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52화 (52/105)

52. 바깥에서 밤공기 쐬

52.

선유의 질문에 퀸이 큰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원하는 건 내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뭐?”

“한선유씨 당신처럼요.”

퀸이 꺼낸 말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되고 있어서 선유의 의문을 담은 눈이 퀸을 향했다. 그런 선유의 시선을 모른 척, 퀸이 눈을 내리 깔고는 담담히 말했다.

“독한 척 하고 있지만 이 바닥 생활이 쉽지는 않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자리를 잡으려면 뭐가 좋을까 생각했어요. 한선유씨 하면 다들 스캔들, 여자, 그리고 연기. 이걸 떠올리더라구요.”

“그래서?”

“그래서 처음엔 한선유씨 덕을 보려고 했어요. 한선유씨랑 열애설 났던 여자 연예인들 다들 한선유의 여자라는 타이틀이 붙긴 해도 이름을 날렸잖아요.”

“그런 자리가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은데?”

“지금의 내가 가진 것보단 나을 테니까.”

“결국 중요한 건 자기의 능력치가 얼마냐야. 알아?”

퀸의 시선이 선유의 얼굴을 향했다.

“그쪽 말대로 한선유 하면 스캔들, 여자 떠올리지. 그리고 말한 것처럼 연기력도 떠올리고. 만약 내가 연기력이 없었다고 생각해봐. 어떨 것 같은지. 지금의 너하고 별 다를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아이돌이란 틀 안에 갇혀서 할 수 있는 건 한정돼 있어. 꿈이 있어서 들어온 건데 내가 기대한 거랑은 달라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이돌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나보다 더 매력 있는 애들이 수두룩해. 그 와중에 난 아이돌이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먹어가요. 그런데다가 회사에선 돈 버는 게 더 중요해서 내가 하고 싶지도 않던 드라마나 찍게 만들어요.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는 것 같으면 투어 돌리고, 팬미팅을 잡아요. 그렇다고 소속사에 항의할 수도 없어요. 그랬다간 이 바닥에서 매장될 지도 모르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어요? 한선유씨 한 번 말해 봐요.”

퀸이 절규하듯 늘어 놓는 말을 차분히 들은 선유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한테는 이게 최선책이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말든 일부터 벌리고 보는 게 맞다고?”

“그래요. 알아요. 옳은 일 아니죠. 그건... 미안해요. 근데 소속사에 목소리를 좀 내려면 뭐라도 있어야 했어요. 날 쉽게 무시하고 버릴 수 없는 그런 거요.”

퀸이 한층 수그러든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퀸을 바라본 선유가 자신이 갖고 왔던 봉투를 내려다 봤다. 지금 저 봉투를 열어 보이는 게 과연 맞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하던 선유가 봉투에서 고개를 돌리고 퀸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네?”

“네 꿈이 뭔데?”

“어... 난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근데 우리 회사에서는 내가 만든 음악은 경쟁력이 없다고, 돈이 안 된다고 안 써줘요. 들어올 때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돈 벌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말 그대로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웃기죠? 돈도 벌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한다는 거, 그거 터무니 없는 꿈이더라구요.”

나름대로 진지하게 그렇게 자신의 앞에서 고민을 털어놓는 퀸을 선유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음악을 만들었다는 건 작곡 공부를 했다는 거야? 소속사에서 해준 건가?”

“시간 날 때마다 내가 선생님 찾아서 했죠. 소속사는 그 시간에 안무연습이나 보컬트레이닝을 한 번 더 받으라고 난리구요.”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 퀸을 본 선유가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데뷔한 지 몇 년이나 됐지?”

“헐! 나랑 드라마까지 찍어놓고 그것도 몰라요?”

“모르니까 묻잖아.”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보며 입술을 삐죽인 퀸이 답했다.

“이제 거의 10년 돼가요. 내 나이는 알아요?”

“몰라. 중요한 거 아니면 기억 안 하니까. 어쨌든 그럼 계약 곧 끝나겠네? 보통 10년 하잖아.”

“뭐... 그렇겠죠. 그래서 사실 더 막막하기도 해요. 여기서 계속 있다간 내 미래가 안 보이는데 혼자 뭔가를 하긴 덜컥 겁이 나고.”

퀸의 말에 선유가 무언가를 잠깐 고민하더니 가지고 온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재킷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든 그가 봉투에서 꺼낸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더니 그녀에게 내밀었다.

“계약 끝날 때쯤 그 번호로 전화 해.”

“뭔데요? 한선유씨 번호?”

“뭐, 내 번호도 있긴 한데 그것보단 다른 번호가 더 중요한 거야.”

“다른 번호요? 무슨 번혼데요?”

선유가 퀸이 종이를 받아드는 걸 보며 말했다.

“우리 회사 대표 번호.”

생각지도 못한 말에 퀸이 고개를 들어 선유를 바라봤다. 두 눈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대표한테 얘기는 해 둘테니까 상담 해봐. 나보단 대표가 그런 쪽을 더 잘 아니까. 번호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뭐 그거라면 누구도 볼 생각은 안하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보던 퀸이 고개를 내려 다시 번호를 확인했다. 그 번호를 머리에 새기려는 것처럼 보던 퀸이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더니 어렵사리 입을 뗐다.

“나... 도와주는 거예요?”

“글쎄?”

“도와주려고 번호 준 거 아니에요?”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너한테 달렸지. 결국 거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하는 건 네 몫이니까.”

“왜... 요? 한선유씨 나 안 좋아하잖아요. 게다가 피해만 줬는데... 왜 도와줘요? 나한테 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요?”

그 말에 선유가 룸 너머를 투시라도 하려는 듯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너랑은 다르지만 나도 절박함이란 거. 느낀 적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선유가 쓰게 웃었다.

