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괜찮아요?
41.
선유는 자신의 집으로 오겠다는 소민의 말에 집 앞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이 여자가 대체 왜 오겠다는 거야? 김제운이한테 갈 때는 언제고.”
순순히 집주소까지 알려줘 놓고는 그렇게 툴툴거리며 중얼거리는 게 웃기긴 했지만 왔다 갔다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말과는 상반된 왠지 모를 기분좋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 밤에 잠은 안 자고 굳이 오겠다 그래?”
가끔가다 말짱한 얼굴로 사람 속을 긁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다수의 경우 소민과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했다.
그건 소민이 그의 비밀을 집요하게 묻지도, 혹은 그가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하는 소문을 퍼뜨리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그에게 다가왔던 여자가 누구인지 왜 그렇게 쓰러진 건지 묻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곤란할까봐 안 묻는 건지.”
선유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한선유씨!”
뒤에서 소민이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
“놀랐어요?”
선유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소민이 그렇게 물었다.
“그래. 놀라지 안 놀라? 이 야밤에 뒤에서 그렇게 소리를 내는데?”
“남자가 뭘 그 정도로 놀라고 그래요?”
“남자는 뭐 놀라지도 말란 법 있어?”
그렇게 말한 선유가 소민을 보며 새삼스레 물었다.
“근데... 어쩐 일이야? 김제운이는 어쩌고?”
“만나서 일 얘기하고 헤어졌죠.”
“잘했네. 너무 늦게까지 다니면 안 돼. 위험하잖아. 일찍일찍 집에 가.”
“아... 그래요? 그럼 어떡하지?”
소민이 그렇게 말하더니 선유의 앞에 뭔가를 슥 올려보였다.
“한선유씨 저녁 안 먹었잖아요. 약은 먹어야 하고 간단하게 요기할 거 사왔는데. 소화 잘 될 만한 걸로. 2인분이나 사왔는데 한선유씨는 일찍 들어가야 하니까 이거 같이 못 먹겠죠?”
소민의 깜찍한 발언에 선유가 기가 찬 웃음을 지었다.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안녕히 계세요. 한선유씨.”
새침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선 소민의 뒷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은 선유가 소민에게 말했다.
“들어와.”
“어머? 일찍 가야 한다면서요?”
“이미 밤은 늦었고, 같이 먹으려고 사온 거 아니야? 들어와. 먹고 데려다 줄 테니까.”
선유의 말에 돌아선 소민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선유의 뒤를 따라 그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 때였다.
“선유야!”
오늘 하루는 끝나지 않았고, 유난히 긴 하루였다. 그리고 그 하루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런 하루는 쉽게 끝나지 않는 법이니까. 그리고 안 좋은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는 말이 맞는 말이었다.
갑작스레 그를 찾는 여자 목소리에 선유가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의 입술이 열렸다.
“임...지유......”
무겁게 움직이는 그 입술 사이에서 여자의 이름이 흘러 나왔고 그의 입술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소민이 그의 입술을 타고 나온, 지금 톱을 달리는 여배우의 이름에 정말 그가 부른 사람이 그 여자가 맞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여자의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만큼이나 놀랍게도 그 여자가 서 있었다. 모든 이가 좋아한다는 그 여자가.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네? 잘 지냈어?”
생긋 웃는 미소와 함께 지유가 인사를 건넸고, 선유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두 눈이 아까 음식점에서처럼 불안정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옆에는 누구셔? 혹시 새로운 계약?”
지유의 말에 소민이 이미 아까 지유를 돌아본 순간부터 힘을 잃고 떨어져 있던 선유의 손에 시선을 두었다. 미세하게 경련이 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선유에게 지금 이 순간이, 이 시간이 얼마나 힘겨운 자리인지를 보여줬다. 아까만큼이나 혹은 아까보다도 더 힘겨워 보이는 선유의 모습에 소민은 선유가 왜 힘든지 이유도 모르면서 선유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떨리는 그 손가락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런 소민의 모습이 지유에게는 꽤나 불쾌한 모양이었다. 모든 이가 사랑한다는 그 얼굴이 일그러진 걸 보면. 일순 일그러졌던 얼굴을 한숨과 함께 날린 지유가 소민을 똑바로 바라봤다.
“괜찮으면 자리 좀 비켜줄래요?”
