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목소리가 영 안 좋았다고
51.
기사를 봐도 떠오르는 건 그 여자, 채소민이라니 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긴 뭐 오해했어도 그 약속 이틀 뒤로... 아!”
소민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 선유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었다가 이내 내려놨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어떤 말도 소용이 없을 거란 것을 알았다. 게다가 잘못하면 이 스캔들과는 전혀 연관도 없는 그 여자가 엮일 수도 있었다.
뭣보다도 그 여자는 자신을 캐스팅 대상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한 번 한 말을 다시 한다는 게 뭔가 구차해보이기도 했다.
“나가서 직접 발로 뛸 수도 없고. 답답하네.”
선유가 쇼파에 앉아 얼굴에 마른 세수를 할 때였다. 준영이 꽤나 피곤한 얼굴로 들어왔다.
“형님. 찾았어요.”
룸에 들어오자마자 그렇게 말한 준영이 벌떡 일어선 선유에게 꽤나 두툼한 봉투를 넘겼고, 봉투를 받아든 선유가 내용물을 꺼내 들고는 즉시 정독했다.
아니나 다를까 퀸이라는 그 여자아이는 어릴 때부터 한 가닥 아니 두 세가닥은 하는 여자애였다.
“근데 반전은 역시 사진 아니에요?”
“그러네.”
이건 뭐 거의 인조인간 수준이었다. 이게 과연 그 퀸일까 하는 의심이 들만큼 다른 얼굴이어서 이게 증거로 효과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준영도 그게 걱정이 됐는지 용케도 퀸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낸다는 동창생 한 명을 구워삶아 녹취까지 받아온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그녀가 수술한 성형외과를 찾아 그녀를 수술한 의사와 모르는 척 감탄하는 척하며 퀸이 전신성형이나 마찬가지인 성형을 했다는 사실을 캐오기까지 했다.
“좋아. 잘했어.”
“그럼 이제 이걸 기사로 터뜨릴까요?”
“뭐 하러 그래? 그러다 나만 독박 쓴다. 그냥 퀸인지 신데렐란지 하는 애랑 만날 약속이나 잡아.”
“만나서 뭐하시게요? 이제라도 받아주시게요? 이걸 보고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성인군자예요?”
“헛소리 자꾸 할래? 지가 벌인 일은 알아서 수습하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만날 약속이나 잡아. 눈에 안 띄게.”
“이제 막 일 끝내고 왔는데.”
“그럼 세 시간만 자고 나가.”
“됐어요. 형님이 가만히 있는 바람에 온갖 기사가 나가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쉬어요. 다 끝내고 나면 휴가나 주세요.”
“그러든가.”
“아, 맞다. 형님. 소민씨가 전화했었대요.”
“뭐?”
“형님 이틀 뒤에 보자고 약속 했었다면서요?”
준영의 말에 성마르게 반문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뭐래?”
“약속은 좀 미뤄도 된다고 했다고는 하는데... 목소리가 영 안 좋았다고...”
소민도 기사를 본 게 분명했다. 하긴 이렇게나 시끄러운데 안 봤으면 이상한 일이지만.
“알았어.”
“빨리 만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혹시 다른 캐스팅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든가.”
“여기서 나가야 만날 거 아니야.”
“아, 그러네요. 알겠어요.”
선유의 말에 준영이 일어나 룸을 나갔고 선유는 애써 소민이 전화했단 말을 지우려 노력하며 파일을 천천히 두 개로 나눠가면서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었다.
준영이 약속을 잡아온 것은 이틀 뒤였다. 약속을 받아오고도 씩씩댄 준영이 겨우 열을 가라앉히고 한 말이 그랬다.
“아, 그 기집애 진짜 열 받게 하던데요?”
“왜?”
“아니. 지가 잘못했으면서 콧대 높이더니 자기 바쁘다고 인터뷰 따러 가야 한다고 열 받게 하질 않나, 형님도 같이 인터뷰하게 나오라고 부르라고 하질 않나. 정 만나고 싶으면 내일 오후에 잠깐 짬내겠다면서 완전 진상짓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일 오후에 몇 시?”
“3시에 보재요.”
“장소는?”
“아, 그건 제가 우기고 우기고 우겨서 여기 호텔 VIP들 가는 바에 구석으로 맞췄어요.”
“고생했다.”
“같이 가드릴까요? 형님?”
“뭐하러?”
“아니. 기집애가 보통이 아니니까.”
“김준영. 잊었냐? 그 정도는 나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
선유의 나지막한 말에 준영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낯으로 선유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걱정돼서 그럽니다.”
그런 준영의 표정을 모르는 척 선유가 답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적어도 그 여자애보단 내가 이 바닥에 더 오래 있었고, 그 여자애보다는 내가 어른이니까.”
선유가 잘라 그렇게 말하자 준영도 순순히 물러났던 것이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선유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사장한테는 조금만 더 버티라 그래. 내일 내가 걔 만나면 모레쯤에는 기사 다 바뀔 거니까.”
“예. 알겠어요.”
“고생했으니까 들어가서 쉬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요? 수정기사 내려면 우리도 기자들 잡아놔야 하는데. 내가 아주 복 터진 놈이에요.”
“뭐?”
“복 터진 놈이라구요. 일 복!”
