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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49화 (49/105)

49. 같이 있고 싶은 건가

49.

평온하게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 본 화보가 생각났다. 화보에 나온 자신의 모습보다도 그의 품에 뛰어 드는 것처럼 나온 그 사진이 더 시선을 끌었다.

의자에서 떨어지던 순간에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선유의 표정도 기억이 나질 않았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찍힌 그녀의 모습에는 그렇게 떨어지는 찰나에도 두려움이란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시선은 오롯이 선유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사진을 보는 순간 그 때 들었던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순간에는 오직 선유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만이 들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덜 넘어지려고, 선유에게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 주려  팔을 뻗었었다.

사진에서는 그 모습이 그저 연인의 품에 정열적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나와 의아했는데 선유를 보는 순간, 그게 오롯이 선유의 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짧은 순간, 떨어지는 그녀를 향한 눈빛, 표정, 마주 뻗어준 팔을 포함한 몸짓까지. 그의 전신에서 얼마든지 그녀를 든든하게 지탱하겠다는 의지와 안심하라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었다. 그리고 꿈을 꾸게 만들었다. 저 품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한 번 안겨보고 싶다고.

그녀를 향한 그의 그 분위기가 순식간에 그녀를 압도했고,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졌었다. 그래서 떨어지는 순간에 그런 표정이 나왔나 보다.

“당신 진짜 이상한 남자예요.”

소민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덮고 있는 그의 앞머리를 살며시 넘겼다.

그가 밑에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도감이 들게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느 순간에는 심장이 간질간질해서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그리고 또 어느 순간에는 심장이 한순간에 지구 반대편까지 쿵 떨어지는 듯 한 느낌이 들게 하는 그런 남자였다.

“어떻게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눈을 감고 그 시간을 즐기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 봐, 이 봐, 일어나라고.”

“우우우웅.”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키스로 일어나고 싶은 게 아니면 얼른 좀 일어나지?”

그녀의 귓가를 강타하는 그 말에 거짓말처럼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주변을 돌아본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언제...”

“그 쪽이 자는 사이에.”

그의 차는 어느 새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깨우지 그러셨어요.”

그녀의 말에 선유의 입가에 삐딱한 웃음이 걸쳐졌다.

“구미호씨. 평상시에 누가 깨우면 잘 일어나는 편인가?”

그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가 그 쪽을 안 깨웠을 거라고 생각해?”

이번에도 고개가 가로 저어졌다. 그의 동생인 민규는 한 번 잠이 들면 일어날 줄 모르는 그녀를 깨울 때마다 그녀를 산에 갖다 묻어버리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아무도 깨울 일이 없도록 아주 영원히 재워버리고 싶다며.

“그렇게 무방비해서 어쩌려고 그래?”

“뭐가요?”

“내가 나쁜 놈이라서 그 쪽을 납치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선유의 말에 소민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면서 무심한 듯 대답했다.

“설마요. 한선유씨가 그러면 유명인이라서 타격이 클텐데 그러겠어요? 나를 납치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소민의 말에 선유가 그녀를 바라봤다.

“글쎄? 장담할 수 있어?”

웃음기라곤 없는, 농담같지 않은 그 말에 소민이 그를 바라봤다. 그런 소민을 보며 피식 웃은 선유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좀 더 잤으면 오로라 공주처럼 키스로 눈을 뜨는 건데 아쉽지 않아?”

농담처럼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눈동자가 새카맸다. 그런 선유의 시선에 소민이 숨이 멎을 듯 한 기분에 머뭇거리다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말했다.

“어... 갈게요. 오늘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후다닥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선유가 그녀를 붙잡았다.

“이 봐. 내가 아까 한 말 뭘로 들었어? 계약서도 안 주고 도망가면 어떻게 해?”

“아! 계약서! 잠깐 기다려요. 오늘 제운씨만 볼 예정이어서 집에 놓고 나왔으니까.”

그렇게 말한 소민이 집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소민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는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댔다.

“착각하지 마. 채소민. 한선유한테 저런 멘트는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네가 자꾸 이러니까 한선유가 그러지. 봐. 지금도 저 사람한테 넌 그냥 캐스팅 디렉터라고. 놀려 먹기 쉬운.”

선유의 결 좋은 머리카락에 닿았던 손을 내려다 본 소민이 그 손을 가슴에 품어 안았다. 언제부턴가 선유의 앞에서 자꾸만 정상 심박을 잃는 가슴에, 생생하게 선유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는 그 손을 얹으면 진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왔냐? 오늘 안 올 것처럼 얘기하더니? 하긴 인터넷이 난리였는데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만 하지.”

민규의 말을 흘려 들으며 방으로 들어간 소민이 선유의 계약서를 들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뭐? 또 어디 가는데?”

“요 앞에. 한선유 계약 때문에.”

“오~ 드디어 계약 하냐? 축하한다.”

“아직 몰라.”

축하한다는 민규의 말에도 소민은 시큰둥하니 대답하고는 집을 나섰다.

“계약서도 받았고, 내용은 어떤 것 같아요? 제작사에서 한선유씨 유리하게 했다고는 하던데.”

“내용도 아직 다 못 봤어.”