요청하는 듯 한 말이었지만 어조는 명령에 가까웠다. 당장비키라는 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떨고 있는 선유의 손을 놓고 가야 하는 건가 고민을 하는데 선유가 순식간에 휙 돌아섰다. 소민이 잡은 손을 힘주어 잡은 채로. 그 힘에 소민이 삽시간에 대문 안으로 딸려 들어왔고, 선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대문에서 1m는 멀어지고 나서야 선유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
그렇게 말한 선유가 소민을 이끌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선유와 소민이 들어서자 센서등이 들어왔다 이내 꺼졌다. 집에 들어온 선유의 손이 소민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선유는 뒤에 선 소민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집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그런 선유의 뒤를 소민이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이 분위기에 먹기는 글렀겠지?”
혼잣말을 하며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한 번 내려다 본 소민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에도 선유는 마치 혼자 있는 것처럼 힘없이 천천히 쇼파로 다가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선유를 한 번 바라본 소민이 선유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소민의 말에 선유의 시선이 서 있는 그녀에게 향했다. 그리고 소민은 선유의 눈빛에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은 건지 이따금씩 보이는 그의 눈빛은 보이는 것마다 너무나 참혹한 아픔을 담고 있어서 소민은 가슴이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뭐가.”
그렇게 말하는 선유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소민이 망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소, 손이요! 아까 돌솥 쳐냈잖아요. 아플 것 같아서 아까 다른 약 사면서 파스랑 그런 것도 같이 샀는데 안 붙였죠?”
그렇게 말한 소민이 쇼파에 있는 약국 봉지에서 파스를 꺼냈다. 파스를 꺼내들고는 자신에게 오는 소민을 선유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선유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선유에게 다가선 소민이 파스를 신중하게 조심조심 선유의 손에 붙였다. 까진 것도 아닌데 입으로 바람까지 호호 불면서.
그렇게 조심스럽게 파스를 붙인 던 소민이 이내 무슨 생각인지 선유의 손등에 조심스레 붙이던 파스를 꽉꽉 눌러 붙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욱신거리던 참인데 그렇게 눌러대니 악소리가 절로 날 지경이었다.
“아! 뭐하는 거야?!”
“아프죠?”
“당연한 거 아니야? 미쳤어?”
“얼마나 아파요?”
“악소리 나게 아파!!”
선유의 말에 소민이 손에 더 힘을 줬다. 조금만 더 있으면 주먹으로 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아직 멀었네. 지금은 어때요?”
“아프다니까!!”
선유의 말에 소민이 그의 손을 보며 말했다.
“많이 아프면, 아파서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 내가 다독다독 해줄게요.”
예상치 못한 소민의 말에 선유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을 더 볼 수가 없어서 소민은 선유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는 그의 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어디 가서 한선유씨 울었다고도 안 하고,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울었다고도 말 안해요. 그러니까... 아프면 울면 안돼요? 아니... 울어요. 내가 한선유씨 눈물 닦아 줄게요.”
소민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유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선유는 소민의 가슴에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눈물의 흔적을 묻었다. 그런 선유의 등을 소민은 그저 말없이 등을 다독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물을 잔뜩 쏟아 낸 선유가 소민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상처가 가득한 눈이긴 했지만 그 눈에는 소민이 담겨 있었다.
“왜... 아무 것도 안 물어?”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을 만큼 한선유씨가 아프다, 아프다, 울고 싶다, 울고 싶다. 하고 얘기 했으니까요. 그냥 그거만 알면 돼요.”
“내가 불쌍해? 동정하는 거면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아프게 웃어보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하니까 그런 거예요. 나도 그랬거든요.”
아직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까지 자신의 손으로 닦아낸 소민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제... 다 울었어요?”
“뭐... 대충.”
여자 앞에서 울었단 사실이 새삼스레 부끄러워졌는지 귓가가 빨개진 선유가 소민과 시선을 맞추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럼... 나 이제 가볼게요. 한선유씨 말대로 늦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소민이 선유가 붙잡을 새도 없이 그의 집을 빠져 나갔다.
선유의 집을 빠져나온 소민은 대문을 나오자마자 이제는 저리다 못해 조금만 더 있으면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벽에 기댔다. 남자가 우는 걸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는 사람까지 마음이 아플만큼 소리도 못 내고 우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 거야, 이건. 너무 슬퍼보여서.”
혼자 중얼거리며 저린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데 목소리 하나가 그녀를 불렀다.
“저랑... 잠깐 얘기 좀 하죠?”
선유가 또 다른 아픈 눈빛을 하게 만든 여자, 임지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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