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놓치지 않을 거예요
39.
선유의 말에 소민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똑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민이 고개를 돌리자 제운이 보도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민이 유리창을 내리자 제운이 싱그럽게 웃었다. 촬영을 마치고 왔다고 하기에 어려울 만큼 밝은 얼굴이었다.
“아, 맞구나. 정말 소민씨네요.”
제운을 본 소민이 문을 열고 내려 제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제운씨!”
“불빛에 소민씨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맞나 확인하러 온건데. 역시 소민씨는 예뻐서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 본다니까요?”
“아, 저보다 멋진 분이 그런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민망하게...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방금 왔어요. 안에는...”
제운의 말에 소민이 살짝 비켜서며 말했다.
“아, 한선유씨요.”
소민의 말에 제운이 인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선유의 차가 스르르 앞으로 움직였고, 이내 속도를 높이더니 둘에게서 멀어졌다.
“또 몸이 안 좋아졌나...”
소민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제운이 말을 받았다.
“몸이라니요? 소민씨 어디 편찮으세요? 컨디션 별로인데 저 때문에 나오신 거예요?”
“저 말고 선유씨요.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걱정되네.”
“아... 한... 선유씨요?”
“네. 몸이 안 좋아서 밥 먹자고 간 자리에서 못 먹고 나왔거든요.”
그 말을 하는 소민의 시선이 이미 떠나고 없는 선유의 차를 추적이라도 하듯 도로 위를 내달렸다. 그런 소민을 본 제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음... 그랬구나. 그럼 소민씨도 저녁 못 먹었단 소리죠? 잘됐네요. 저도 아직 저녁 전인데. 같이 밥 먹어요.”
“네?”
소민을 향해 씨익 웃은 제운이 앞장서는데 소민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기... 제운씨. 알겠어요. 저녁 같이 먹을테니까 손목은 좀...”
“아, 미안해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목을 놓는 제운에게 소민이 슬쩍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갈까요?”
소민의 미소에 제운이 앞장섰고, 소민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진 선유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눈으로 좇다가 돌아섰다.
도어락이 잠금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선유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로 걸어온 손에 든 재킷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풀썩 주저앉았다. 성마른 손이 결 좋은 머리카락 사이를 거칠게 누볐고 고개를 숙인 그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루가 참... 더럽게 기네.”
오전에는 약속을 잡고 소민을 기다리느라 시간이 더디게 갔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한꺼번에 너무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 터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 기분이었다. 차라리 오늘 하루가 끝난 거라면, 내일로 날짜가 바뀌어 있다면 어제일이라 생각하며 다독이기라도 할텐데 시계바늘은 아직 오늘 있었던 일이라며 그에게 기억을 강요했다.
‘그래도 명색이 내가 네 엄만데.’
“명색만 내 엄마인 사람 따위 무슨 필요가 있다고.”
잊고 싶어도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에 그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손등을 지친 눈에 얹을 때였다.
“아!”
손등에 느껴지는 통증에 선유의 미간이 구겨졌다. 손등이 벌겋게 부어오른 게 보였다.
“하긴 손등으로 뜨거운 돌솥을 쳐내고도 멀쩡한 놈이면 내가 히어로지. 나 따위가 무슨 히어로야.”
쓴 웃음을 지은 선유의 손이 툭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바스락’
바스락 소리에 그의 시선이 그 소리를 낸 물체로 향했다. 그 물체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여자가 옆에 없는데도 소리를 내.”
그렇게 말한 선유의 시선 끝에는 아까 소민이 건넨 약봉지가 있었다.
‘아파 보일 때 바로 사오고 싶었는데 혼자두기 그래서 약국 못 갔거든요. 보니까 몸도 안 좋은 것 같아서 여러 개 샀어요. 이거는 아침 저녁으로 한 알, 이거는 공복에 한 알이래요. 그리고 우황청심환도 있으니까 집에 가면 이거 꼭 먹구요. 알았죠?’
‘비밀이 있어도 괜찮고, 말을 안 해도 상관은 없는데요. 아프지 마요. 걱정되니까.’
비닐봉지를 보고 있자니 소민이 아까 한 말이 옆에서 재잘재잘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의 우울한 기억을 날려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걱정을 왜 해. 아무한테나 그런 멘트 날리다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렇게 중얼중얼거리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뭐야, 이 여자. 자기 얘기하는 거 어떻게 알고 전화야.”
소민의 이름이 휴대폰 액정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
“음... 역시. 소민씨가 추천해 주는 작품은 다 좋은 것 같아요. 고마워요. 대표님이랑 얘기해서 계약서 작성할 일정 잡아볼게요.”
소민이 건네준 시놉시스를 읽은 제운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소민이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앞에 놓인 스프는 아까 그가 처음 먹으라고 권했을 때 먹은 한 숟가락 먹은 것을 제외하고는 더 줄지 않은 채였다. 그런 소민의 모습을 제운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말고 선유씨요.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걱정되네.’