선유가 소민이 건넨 계약서를 꼼꼼하게 훑어보며 그렇게 답했다. 집에 갖다오는 데 시간이 오래도 걸리더니 꽤나 지쳤는지 소민이 그의 차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왔다.

“오늘 꽤나 힘들었나 봐?”

“왜요?”

“기운이 없어 보이길래?”

선유의 말에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끄덕인 소민이 망설이다 입을 뗐다.

“정말 하게요? 계약을요?”

“고려해 본다고 했잖아. 내가 한 말을 어길 생각은 없어.”

처음엔 그렇게 바라던 거였는데 지금은 소민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의 앞에서 소민은 계약서를 정독하며 진지하고 꼼꼼하게 읽는 선유의 모습을 이 어두운 차안에서도 빛이 나는 듯 한 그를 약간은 의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애써 보지 않아도 느껴지도록 와 닿는 시선에 선유가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왜? 그냥 뒷장에 사인 후루룩 해버리고 말 것 같았는데 이상해?”

그녀의 속마음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짚어내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아닌 척 눈길을 돌렸다. 그런 소민을 흘깃 바라보는 선유의 시선에 소민이 우물쭈물 물었다.

“기분... 나빠요? 그렇게 생각해서?”

“뭐, 기분이야 나쁘지만 어쩌겠어. 이미지가 그런 걸.”

“꼭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소민의 말에 피식 웃은 선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는 거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이내 다시 계약서를 살피는 선유의 옆모습을 소민이 조심스레 훔쳐봤다.

자동차 불에 의지해 계약서를 읽는 그의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은 잔근육이 잡힌 게 탄탄해 보였다. 집중해서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모습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감상이라도 시키고 싶을 정도로 근사했다. 내가 저 팔에 안겼었다고 자랑도 좀 하고.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조용한 차안에 간혹 선유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와 둘의 숨소리만 가득한 것이었다. 그 고요함 속에 들려오는 선유의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숨소리가 듣기 좋다는 말이 웃겼지만 정말 그랬다. 그 때 둔탁한 진동음이 그 고요한 평화를 깨뜨렸다. 선유의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고 선유가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상대방의 말에 선유의 미간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던 선유가 소민을 한 번 흘깃 쳐다보더니 “알았어. 갈게.”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건 좀 미루도록 하지. 한 며칠.”

“왜요?”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아! 미리 말하는데. 확실하게 아니야.”

“뭐가요?”

“나중에 기사 보고 속았다고 하지 말라고 미리 말하는 거니까. 기사보고 내 말 기억해. 그리고 이틀 뒤에 보자고.”

“어... 그럼 이틀 뒤에 계약 하겠다는 소리예요?”

“이틀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 좀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래요. 그럼.”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소민이 그를 쳐다보자 그가 소민을 마주 쳐다보더니 점점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왜, 왜 이래요?”

소민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소민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다가온 선유의 향기에 질끈 눈을 감는데 이내 찰칵하는 소리가 나고도 한동안 그녀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가만히 있는 듯 했다.

“뭐해?”

“에?”

눈을 뜨자 선유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기대하는 거라도?”

“내가 뭐, 뭘 기대해요!”

“난 또 눈 감고 있길래 뭐 기대하나 했지.”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앞에 있던 선유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아니거든요? 근데 방금 뭐 한 거예요?”

“안 내리길래. 문 여는 법을 모르나 해서.”

“네?”

선유의 말대로 그녀의 옆 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내, 내가 바본 줄 알아요? 문도 못 열게? 아까도 잘만 열고 닫았구만!”

“그럼, 뭔데?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건가?”

피식 웃는 그의 얼굴에 얼굴이 붉어진 소민이 황급히 얼굴을 차 문 쪽으로 돌렸다.

“뭐, 뭐래요.”

“이봐, 이봐, 내 팬 아닌 게 확실하다니까? 내 팬이면 당연히 나랑 같이 있고 싶어야지. 어쨌든 지금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하니까 이만 내리지? 아니면 내가 공주님 안기로 안아서 내려줘?”

“내, 내려요. 내려. 내리려고 몸 틀은 거 안 보여요?”

혹시나 선유가 붙잡기라도 할 새라 부리나케 내리자 선유는 차에 시동을 걸고는 창문을 내렸다.

“이틀 뒤에 보자고.”

그렇게 말한 선유가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민의 뇌리에 선유가 다가올 때 혼자 착각하던 자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자 광야의 소떼마냥 민망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유의 말이 가시가 되어 박혔다.

‘이틀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

“그래. 계약하고도 아예 못 보는 건 아니니까. 계절이 지나가는 게 아쉬운 것처럼 조금 아쉬운 것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한선유랑 계약하고. 계약하고...”

거기까지 말한 소민이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입술을 한 번 꼭 깨물었다.

“이틀 뒤에도 같이 있어도 되냐고 물어보면... 있어도 된다고 해줄까.”

입 밖으로 빠져나온 진심은 혼잣말이 되어 다시 그녀의 귀로 돌아왔고,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야 했다.

“일단 물어보자. 물어보고 그런 다음 생각하자.”

그 때까지는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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