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좋아하는 건데?
44.
선유는 이제 휘청거리려 하는 다리를 억지로 억지로 견뎌내는 중이었다. 부들거리는 손이 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찰나였다.
“지금 우리 한배우더러 이 못생긴 무 썰라고 하시는 건가요?”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스튜디오 내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동시에 한 인영이 선유의 앞에 있는 조리대까지 순식간에 달려오더니 그의 앞에 무를 낚아채서는 몸을 돌렸다.
선유의 시선에는 더 이상 무가 보이질 않았다. 대신에 조리대 앞에서 막아선 그 여자, 소민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아니. 대한민국 최고로 섹시한 배우를 데려다 놓고 지금 무나 썰라고 하는 거냐구요.”
“아니... 당신이 뭔데.”
“저요?”
그렇게 반문한 소민이 등 뒤에 선유의 시선을 의식하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한선유씨 소속사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혹시나 선유가 그녀의 말에 이의라도 제기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의외로 선유는 잠잠했다.
잠잠한 그의 반응에 지난 번 영화촬영 때처럼 혹시 쓰러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다가 그랬다면 스텝이 먼저 난리가 났을 거란 생각에 다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우리 한배우가 뭘 썰어도 그림이 나오긴 하겠지만 이왕이면 좀 더 그럴싸하고 색감도 좋은 그래! 파프리카나 빨간 피망! 얼마나 좋아요. 안 그래요? 무가 뭡니까? 무가?”
“아니.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하는 컨셉인데.”
한 스텝의 말에 소민은 순간적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폈다.
“지금 이 잘난 남자가 칼 뽑으면 무나 썰게 생겼나요?온 동네방네 여심이란 여심은 다 썰고 다니는데 독자들이 그 말에 동감할까요? 저는 저~언혀 동감이 안 되는데요?”
소민의 말에 스텝들도 뭔가 컨셉의 오류가 있나 싶어 수근대기 시작했다. 특히 여자 스텝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 스텝들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아무튼 이 되먹지 못한 무는 제가 갖고 가도 되겠죠? 아니 무가 말이 돼요? 이렇게 한배우한테 무 들이대시면 앞으로는 저희 한배우 기사, 다른 잡지 통해서만 하시게 될지도 몰라요?”
“아니. 그러려던 게 아니고.”
스텝의 말에 소민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잘랐다.
“물론 그러시겠죠. 저도 알아요. 그러니 이 상황의 원흉은 이 무네요! 이 원흉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한 소민이 무를 품에 꽁꽁 동여매 안고는 사라졌고, 선유는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등지고 멀어져 가는 소민의 모습을 바라봤다.
무를 들고 내려와 차에 탄 소민은 무릎 위에 무를 두고는 핸들에 고개를 파묻었다.
“으악!! 창피해. 어떻게 해. 한선유가 이제 나를 완전 자기 빠순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나온 대사들이 하나같이 주옥같기 이를 데 없는 게 한선유교 열성신도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 뭐! 그 남자가 뭘 썰어도 그림이 되는 거 맞고! 온 동네방네 여심을 썰고 다니는 것도 맞지!! 맞는데!!! 그게 왜 뇌도 거치지 않고 그렇게 술술 나온 건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선유에 대해 그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니 그녀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 이건 그래! 캐스팅 대상이니까!! 이것도 서비ㅅ”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똑똑’
그녀의 차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뭐예ㅇ”
창 밖에 선 사람을 본 순간 미처 모든 단어가 나오기도 전에 단어들이 저절로 스러졌다.
*
선유는 자신의 앞을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자신이 두드리는 소리에 창문을 바라본 소민은 뻣뻣하니 몸이 굳는가 싶더니 이내 무릎에 놓여 있던 허연 것, 아마도 무로 추정이 되는 것을 뒷 좌석으로 던진 뒤, 차에 있던 담요로 대충 덮어 가렸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됐는지 차에서 내리더니 척척 앞으로 걸어갔다.
소민은 자신의 팔 다리가 같은 방향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서로 다르게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자 이내 포기해버렸다.
“어디까지 갈 거야?”
어느새 벤치에 앉은 그가 여전히 같은 팔 같은 다리의 반동을 반복하려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묻고 있었고, 선유의 말에 소민은 슬며시 벤치 근처로 돌아가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는 앉았다.
“아까는...”
“뭐요!”
“당신...”
“그래요! 미안해요! 내가 좀 주제넘었다는 건 인정하는데요. 저번 일도 있고, 연락도 없고 걱정이 돼서 와봤는데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얼결에 입이!”
선유는 뭐라 한마디 하려 입을 열자마자 사과와 변명을 늘어놓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뭐라고 하려고 부른 거 아니야.”
그의 말과 일치하게 평상시와는 다르게 몹시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리고 그의 손에 행방에 말이 저절로 더듬어졌다.
“그, 그래요? 아! 어떻게 나왔어요? 아직 촬영 남은 거 아니에요? 아, 맞다. 이제 괜찮아요?”