그렇게 투덜투덜 준영이 또 다른 일을 하러 나가고 선유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가 이내 또 내려놨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잘못 행동하면 소민에게 해가 끼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소민에게 연락을 하는 건 미뤄두기로 했다.
*
다음 날, 선유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준영이 예약해 놓은 바로 올라가 있었다. 낮 시간인데다 VIP만 오는 곳인지라 몇몇 사람이 보이긴 했지만 확실히 한산했다. 그리고 그가 자리잡은 룸은 그 중에도 안쪽이라 확실히 이목을 덜 탈 터였다.
술 대신 물로 입술을 축인 선유가 손목에 걸린 시계를 슥 쳐다봤다. 세시에서 1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하여간... 약속시간도 못 맞춰요. 현장에도 만날 늦게 오더니.”
선유가 물을 다 마시고 밀려오는 짜증에 얼음을 와작와작 씹을 때에야 문이 열렸다.
“안 가고 기다렸네요? 봐요, 나 좋아하는 거 맞잖아.”
“문 닫아.”
“어머, 급해요?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어요?”
얼굴에 대체 아이언맨이 썼던 갑옷이라도 두른 건지 여자애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쉬지 않고 그런 망언을 해댔다.
“앉아. 이 바닥에서 계열이 달라도 내가 선배인데 올려다보는 거 기분 나쁠 거란 생각 안하나?”
그 말에 퀸이 자리에 앉아 선유를 쳐다봤다.
“이유가 뭐야?”
“이유라니요?”
“이런 일 벌인 이유 말이야.”
선유의 말에 대단히 웃긴 말이라도 들은 양 여자아이가 미친 듯이 깔깔거리고 웃어대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선유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연인사이잖아요. 아, 아직 아니지. 아무튼 오빠도 나를 좋아하고. 나도 오빠를 좋아하는데 아직 사귀자고는 서로 못했으니까 썸타는 사이라고 봐야 하나요? 어쨌든 기사도 나고 했으니까 이제 대놓고 연애해도 괜찮잖아요. 내가 먼저 용기 냈으니까 오빠도 이제 그만 튕기죠?”
그렇게 말하는 여자아이를 선유가 노려보다 이내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말했다.
“넌 그런 자신감이 대체 어디서 나오냐?”
“어디긴 어디겠어요? 사랑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한다. 몰라요?”
그 말에 선유가 피식 웃었다.
“사랑, 맞기는 하고?”
“무슨 소리예요?”
“그냥 네 욕심대로 하려는 거 아니냐고.”
그 말에 퀸의 미소가 짙어졌다.
“맞아요. 근데 내 욕심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나는 언제든 불 탈 준비가 돼 있었는데 기름을 뿌린 사람이 있거든요.”
“알아듣게 말해.”
“임지유랑 무슨 사이예요?”
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선유의 얼굴 표정이 급속히 변하자 퀸의 얼굴에도 흥미롭다는 표정이 어렸다.
“내가 안 정보랑은 다르게 둘이 뭔가가 있긴 했나 보네요.”
“네가... 뭘 아는데.”
“임지유가 한선유씨 코디로 일했었다는 거. 그러다 지금의 소속사에 발탁돼서 그만 뒀다는 거.”
그 정도까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특출난 건 없었다.
“별 거 없네.”
그 말과 함께 얼었던 표정이 약간은 풀린 선유를 보며 퀸이 쐐기를 박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글쎄요? 과연 별 거 없을까요? 하나 얘기해 줘요?”
뭔가 있는 듯한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유가 퀸을 바라보자 퀸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예전 일은 난 몰라요. 근데.”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건지 한 템포를 쉰 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지유가 한선유한테 다시 흥미를 가졌다는 거, 그건 알고 있어요. 아무 사이도 아닌 한선유를 자기 거라고 말하면서 내 뺨을 때릴 만큼 꽤나 절박하다는 것까지.”
그 말에 선유의 눈이 퀸을 향했다.
“이제 제대로 얘기할 마음이 생겨요?”
“그래서?”
선유가 되묻자 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뺨을 맞은 값은 돌려 받아야겠다는 거죠.”
“내가 왜 그 값을 치러야 하는데? 때린 사람한테 가서 받아.”
“아,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럼 인터넷에 셋이 한 번 이름 올려볼까요?”
나이에 맞지 않게 꽤나 대범하게 배팅을 하는 퀸의 모습에 선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내가 무너지길 바라는 건가?”
예상치 못한 선유의 말에 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다음 말이 이어졌다.
“아니면 임지유가 시켰나?”
그 말에 퀸의 뇌가 빠르게 가동하면서 그의 말들이 차곡차곡 정립이 되기 시작했다.
“임지유는... 당신이 무너지길 바랐단 거예요? 왜요?”
그의 말에 대한 퀸의 반문이 답이 되어 지금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정확히 인지시켰다.
“넌 아니란 소리네. 그럼 뭐야? 내가 널 무너뜨리기 전에 똑바로 말해.”
당차게 그를 협박하려던 퀸이 선유의 날 선 반응에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녀 혼자서 감당하기에 한선유는 너무 크고, 단단했다.
“그래요. 나는 당신더러 무너지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당신이 나를 찬 건 기분 나쁘지만 나도 순수한 의도로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니까.”
“누구랑 같네.”
그렇게 중얼거린 선유의 시선이 날카롭게 퀸을 향했다.
“그래서? 의도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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