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50화 (50/105)

50. 괜히 나 때문에

50.

“뭐? 배역 때문이라고? 이 나쁜 놈. 이 나쁜 놈.”

소민은 보조석에 있는 토끼탈을 패면서 나쁜 놈을 수도 없이 외쳤다. 씩씩거리다 분에 못 이겨 토끼탈을 뒷좌석으로 던진 소민이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 또 다시 선유에 관한 기사로 시끌시끌했다. 선유가 배역이지 연인사이는 아니라고 했던 그 여자, 퀸과 열애설이 난 까닭이었다.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리자, 채소민.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너는 너야!”

그렇게 중얼 거린 소민이 겨우 고개를 들고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진지하게 고려해 본다더니. 이 사기꾼.”

밖에 나와 있어도 선유의 생각을 쉽게 그칠 수가 없었다. 이틀 뒤에 보자던 선유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잠적 상태였다. 그늘에 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선유가 계약을 진지하게 고려해보겠다고 한 일마저도 꿈 같았다.

“하아...”

소민이 그런 사람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뱉어낼 때였다.

“채소민.”

“어, 왔어?”

옆에서 골프우산을 들고 서 따라오는 매니저를 가라고 손짓한 혜민이 건물 그늘 밑으로 들어와 소민이 앉은 의자 옆에 앉았다.

“어쩐 일이야?”

혜민의 말에 소민이 자신의 손에 들린 보온병을 들어 보이자 혜민이 피식 웃었다.

“뭘 매번 그렇게 갖고 오고 그래?”

“별거 아니야. 도라지 차. 촬영 하다 보면 목 상할 것 같아서.”

“센스 있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혜민에게 소민이 보온병에서 도라지차를 따라 건네며 옆에 앉았다.

평상시 같으면 또 뭐라 뭐라 종알거릴 소민이 오늘은 잠잠하자 혜민이 슬쩍 소민의 얼굴을 살폈다. 왠지 멍한 게 영 딴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고민 있어?”

“아, 아니. 고민은 무슨.”

“아니긴 뭘 아니야. 얼굴에 고민이 있다 딱 써져 있는데. 왜? 한선유 계약 아직도 지지부진해?”

그 물음에 소민이 움찔하자 혜민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니. 계약서는 전달했어. 진지하게 고려해본다고도 했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다 끝났네.”

“그게... 계약서 받고 이틀 뒤에 연락을 주기로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그것도 그렇고...”

“또 뭐? 아... 혹시...”

혜민이 뭔가 어렴풋이 가닥이 잡힌 표정을 지었다.

“선유가 열애설이 터져서 그래? 계약에 차질 있을까봐?”

“뭐...”

“근데?”

“어?”

“한선유가 열애설이 터진 게 뭐 어때서? 늘 터지는 열애설인데 뭐 어때?”

“그렇지만 나한테는 퀸이랑 아무사이 아니라고 했었거든. 게다가 지금 연락도 없으니까.”

“웬 약한 소리야? 이 바닥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야?”

그렇게 말하던 혜민이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고 있는 소민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면 설마...”

입술을 떼던 혜민이 입을 다물고는 소민을 다시 한 번 흘깃 본 다음에 물었다.

“한선유랑 연락이 꼭 돼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거야 당연히!... 계약 때문이지.”

말끝을 흐리는 소민을 혜민이 피식 웃으며 바라봤다.

그녀는 캐스팅대상에게 깜찍한 협박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외에는 철저한 을로써 처신했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 열애설에 신경을 쓴다? 거기다 선유의 말도 생각해 보니 웃겼다. 선유가 소민에게 퀸과 아무사이가 아니라고 굳이 해명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소민은 캐스팅 디렉터이지 연예부 기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소민은 선유의 열애설에 신경을 쓰고 선유는 소민에게 여자관계를 해명했다고 했다. 혜민의 눈에는 답이 빤히 보였다.

“선유가 연락 안 한다고 섭섭해 하지 마. 아마 그 쪽도 눈 돌아가게 정신없을 걸?”

“안 그래도 소속사에 연락은 해봤는데 연락은 어려울 것 같다고 다시 전화주겠다고 하더라구.”

“당연히 어렵지. 알잖아. 이 바닥. 열애설이 터지면 일단 잠적인 거. 그 누구와도 연락 차단.”

“그렇긴 하지.”

“기다려 봐. 좀 잠잠해지면 연락 오겠지.”

혜민이 해줄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였다. 선유가 어떤 상황일지 모르는데 섣불리 희망을 심어줄 수는 없으니까. 아마 이번 열애설이 사실이 아니라는데 혜민은 자신의 배우 인생을 걸 수도 있었다.

천하의 한선유가 여자에게 여자관계를 해명하다니. 그를 조금 깊이 아는 사람이라면 헛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그런 걸 해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근데 한선유가 정말 그 애랑 연애한다고 확신하는 거야?”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을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소민도 선유가 한 말을 믿고 싶었다. 그는 소민이 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뭐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기사로 확인하라고까지 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 믿기 힘든 거였다. 열애설이 터질 것이라는 사실을 선유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그거 알아? 열애설은 굴뚝 하나에 같이 붙어 앉아서 피우지 않아도 연기가 난다는 거.”

“어?”