“그 때 도와준 게 우리 대표야. 그러니까 나보단 대표가 더 잘 도와 줄 수 있을 거야. 내 번호는 그냥 알고만 있고.”

“...... 고마...워요. 나 꼭 전화해 볼게요.”

“좋을 대로.”

선유의 말에 다시 한 번 번호를 들여다 보던 퀸이 생각없이 종이를 뒤집었다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녀가 던진 종이는 테이블 위로 팔랑거리며 떨어졌고, 떨어진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퀸이 더듬 더듬 말을 했다.

“저, 저, 저, 저 사진은 어, 어디에서 구했어요?”

“아 참. 그 얘기를 안 했네. 그건 그거고. 기사는 내려야지. 내용도 정정 하고. 저 사진 속 얼굴 낯익지 않아?”

그렇게 말한 선유가 퀸을 보며 웃었고, 퀸은 잠깐이나마 선유가 선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건 약주고 병 주기였다. 그것도 먼저 준 약과 전혀 상관 없는 병을 들이미는 선유는 악마였다.

*

기나긴 일주일이 그렇게 흘러갔다. 선유는 소속사에서 집 앞에 이제 기자들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 저녁 늦게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했다.

혹시나 자신의 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준영과 택시를 타고 천천히 언덕을 올라 집 앞 골목에 도착한 그의 눈에 이제는 꽤나 익숙한 붉은 스포츠카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네? 뭘요, 형님?”

준영과 스포츠카로 다가가던 선유는 이내 멈칫했다.

“약속 어겼다고 따지려고 하는 건가.”

따지자면 이틀 뒤에 보자고 본인이 말해놓고 본인이 어긴 셈이었다. 그의 의사대로 흘러간 상황은 아니긴 했지만.

“무슨 말인데요?”

“있어. 너 짐 안 무겁냐?”

준영의 말에 대충 대답한 선유가 그렇게 물었다.

“무겁죠.”

“그거 갖고 먼저 들어가. 들어가서 정리 좀 해 놔라.”

“아, 진짜. 끝까지 부려먹으시려고.”

“난 오랜만에 우리 동네 공기 좀 쐬고 들어가게.”

“그 공기가 그 공기죠.”

“어떻게 그 공기가 그 공기야? 자유의 공기야.”

“며칠 갇혀 계시더니 감수성 폭발이네요.”

“김준영. 내가 너 고생해서 지금 안 때리는 거니까. 얼른 들어가라?”

선유의 반 협박에 준영이 후다닥 집으로 뛰며 중얼거렸다.

“밤공기? 흥, 소민씨 향기겠지.”

올라오는 같은 언덕길에서 그렇게 튀는 빨간 스포츠카를 못 알아 볼 리 없었고, 준영도 그 차가 소민의 차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모르는 척해주길 바라면 그래주지 뭐. 이게 다 매니저 내공이니까. 형님 좋은 매니저 둔 줄 아세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준영이 짐을 들고 후다닥 뛰어갔고, 선유가 천천히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로등 불빛 아래 주차된 차 안에서 소민은 졸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길래 여기서 졸고 있냐. 목 아프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선유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꽤나 피곤했는지 이따금 큰길에서 나는 소음에도 그녀는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한 가지, 가로등 불빛이 밝은지 이따금 눈가를 찡그리긴 했지만.

“하여간 잔머리는 좋은데 다른 머리는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불빛 밑에 바로 주차해놓고 그 안에서 졸려면 햇빛가리개라도 내리던가.”

그렇게 중얼거린 선유가 자신이 입고 온 재킷을 벗어 그녀의 앞 유리에 얹었다.

“깨우기 미안하게 잘 자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느 정도 빛이 가려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선유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선유가 금방 돌아온 것도 뜻밖이었는데 그가 걸치고 있던 재킷도 없자 준영이 물었다.

“형님, 재킷은요?”

“바깥에서 밤공기 쐬.”

“네?”

“밖에 누가 올까봐 재킷만 밤공기 쐬라고 두고 왔다고. 내 옷이 나 대신 밤공기 쐰다는데 불만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토를 달기엔 준영도 꽤나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소파에 털썩 기대는 선유에게 그저 인사만 하고 마는 거였다.

“아무튼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이거 마무리 다 되면 너도 휴가 갔다 와.”

“진짜죠?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고생했다고. 갔다 오라고, 휴가.”

“형님. 사랑합니다. 저 갑니다. 쉬세요. 형님!”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린 준영이 그의 집을 빠져 나갔다. 준영이 터벅터벅 대문을 나서며 소민이 차를 세워둔 자리를 쳐다보는데 바깥공기를 쐰다던 선유의 재킷이 소민의 차 앞 유리창에 곱게 얹혀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소민을 끌어안으려는 듯 양팔을 벌린 모습으로 얹혀진 재킷의 모양에 준영이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뭐야. 주인대신 보디가드 서는 거야? 아니면 나한테 시위하는 건가?”

이 상황을 백대표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준영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마 백대표도 선유의 이런 행동을 알면 적극 동참할 게 뻔했다.

“이제 연애할 때도 됐지, 뭐. 그나저나 저렇게 올려놓으면 소민씨는 저게 누구 옷인지도 모를지 모르는데. 하여간 생각의 깊이가 얕아.”

그렇게 중얼거린 준영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선유가 얹어놓은 옷으로 다가갔다.

“이 정도면 알겠지.”

꼼지락 꼼지락 무언가를 한 준영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작품을 바라봤다.

“나 같은 매니저가 어디 있어? 하여튼 형님은 날 만난 걸 감사해야 해. 그나저나 기왕 불 붙여주기로 한 거 폭약이 될 만한 게 필요한데...”

그렇게 중얼거린 준영이 몸은 지쳤지만 마음만은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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