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프지 마요. 걱정되니까.
38.
다 죽어가는 목소리이지만 그 속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묻어 있어서 소민의 행동을 제지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선유를 복잡한 표정으로 보던 소민이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선유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잠깐만 있어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다시 식당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이내 물을 한 컵 가지고 나왔다.
“물이라도 좀 마셔요.”
소민이 가져온 물을 받아 마신 선유가 겨우 진정이 된 듯 보일 때까지 소민은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초점을 잃었던 선유의 시선이 돌아오자 그 시선의 끝에 정면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얼굴 가득 걱정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는 소민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뭐해.”
“이제 괜찮아요?”
선유의 목소리에 소민이 냉큼 그를 향해 몸을 틀고는 물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평소보다는 아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선유의 혈색에 소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놀랐잖아요. 눈만 뜨고 있지 딱 기절한 것 같은 얼굴로 있어서.”
“평상시보다 조금 심하긴 했어도 괜찮아. 안 죽어.”
“평상시라니... 이러는 일이 자주 있단 소리예요? 그러고 보니 지난 번 촬영장이랑 지금이랑 비슷하네요? 그나마 그 때는 정신을 금방 차리더니. 왜 그러는... 건데요?”
“묻지 마.”
“이것도 묻지 마, 저것도 묻지 마. 다 묻지 말래.”
그의 말에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보던 선유가 주변에 깔린 어둠에 인상을 찌푸렸다.
“몇 시야?”
“지금이... 음... 8시네요.”
손목시계를 본 소민이 담담하니 그렇게 말했다.
“김제운 만나러 왜 안 갔어.”
“제운씨한테는 한선유씨가 넋 나간 사이에 문자했어요. 오늘 약속 미루자고. 그렇게 아파보이는 상태로 넋이 나가 있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그냥 가요. 가더라도 내가 여기서 마음이 못 떠나서 집중 못해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밥 먹을래?”
“됐어요. 한선유씨 아직 아파 보이는데 밥은 무슨 밥이에요. 밥생각도 없어졌어요.”
“그럼 가지. 데려다 줄게.”
그렇게 말한 선유가 몸을 일으키더니 차에 탔다. 선유의 상태가 정말 괜찮은 것인지 병원에 안 가도 되는 것인지 소민이 망설이며 서있는데 창문이 내려갔다.
“안 타?”
“운전... 할 수 있겠어요?”
“사고 안 내고 무사히 모셔다 드릴 테니까 타.”
선유가 짐짓 가볍게 농담인 듯 그렇게 말할 때 소민의 전화가 울렸다.
“잠깐만요.”
그 말을 한 소민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네. 제운씨.”
- 소민씨. 무슨 일 있어요?
“네?”
- 문자 봤어요. 무슨 일 있나 걱정돼서요.
“아, 아니에요.”
- 저도 생각보다는 좀 늦게 끝났거든요. 소민씨 기다리면 어쩌나 했는데. 일은 끝났어요? 괜찮으면 지금 볼까요?
“아... 그게...”
그렇게 말한 소민이 흘깃 선유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아. 어차피 김제운이 선약이었다며. 어디서 볼 건지 정해. 태워다 줄 테니까.”
선유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듯 한 소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소민이 입술을 한 번 꼭 깨물고 망설이다 이내 기다리는 제운을 향해 말했다.
“그래요. 어디서 볼까요?”
전화를 끊은 소민이 선유의 차에 탔다.
“가요. 가다가 잠깐 약국에 좀 들러주면 좋구요. 아니, 들러요. 꼭 들러줘요.”
“약국? 어디 아파?”
“뭐... 그건 아니구요.”
“안 아픈데 약국은 왜.”
“그... 제운씨 여태 촬영했거든요. 비타민드링크라도 사 갖고 가려구요.”
그 말에 선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한테는 맨날 맨손으로 와서 골탕만 먹이면서 김제운이는 비타민까지 사간단 말이지?”
“한선유씨는 속 썩이잖아요. 쉽게 만나주지도 않고. 제운씨는 저한테 친절하게 해주거든요. 기브앤테이크. 주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거죠.”
그 말에 선유가 입을 꾹 다물더니 거칠게 차를 세웠다.
“아, 깜짝이야! 뭐예요? 놀랐잖아요.”
“약국 데려다 달라며. 약국이잖아.”
그 말에 소민이 창문 밖을 보자 정말 약국에 불빛이 반짝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잠깐 기다려요. 금방 갔다 올게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차에서 내려 약국으로 달려갔다.
“약사님. 그... 어... 갑자기 얼굴이 하얘지면서 쓰러졌거든요. 많이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이럴 땐 우황청심환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역시 그렇죠? 그거랑 몸이 허한 건지도 모르니까 몸이 허할 때 먹으면 좋은 거. 그것도 주세요.”
소민의 말에 약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물었다.
“남자예요? 여자예요? 연령대는?”
“남자요. 나이는 스물아홉이요.”
소민의 말에 약사가 몇 가지 약을 챙기며 말했다.
“이거랑 이게 젊은 남자분들한테 좋아요. 이거는 하루에 각각 아침 저녁으로 한 알씩 먹으면 돼요. 그리고 이거는 공복에 한 알이구요. 이렇게 하면 오만 천원이구요.”