쉴 새 없이 질문이 터져 나왔고, 그런 그녀의 질문에 선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 쪽 덕분에 컨셉 수정 들어가서 스텝들이 분주하거든. 그 사이에 나온 거야. 혹시나 갔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렇게 말하던 선유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눈 앞에서 모든 여자를 홀린다는 그 미소를 봐서인지 아니면 아직 채 놓지 못한 그의 손의 무게가 무거워서인지 소민은 발밑이 아득해지는 듯 한 기분이었다.
“아직 안 가서 다행이군.”
“왜, 왜요?”
그 말에 선유가 큼큼 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
“그?”
“아니. ㄱ...고...”
“고?”
자꾸만 따라하는 소민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선유가 헛기침과 함께 순식간에 뱉어낸 글자에 소민은 멍해졌다.
“크흠!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가버렸으면 어쩌나 했어.”
오만하기 이를 데 없고, 고맙다고 치자던 남자가 자신 앞에서 고맙다고 하는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그녀를 그가 응시하고 있었다. 무릎 위에 주먹을 꾹 말아 쥔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도 고마워요.”
“뭐가?”
“그 날... 나 대신 그래서 무도 보고 손도 다치고 그랬잖아요.”
꽤나 마음에 걸렸는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향해 선유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비긴 셈 치지.”
선유의 미소에 소민이 헛기침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왜 갑자기 저렇게 근사하게 웃는지는 알 수 없어도 어지간히도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오늘도 이유없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소민이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캐스팅 때문에 만나는 건데 만날 때마다 제대로 얘기를 못했네요.”
“고려해보도록 하지.”
“고려하긴 뭘 고려해요. 좋은 작품인데.”
“그걸 판단하는 건 내 기준이잖아.”
“내 기준엔 좋은 작품이거든요?”
“그럼 당신 기준에 내가 잘난 남자인가?”
“푸케헥!”
허를 찌르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사래가 들리자 의외로 한선유가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쳐주는 것이었다.
“돼, 됐어요. 누구 때문에 지금 사래가 들렸는데.”
“생각이 들통 나면 사래 들리는 타입인 건가?”
“거짓말을 들키면 사래 들리는 타입이요.”
“흠...”
그렇게 말한 선유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손을 뗐다. 왠지 모를 허전함에 소민이 고개를 드는데 이내 그 손이 다시 그녀의 눈 앞에 내밀어졌다.
“반갑습니다.”
뜬금없는 그의 태도와 느닷없는 존대에 소민이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자 선유가 피식 웃고는 그녀의 미간을 긴 손가락으로 한 번 꾹 누르더니 말했다.
“고려해보겠다고 했잖아. 여태까지는 제대로 얘기를 못했었으니까 오늘 만나서 고려하기 시작한 걸로 하지.”
그렇게 말한 그가 그녀를 향해 내민 손을 슬쩍 흔들면 말했다.
“배우 한선유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소민의 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내 선유가 내민 손을 마주잡은 소민이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 배우님.”
그렇게 말하던 소민이 멈칫했다.
“아, 계약서.”
선유의 상태를 슬쩍 확인만 하려던 거라 계약서를 안 가져온 것이었다.
“서두를 것 없어. 고려해보겠다고 했지 하겠다고 한 건 아니니까.”
그녀의 말에 그가 그렇게 말하자 소민이 그를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진지하게 고려해야 해요. 나중에 또 딴소리 하면!”
“내가 자기소개를 한다는 건 진지하게 대하겠단 소리야. 그리고 도망 안가겠다는 약속도 지키고 있잖아.”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를 옆에 두고 그가 바닥을 보며 물었다.
“계약... 하고 싶어?”
“당연한 소리 아니에요?”
“왜?”
“아니, 캐스팅디렉터한테 왜가 어디 있어요?”
“그냥 밥벌이라 나를 캐스팅 하고 싶다 이건가?”
“그게 아니라요. 캐스팅디렉터는 그 배역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을 캐스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물론 한선유씨의 경우는 제작사에서 먼저 원하기도 했지만 저도 한선유씨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소민이 건넨 시놉시스를 꼼꼼히 읽지는 않았지만 시놉시스 속 주인공인 남자는 꽤나 잘난 남자였고,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부족한 게 없는 남자였다. 그런 극중 주연이 자신과 어울린단 말에 선유는 공감할 수 없었다.
“배우란 게 원래 자신이 아닌 사람을 연기하는 거니까 문제는 없겠지만 내가 왜 이 역할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지?”
일순간 가라앉은 눈빛을 한 선유가 그렇게 묻자 소민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물었다.
“한선유씨 잘난 남자니까요.”
“뭐?”
소민의 말에 선유가 멍하니 그렇게 되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대한민국 여자들이 한 번쯤 만나보고 싶어 하는 남자잖아요. 한선유씨. 예능계에 유느님이 있다면 정극계에는 한느님?”
그렇게 말하며 킥킥거리며 웃는 소민을 선유가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다 물었다.
“그 말... 당신한테도 해당되는 말인가?”
“뭐가요?”
“여자들이 한 번쯤 만나보고 싶어 하는 남자라는 말.”
선유의 말에 킥킥거리며 웃던 소민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비, 비웃기 없기예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동의의 표시를 의미하는 그 행동에 소민이 눈을 질끈 감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비, 비웃지 말라니까요?”
“안 비웃었는데?”
선유의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그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본 게 분명했다.
“그럼 그 표정은 뭔데요!”
“좋아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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