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아는사람얘기
45.
“에?”
선유의 말에 멍하니 있던 소민이 그렇게 되물었지만 선유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이내 소민을 쳐다보고는 물었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뭐를요?”
“내가 무 때문에 그런다는 거 말이야.”
“아... 역시. 무 때문에 그런 거 맞구나.”
“몰랐어?”
“그냥 짐작만 했던 건데 맞았네요.”
“어떻게 알았어?”
“촬영장에서 한선유씨 무는 절대 안 먹는다 그랬고, 무국 쏟은 옷에서 무 냄새 난다고 쓰러지기까지 했고. 알밥에도... 무 있었고.”
“그래.”
“오늘 한선유씨 무 앞에서 그렇게 서 있는 걸 보고서야 알았어요. 경황이 없어서 그 때는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여태껏 모른 제가 둔감했던 거죠.”
소민의 말에 선유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그런 선유에게 소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뭐가?”
“촬영장에서 무 있었잖아요. 저번처럼 막 쓰러질 것 같고 그러지 않아요? 횟집에서는 옷에 닿은 것도 아니고 그랬는데도 막 힘들어했잖아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맥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 땐... 그럴 만 했어.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가 겹쳤으니까.”
“두 가지...요?”
“아니지. 밤에까지 하면 세 가지인가.”
선유의 말에 소민이 궁금한 표정을 짓다 이내 입을 꼭 다물었다. 그 모습이 유치원 아이가 궁금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앞에 두고 참는 것 같은 태도같았다. 한참동안 입술을 앙 다물고 있던 소민이 콧김을 내뿜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못 참겠다. 무를 보면 왜 그러는 거예요?”
아이들처럼 인내심은 오래가지 않았고 소민의 질문에는 악의 없는 순수한 궁금증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말 못 해.”
“왜요?”
“캐스팅디렉터잖아. 캐스팅하는데 이런 게 마이너스 요인이 될 지도 모르는데 얘기하겠어?”
농담처럼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얼굴을 소민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 믿는구나.”
“뭐?”
선유의 질문에도 소민은 그저 선유를 바라봤다.
“저 오늘은 가볼게요.”
“말 안 해줘서 그래?”
“역시...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죠? 걱정하지 말아요. 한선유씨 비밀 안 알려줬다고 삐지거나 하지는 않으니까요. 며칠 내로 계약서 갖고 올게요. 그 때까지 약속한대로 진지하게 고려해봐요.”
그 말을 끝으로 소민은 휭하니 선유를 남겨두고 가버렸다.
*
소민의 덕분에 컨셉이 모두 바뀌어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라는 컨셉으로 선유는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김준영.”
“네? 형님?”
오늘은 피부 관리를 받으러 나가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전엔 안 된다고 하는 선유 탓에 준영이 오후에 바로 나가기 위해 그의 집에 와 있는 참이었다.
“내 친구의 친구가 어떤 여자랑 가까이 있으면 심장이 빨리 뛴다는데 이게 왜 이러는 거냐?”
“당연히 좋아하는 거죠.”
“아니야. 그 여자가 그 친구의 친구를 꽤나 귀찮게 하고 그 친구의 친구 입장에서는 짜증나게도 하고 그랬다는데 좋아할 리는 없잖아.”
“원래 미운정이 고운정보다 무서운 거죠. 왜 부부들도 미운 정으로 평생 산다잖아요. 그리고 자꾸자꾸 마주치면 당연히 정이 들죠.”
“그 여자를 만날 때마다 사건 사고를 겪었대. 그래서 그 여자를 보면 그냥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뭐 그런 거 아닐까?”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근데 또 사고가 나다가도 그 여자가 도와주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경우는 또 다르냐?”
“다를 수도 있죠. 근데 그건 왜요?”
“어? 아니. 걔가 물어봐서.”
“누군데요?”
“있어. 아는 애.”
“참 사람도 없나보다. 형님한테 물어보고. 순 연애바보인데.”
“대외적으론 카사노바잖아.”
“하긴... 근데 보통은 어떤 여자랑 가까이 있는데 심장이 빨리 뛰고 그러면 거의 백프로 좋아하는 거예요.”
자신의 말에 순식간에 얼굴빛이 흙빛이 되어 딱딱하게 굳는 선유의 모습에 준영이 선유 몰래 낄낄 웃어댔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원래 연애상담이란 남의 얘기라면서 하는 법이 아니던가. 거기다 저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선유의 표정으로 미뤄봤을 때는 거의 확정적이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해서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거실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시계를 족히 수십 차례는 쳐다봤다.
저 증상이 발현된 때가 엊그제 잡지 인터뷰 이후니까 누구 때문에 저러는 것인지도 짐작이 됐다. 임지유 때문에 고민하는 것보다는 훨씬 건설적이었다. 꽤나 이질적인 조합이었지만 꽤 잘 어울리기도 했다..
흥미진진한 상황이 어떻게 끝날까 준영도 궁금해 하는데 선유가 그를 흘깃 보더니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왜 그래요? 형님?”
“근데 넌 여기 왜 있는 거냐?”
