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40화 (40/105)

40. 그 때는 몰랐는데

40.

“그럼 같이 나갈까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그 말에 소민이 손사레를 쳤다.

“아니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가다가 또 어디 좀 들르려구요.”

“그럼 들르려고 하는 데까지 태워다 줄게요.”

“정말 괜찮아요. 혼자 가도 돼요.”

소민의 말에 제운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그럼. 대신 저녁은 제가 사는 걸로 할게요. 그건 괜찮죠? 이렇게 가면 제가 억지로 만나자고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거든요.”

“억지로는요. 일인데 당연히 나와야죠. 제운씨가 적극적으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죠. 당연히 식사도 제가 대접해야 하는게 맞구요.”

소민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짓던 제운이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하게 해줘요. 안 그럼... 저 출연하겠다고 한 거 재고할겁니다?”

반 협박처럼 농담처럼 말하는 제운의 말에 소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덕분에 잘 먹었어요. 제운씨.”

소민의 말에 웃는 제운을 보던 소민이 불현듯 말했다.

“아! 이건 제가 살게요.”

그렇게 말하며 소민이 쇼핑백을 들어보였다.

“왜요? 그냥 같이 계산해도 되는데요. 어차피 집에 가서 소민씨가 먹을 거잖아요.”

“아니요. 그냥 이건 제가 사고 싶어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에 제운이 물러났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갈까요?”

기어이 스프와 샐러드 2인분을 결제한 소민이 제운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오늘 고마웠어요. 제운씨. 쉬고 싶으실텐데 시간 내주셔서요.”

“뭐, 저 좋으려고 한 건데요. 정말 안 데려다 줘도 괜찮아요?”

“제 걱정 말고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소민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뒤돌아 걸어가던 소민은 제운과 거리가 멀어지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장된 이름을 누르려는 소민의 손이 잠시 망설였다.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면 괜히 과잉친절 베풀지 마.’

“대체 무슨 뜻이야? 과잉친절? 세상에 과잉친절이 어디 있어.”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스프와 샐러드로 향했다.

“이, 이건. 그러니까 이건! 아까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못 먹었으니까.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 것 뿐이야. 그리고 빈속에 약 먹으면 안되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고민이 해결된 듯 저장된 이름을 눌렀다.

“여보세요? 한선유씨. 지금 어디에요?”

*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제운은 소민을 떠올렸다. 소민을 처음 만나고 그의 많은 것은 바뀌어 있었다.

다른 수많은 연극영화과의 학생들처럼 그도 막연히 연예계를, 영화와 연극계를 동경하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제운아. 오디션 한 번 참가해보지 않겠니? 선생님, 지인 중에 감독이 있거든 이번에 작품을 하는데 뉴페이스를 찾는 모양이라고 연락이 왔다. 오디션을 보긴 해야 하지만 네 연기력이면 가능도 할 것 같은데.”

교수의 말에 보게 된 오디션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소민을 만나게 되었다.

전 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 터라 오디션 당일에 오디션장에 도착을 하긴 했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미리 나누어 준 대본을 숙지하라고 주어진 대기 시간에 대본을 읽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존 제운은 자신의 앞 번호 순서에서야 겨우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미리 나누어 준 대본을 완벽하게 숙지해도 붙을까 말까 하는 자리인데 겨우 속독으로 읽은 것이라 완벽히 대본을 숙지하지 못했으니 그는 당연히 탈락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어긋나지 않을 것만 같아 보였었다. 그가 오디션장에 들어가 버벅거리기 시작하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못마땅한 기색을 얼굴에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대본, 못 외웠습니까?”

“미리 나눠준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방에서 그에게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고 우리를 우습게 아는 것 아니냐고 그를 압박할 때였다.

“감독님. 저도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사근사근한 말소리가 냉랭한 분위기 사이로 날아들자 장내는 순식간에 따사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소민씨. 소민씨도 위원 자격으로 앉아 있는데 말 못할 게 뭐가 있어. 해봐요.”

가운데 앉은 누가 봐도 이 오디션장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음이 분명한 사람의 말에 모두가 그렇게 말한 사람, 소민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건 제운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날 그는 소민에게 첫 눈에 반할 수 밖에 없었다.

까만 티셔츠에 청바지. 마치 스티브잡스를 연상시킬만한 차림일 수 있는 그 옷차림이 그녀에게는 승무원의 유니폼인양 잘 어울렸다. 그리고 질끈 묶은 머리를 한 그녀가 제운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피곤하죠? 대학생이라고 소개서에 돼 있는데.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해요?”

“아, 네. 어젯밤에도...”

제운의 말에 소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대본 봤어요?”

“네. 잠깐. 보긴 봤습니다.”

“대본 보니까 무슨 느낌이 들어요? 극 중에 나오는 민기가 어떤 남자 같아요?”

“민기는... 외롭고 따뜻한 사람같은 느낌이 들던데요.”

제운의 말에 가운데 앉은 사람조차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냈고 소민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물었다.

“왜요?”

“민기는 여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떠나겠다는 순간에 그녀를 붙잡는 대신에 그저 미소와 포옹으로 여자를 보내죠.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보낼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리고는 여자가 떠나간 자리에 홀로 앉아 있잖아요. 여자가 떠나갔으니 외로울 텐데 그는 어떤 표정도 없이 담담히 남은 커피를 마시고 홀로 자리를 떠나죠. 이미 외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남겨진 외로움을 참을 수 없을텐데 그는 담담합니다. 그래서 민기가 따뜻하지만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운씨는 그런 경험이 있나요?”

“없습니다.”

“하긴 제운씨 외모면 여자가 떠나다가도 돌아오긴 하겠네요.”

소민의 농담에 오디션장에는 아까의 냉기가 사라지고 금세 따스한 바람과 웃음이 넘쳤다. 대본을 못 외운 그이지만 짧은 순간에 민기를 파악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진 덕이기도 했지만 소민이 만든 분위기이기도 했다. 소민이 사람들의 웃음이 가라앉자 조금 날카롭지만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제운씨는 그런 경험이 없다고 했는데 민기를 연기할 수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제운의 말에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고 소민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확신하세요?”

“사람은 누구나 따뜻하기도 하고, 누구나 때론 외롭기 마련이니까요.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그건 누구나 어느 순간 한 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거니까요. 저는 그 순간의 감정을 증폭해보일 수 있습니다.”

제운의 말에 소민이 싱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모습에 제운은 또 한 번 설레었었다. 이번엔 소민의 외모가 아닌 그녀가 만든 이 분위기와 이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그녀의 능력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던지는 몇 가지 질문에 더 답변을 하고 돌아왔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더 노력해서 언젠가 그 세계에 있는 소민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빠르게 그 세계에 초대가 된 셈이었다. 오디션 합격 통보로 제운은 소민이 속해 있는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몰랐는데. 내가 2년 내내 소민씨를 지켜보고 웃는 모습 볼 때마다 심장이 쿵쿵 떨어질 줄은.”

제운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이내 자신과 식당에 앉아 그렇게 그녀가 좋아하는 일 얘기를 하면서도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는 소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얼굴도 여전히 설레긴 했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이유는 싫었다. 그럼에도 그 얼굴을 나에게만 보여 달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은 그에게 없어 쓴 웃음만이 날 뿐이었다.

“그렇게 곤란한 얼굴을 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제운의 씁쓸한 눈빛이 가로등 불빛이 늘어선 밤 거리를 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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