그렇게 말하는 소민은 몰랐겠지만 그 두 눈 가득 진심어린 걱정이 가득했다. 보는 제운마저도 순간 한선유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안타깝게 만들 정도로 강한 걱정이. 그에게는 혹은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그렇게 걱정어린 눈빛을 보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제운은 불안했다.
“소민씨. 걱정 많이 되나보다. 나도 걱정되네... 소민씨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일까봐.”
“아! 제운씨, 뭐라고 하셨어요?”
낮게 중얼거리는 제운의 목소리에 창 밖을 응시하던 소민이 제운을 보며 그렇게 물었고, 그런 소민을 향해 제운이 웃어보였다.
“다 읽었다구요.”
“다 읽으셨어요? 어떤 것 같아요?”
“좋아해요. 대표님께 당장 보여드리고 싶을 정도로.”
“네?”
제운의 말에 소민이 되묻자 제운이 웃으며 말했다.
“좋다구요. 대표님께 보여드리고 계약일정 잡고 싶을만큼요.”
“아... 난 또. 제운씨가 저 좋다고 고백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단정하는 소민을 향해 제운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무튼 이 작품 보는 순간 제운씨 생각이 딱 나더라구요.”
“그래요? 제 생각 많이 했어요?”
“네?”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제운의 말과 행동에 소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요새 TV에 많이 나왔는데 혹시 봤으면 감상평 좀 해주셨으면 해서요.”
“아... ”
소민의 얼굴에 얼핏 안도하는 기색이 흐르다 이내 미안한 표정이 맴돌았다.
“근데... 제가 요새 TV 볼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운씨 나오는 거 못 봤는데... 어쩌죠?”
“괜찮아요. 바빴으면 어쩔 수 없죠. 뭐가 그렇게 바빴는데요?”
“아... 한선유씨 캐스팅을 아직 못해서 따라 다니느라구요.”
“아직... 못 했어요?”
“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하하하하하!”
소민이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운이 탁자에 팔을 괴며 물었다.
“저도... 따라 다녀 줄 거예요?”
“네?”
“저도... 캐스팅 못하면 따라 다녀줄 거예요?”
제운의 말에 소민이 픽 웃었다.
“제운씨. 농담도. 제운씨 착해서 어디 캐스팅 들어오면 막 거부하는 스타일도 아니잖아요.”
“저 그런 스타일 맞아요.”
“네?”
“소민씨가 캐스팅하니까 바로 하는 거예요. 다른 작품은 안 하는 것도 많은데요?”
오늘따라 묘한 제운의 말에 소민이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오는 작품 다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저 작품 엄청 많이 들어오거든요.”
피식 웃은 제운이 그렇게 말하자 소민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아... 오늘 제운씨 때문에 여러 번 놀라네요.”
“고맙게 생각해요. 소민씨한테는. 나한테 기회를 준 사람이 소민씨니까.”
“제운씨가 잘해서 그런 거죠. 기회가 주어져도 놓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게요. 제가 기회를 잘 잡는 타입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마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놓치지 말아요.”
제운의 말 뜻을 알 리 없는 소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고 제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대표님하고 일정 잡아서 연락해 주세요.”
“그럴게요. 소민씨 식사 안 하세요?”
그 말에 소민이 자신의 앞에 놓인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제운씨. 미안한데요, 제가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괜찮아요?”
“아. 네. 무슨 일 있어요?”
“아 별건 아니구요... 어! 여기요.”
제운의 말에 대답을 얼버무린 소민이 마침 옆을 지나가던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네. 도와드릴까요?”
“저 브로콜리 스프랑 그린 샐러드 좀 포장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웨이트리스가 앞에 놓인 걸 포장하려고 하자 소민이 만류했다.
“아니요. 새로 포장해주세요. 2인분 포장해주시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웨이트리스가 멀어지자 제운이 물었다.
“포장은... 왜요?”
“아... 맛있어서요. 집에 가서 먹으려구요.”
그 말에 제운이 소민의 앞에 놓인 그릇을 바라봤다. 한 숟가락 밖에 뜨지 않은, 그 마저도 거의 티나지 않는 그 그릇을.
“정말... 맛있었어요?”
“네.”
소민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 포장해가도 되잖아요.”
“제가 먹던 걸 어떻게 먹어요.”
“소민씨가 먹을 거라면서요.”
제운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던 소민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러니까... 동생도 갖다 주려구요.”
“아... 동생 있었구나.”
“네. 남동생이요.”
그렇게 둘러댄 소민이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웨이트리스가 소민의 요청대로 포장한 스프와 샐러드를 들고 왔다.
“감사합니다.”
소민이 웨이트리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제운을 바라봤다.
“어... 제운씨 식사 덜 하셨죠? 같이 있어드려야 하는데 제가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먼저 가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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