는 거 아니에요? 어디 봐요.”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들인 소민이 자신의 집, 그의 공간 안에 있는 자체가 꽤나 자극적이었다.

“오지 마.”

“옮을까봐 그래요? 괜찮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요.”

부러 거리를 두려 뒤를 따라가는 거였는데 소민이 돌아서는 바람에 자신이 벌어놨던 거리가 좁혀지다 못해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그래서 또 다시 떨어지려 애쓰는데 소민은 계속 다가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오지 말라니까?”

“아, 누가 잡아먹는데요? 괜찮은지 잠깐 보자는 건데 왜 그래요?”

잡아먹히기보단 자신이 잡아먹을까 걱정이 되어서인데 소민은 그런 걱정은 전혀 안 하는 듯 보였다.

“여기 지금 너랑 나 둘이거든?”

“그래요. 그러니까 아픈지 안 아픈지 확인해줄 사람도 나밖에 없는 거죠.”

무슨 말을 해도 소민은 그의 상태 체크에 몰두해 있었다. 소민이 다가오는 걸 멈추는 게 어렵다고 판단한 선유는 애써 소민이 상대 배우고, 자신이 아픈 역할이라고, 이건 연기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되지를 않았다.

주춤주춤 물러나다 스텝이 꼬여 러그에 발이 걸린 선유가 뒤로 쓰러지자 선유를 졸졸 따라오던 소민도 쓰러진 선유에게 걸려 선유의 위로 넘어졌다.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화보촬영장에서처럼 아니, 이번에야말로 선유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제대로 엎어진 소민도, 소민의 깔개가 되어버린 선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선유가 속생각을 입 밖에 내버리면서 둘 사이의 정적을 깨버렸다.

“연기를 할 수가 없네.”

“무, 무슨 소리예요.”

당황스러움에 소민이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팔로 소민을 안은 선유가 부드럽게 몸을 굴렸다. 아까와는 반대로 소민이 아래, 선유가 위에 있는 그 상황에 소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비, 비켜요. 안 비켜요?”

비키란 말에 선유가 피식 웃었다.

“왜? 확인해봐. 내가 아픈지 안 아픈지.”

“그... 의사선생님한테 가볼까요? 제가 좀 생각이 짧았죠?”

“이마 짚어본다면서?”

그렇게 말한 선유가 소민의 작은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이마에 얹었다.

“어떤 것 같아?”

“어... 좀 뜨겁긴 뜨거워요. 정말 몸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선유의 따끈한 이마에 소민이 걱정의 빛을 띠고는 그렇게 물었다.

“내가 왜 열이 날까?”

“당연히 몸이 안 좋으니까 그러겠죠! 빨리 일어나요. 병원, 아니지 소속사에 연락해야 하나?”

그렇게 움직이던 소민의 입술은 선유의 다음 행동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선유가 이마에 얹었던 손을 옆으로 내리더니 그대로 자신의 손과 포개어 깍지를 끼고는 말했다.

“너랑 있어서 그래.”

선유의 말에 소민이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해야 했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선유가 다시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도망가.”

“무, 무슨 소리예요?”

“이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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