“열애설이란게 그래. 혼자서 불 피워도 굴뚝에 연기는 나는 법이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됐고. 옆에서 본 바로 한선유 어떤 것 같아? 소문처럼 밥맛 같아?”

사실 소문이 부풀려져 있다는 것은 혜민이 더 잘 알았다. 하지만 소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글쎄... 소문처럼 싸가지인지는 잘 모르겠어. 분명 틱틱거리는 게 맞긴 한데 또 그게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기보다는 사람 대하는 게 서툴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남자로서는 어떤 것 같아?”

“그건...”

그 때 혜민의 핸드폰이 부르르 울렸다. 혜민이 폰을 확인하고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역시나.

“한선유 열애, 사실이 아니라는데?”

“뭐?”

고개를 번쩍 드는 소민을 향해 혜민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연예 속보로 뜬 기사의 제목은 “퀸 전격 고백! 한선유와는 동료 사이.”였다.

“나... 다음 일정이 있어서 가볼게.”

기사를 읽은 소민이 벌떡 일어나 혜민에게 그렇게 말하자 혜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띠고는 손을 흔들었다.

“다음일정이 한선유겠지. 그나저나 바보들 둘이 만나 저걸 어쩌냐.”

혜민이 아까와는 다르게 활기찬 빛을 띠고 뛰어가는 소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유가 지친 듯 소파에 털썩 몸을 기댔다.

“아무튼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고생했다.”

“별 말씀을요.”

“가봐. 가서 좀 씻고 쉬어라. 얼굴이 거지꼴이다.”

“네. 형님도 쉬세요.”

그렇게 말한 준영이 기지개를 켜며 그의 집을 빠져 나갔다.

혼자 남은 선유는 정신없이 지나간 며칠을 떠올렸다.

소민을 만났던 날, 사건이 터졌다. 퀸이 열애설을 내버린 까닭이었다. 준영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소속사에서 마련해 둔 아지트에 바로 들어가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집에 갇혀 있어야 할 뻔 했다.

사방에 기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전, 그가 있는 아지트로 찾아온 준영의 손에는 짐이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준영의 모습과 짐을 바라보며 선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놈의 기자들은 매 번 지치질 않냐.”

“매 번 형님 덕에 먹고 사는 거죠.”

“내가 밥벌이용이란 말이야?”

“웬만한 중소기업급이죠. 형님이.”

“좋아해야 하는 거냐?”

“근데...... 형님, 아니죠?”

“뭐가?”

“열애설이요.”

“너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요.”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준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은 뭐래?”

“뭐라 그러실 틈이 있나요? 일단 수습하느라 바쁘신데요.”

“하긴.”

“근데 퀸이 왜 그랬을까요?”

“뭐가?”

“왜 혼자 열애설을 냈을까 이 말이죠.”

“들이대는 거 내가 찼거든.”

“네?”

“드라마 찍을 때 차에 와서 들이대길래 깠어. 아, 영화인의 밤에서도 들이대던데. 여자가 너무 들이대더라.”

“퀸을 깠다구요?”

준영의 질문에 선유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 아니에요.”

준영이 그저 짜증이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선유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핫하다는 그 아이돌을 거부하다니. 선유는 역시 보통 이상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쪽으로 바로 오셨어요? 기자들 안 마주치셨어요?”

“어. 캐스팅디렉터랑 만나던 중이었거든.”

“혼자요?”

“그럼 떼로 만나냐?”

“소민씨랑 같이 계셨으면 그렇다고 말씀을 하시지.”

“왜?”

“그 쪽이 더 안전하니까요?”

“미쳤냐. 괜히 나 때문에 그 여자까지 힘들게 할 일 있어.”

“뭐 어때요? 소민씨랑 스캔들 나면 그 여자아이돌은 가짜라고 바로 터뜨릴 수 있는데.”

슬쩍 떠보는 준영의 말에 선유가 사나운 눈빛을 날렸다.

“헛소리하네. 팬덤 있는 아이돌이랑 일반인인 그 여자가 같냐? 괜히 그 여자만 피 볼 게 뻔한데 빨리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지.”

“왜요? 소민씨가 피 볼까봐 겁나요?”

“그래.”

질문에 바로 그렇게 답하는 선유를 준영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선유가 약간은 붉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나 때문에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할까봐 그래.”

“예. 예.”

아무리 말해도 믿기지 않았지만 대충 그렇게 답을 한 준영이 짐을 푸는 때였다.

“준영아. 조사 좀 해라.”

“뭘요?”

“이런 일 하는 애들 보면 대체로 학창 시절에도 막 놀던 애들이 많거든. 어떤 애였는지 조사 좀 해봐.”

“역시 형님. 머리는 좋아요? 사람들이 이런 걸 좀 알아야 하는데.”

“멍청해보여서 좋은 것도 많아. 됐고, 가서 알아보기나 해.”

“예.”

그렇게 준영에게 주문하고서 속절없이 사흘이나 시간이 흘렀다. 전화만 켰다하면 밀려드는 기자들의 전화 탓에 전화기도 꺼버려서 누구와도 연락할 수도 없었다.

“이 여자,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설마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텅 빈 방안에 흘러나오는 자신이 나오지만 자신과는 무관한 연예특종을 보며 선유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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