“왜냐니요? 아까 샵에 모셔다 드리려고 왔는데 오전에 안 가신다고 해서 오후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잖아요.”
“그랬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선유가 핸드폰을 한 번 더 흘깃 쳐다보더니 이내 준영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야. 김준영. 나가서 너 뭐 좀 사와.”
“네? 뭐요?”
뭘 사오라는 건지 얘기도 없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뭐든. 아무거나 사오라고.”
의아하던 뇌가 사고를 시작하고 준영은 선유가 뭘 하려는지 이해가 됐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하하! 알겠어요. 뭘 사야 할지 생각날 때까지 쇼핑하고 올게요.”
앞 뒤 생각 없이 자신을 내모는 선유의 태도에 자꾸만 웃음이 터졌지만 선유는 그마저도 눈에 안 들어오는지 그저 준영이 나가는 것만 기다렸다.
준영에게 아무거나 사오라며 내쫓다시피 한 선유는 거실을 서성였다.
준영의 예상대로 선유가 말한 친구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상하게도 소민만 보면, 소민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하면 심장이 널을 뛰는 통에 꽤나 곤혹스러웠다. 특히 얼마 전 소민의 품에 안겨 울고 난 이후로 더 심각해졌다.
이제는 소민이 안 보이면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걸 준영은 거의 백프로라 하며 단정 지었다. 그가 그 사고뭉치 여자를 좋아하는 거라고.
“내가? 말이 돼? 그 여자가 괴롭힌 게 얼만데. 그래, 사고를 쳤지. 그랬지만 도와주기도 했고, 아무튼.”
이랬지만 저랬지만 해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문구는 하나였다. 다른 결론을 내려 해도 자꾸만 맴도는 단어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어 열을 식히던 선유의 눈에 시계가 들어왔다. 어느덧 시계 바늘은 11시를 넘어 12시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아니, 며칠 내로 계약서 갖다 준다더니 왜 오지를 않아.”
한참이나 시계를 노려보며 핸드폰을 바라보던 그가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아까부터 고민했던 일을 실천하기 위해.
*
지유는 테이블에 앉아 그 날 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선유에게 이별을 고했던 그 밤. 아니, 그녀에게서 그를 떨어뜨리던 그 밤을. 지유는 그 정도면 그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했던 말이었다.
“네 비밀을 아는 사람이... 다들 비밀을 지켜줬다고 했지?”
싸늘한 눈빛이 선유를 향했다.
“나도 네 비밀 지켜줄게. 대신 나 그만 놔 줘.”
“뭐?”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네 비밀을 지켜주고 넌 나를 놔주고. 나 네 뒤치다꺼리 하는 거 이제 지겹거든. 나를 크게 만들어준다는 데가 있으니까 나도 가서 커 볼거야. 너보다 더 크게.”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거야 너 듣기 좋으라고 했던 소리지. 나는 네 옆에 붙어 있으면 이 정도 외모인 나를 너나 너네 회사에서 제대로 키워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건데...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더라고.”
그녀의 말에 선유는 꽤나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하기야 몇 년간 그를 좋아한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말했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얼마 전에야 선유의 입에서 나도 전부터 네가 좋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불과 얼마 후, 이런 말을 듣게 되니 황당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녀가 할 말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너도 다를 바 없겠더라고.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 여자랑.”
“뭐?”
“생각해 봐. 너는 네가 그토록 아끼던 사람이 죽을 때 뭘 하고 있었어?”
“나는... 그 ㄸ...”
“사실은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 욕심이 더 커서 그 죽음을 방조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야. 난 정말로...”
선유가 말할 기회를 주어선 안됐다. 선유가 자신의 행동을 체계적으로 정당화 한다면 그녀의 논리는 한 순간에 무너질 게 뻔했으므로.
“돈에 대해 미친 집착을 한 그 여자나, 초월한 척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바라는 네 집착이 뭐가 달라? 사랑했다고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사라지길 바랐던 거 아니야? 너도 관심을 받고 싶은데 못 받게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부정하지 마. 그게 너야. 욕심 많고 관심이나 바라는 나쁜 애.”
소리를 높여 부정하는 선유에게 마지막 쐐기까지 박았었다. 그랬는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는데 안 무너지니까. 무너지길 바랐는데 몇 년이 지나도 멀쩡하게 아니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까 욕심나잖아.”
지유가 그렇게 말하며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의 앞에는 소민에 관한 정보가 담긴 종이가 놓여 있었다.
“안 좋아.”
선유의 옆에 붙어있는 소민을 떼어 내지 않으면 자신의 계획이 몹시도 꼬일 것 같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떨어뜨려야지.”
지유가 또 다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
선유는 통화연결음을 들으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통화연결음이 왜 이리도 길게 느껴지는지.
-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유가 황급히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며 말했다.
- 네. 말씀하세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용건을 말하라 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 음... 우리 스토커님 지금 어디 계신가?”
되는 대로 떠들고 난 선유는 본인의 입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궁금한 내용이긴 했지만 절대 저렇게 물으려던 건 아니었다.
- 왜요?
아니나 다를까 어처구니 없다는 목소리로 소민이 그렇게 되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