“네.”
결제를 하는 소민을 향해 약사가 말을 건넸다.
“남자친구가 몸이 안 좋은 거예요?”
“예?”
“남자친구가 좋겠네. 여자친구가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주고.”
“그...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긴! 아무리 누나가 동생 잘 챙겨도 남자친구 챙기는 것만 못해요. 딱 보니 아가씨는 남자친구 챙기는 거구만.”
“정말 아닌데...”
“알았어. 알았어. 내가 비밀로 해줄게.”
전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약사의 태도에 얼굴을 붉힌 소민이 약사가 건넨 봉지를 챙겨들고는 약국 안에 무서운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달려 나오다 멈칫 하더니 도로 약국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나와 선유의 차에 올라탔다.
“가요. 출발.”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선유가 또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왜 그래요? 또 몸 안 좋아요?”
그녀의 말에도 그가 묵묵부답으로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그녀에게서 멀어졌고 그녀 위로는 안전벨트가 지나가고 있었다.
“안전하게 모신댔는데 탑승자가 기본을 몰라서 그래. 어떻게 된 게 번번이 매줘야 되나? 손이 참 많이 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그렇게 말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고, 고마워요.”
소민의 말에 선유의 시선이 흘깃 닿았다 멀어졌다.
“그래서 비타민드링크는 샀어?”
“아... 비타민드링크...”
소민이 그제야 선유에게 둘러댄 핑계를 생각해냈다. 왜 약국에 가서는 정작 비타민드링크 생각은 아예 나지를 않은 걸까.
“비타민 드링크 사러 간다며? 약봉투에 많이도 사왔더만. 김제운이가 비타민드링크를 물 대신 마시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많이 샀어?”
“그... 그야 내 마음이죠!”
“그래. 네 마음이지. 김제운이는 네 마음 받아서 행복하겠네.”
퉁명스레 그렇게 말한 선유가 운전에 몰두하자 소민이 뽀시락뽀시락 비닐봉투 소리를 내며 아까 들은 약사의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그에게 설명을 해줘야 하니까.
‘이거랑 이게 젊은 남자분들한테 좋아요. 이거는 하루에 각각 아침 저녁으로 한 알씩 먹으면 돼요. 그리고 이거는 공복에 한 알이구요.’
약사의 말을 되뇌던 소민의 머리에 약사의 다른 말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자친구가 몸이 안 좋은 거예요?’
‘남자친구가 좋겠네. 여자친구가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주고.’
‘딱보니 아가씨는 남자친구 챙기는 거구만.’
“아니야. 아니야.”
소민이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외치자 선유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착해서 내리라는데 뭘 아니야. 그렇게 애지중지 챙기는 김제운이 만나러 안 가?”
“에?”
선유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제운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 앞에 차가 멈춰 서 있었다.
“어? 언제 도착했지.”
어색한 표정을 짓던 소민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 고마워요. 데려다 줘서.”
“나 때문에 저녁도 못 먹은 것도 미안하고 하니까 신경쓰지 마.”
“아, 이거요.”
“이거 뭐? 나더러 김제운 주라고?”
자신을 향해 아까 약국에서 사온 봉지를 내미는 소민을 선유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니요. 이거... 한선유씨 주려고 산 거예요.”
“뭐?”
“한선유씨 거 사러간다고 하기엔 좀 부끄럽고 그래서 핑계댄 거라구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선유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의 무릎에 봉지를 살며시 올리며 말했다.
“아파 보일 때 바로 사오고 싶었는데 혼자두기 그래서 약국 못 갔거든요. 보니까 몸도 안 좋은 것 같아서 여러 개 샀어요. 이거는 아침 저녁으로 한 알, 이거는 공복에 한 알이래요. 그리고 우황청심환도 있으니까 집에 가면 이거 꼭 먹구요. 알았죠?”
선유가 자신의 앞에서 꼼꼼하게 설명하는 소민을 쳐다봤다.
“오늘... 뭐 때문에 갑자기 그랬는지... 궁금하긴 한데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까 묻지 않을게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약간 망설이다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근데요. 비밀이 있어도 괜찮고, 말을 안 해도 상관은 없는데요. 아프지 마요. 걱정되니까.”
소민의 말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유의 시선에, 그리고 스스로 한 말에 당황한 소민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집에 가서 푹 쉬어요. 시놉시스도 시간 나고 몸 괜찮을 때 읽어 보구요. 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차에서 내리려 차 문을 여는 소민의 손목을 선유가 낚아챘다.
“왜요?”
“너... 뭐야?”
이제껏 같이 타고 온 그녀를 몰라 보는 건 아닐테고 그의 물음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왜 나한테 친절하게 구는 건데?”
그의 말에 입술을 꾹 다물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소민이 소리를 높이고는 말했다.
“치... 친절한 게 뭐가 나빠요?! 그리고 한선유씨 내가... 내가... 캐스팅해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지나치다고 생각 안 해?”
그녀의 말에도 선유는 냉담했다. 그 냉담함에 소민이 움찔했다.
“무슨...?”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면 괜히 과잉친절 베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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