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34화 (34/105)

34. 한선유라고 하는데

34.

“아, 제운씨!”

- 네. 소민씨. 점심 드셨어요?

“어... 네... 뭐 대충?”

- 에이, 안 드셨구나?

“하하하하하. 족집게시네요. 이제 먹으려구요.”

- 빨리 드세요. 괜히 밥시간 놓치면 몸 축나요.

“그건 제가 제운씨게 말씀드려야 할 얘기 같은데요?”

- 소민씨가 제 몸 생각해주신다니까 좋은데요?

“에이, 당연한 얘기죠. 근데... 이따 뵐 건데... 어쩐 일이세요?”

- 소민씨가 엄청 보고 싶어서요.

“네?”

- 하하하하하! 놀랐어요? 촬영이 조금 일찍 끝날 거라고 해서 약속시간을 좀 앞당길까 해서요.

“아... 네... 몇 시로요?”

- 음... 한 8시쯤이요?

“8... 시요?”

- 네. 곤란해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8시에 봬요.”

- 네. 그 때 봬요.

제운의 전화가 끊기자 소민이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좀 빠듯하긴 할 것 같은데 후다닥 먹고 가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소민의 시선이 책상으로 향했다. 선유에게 설명할 시놉시스가 거기에 있었다.

“일단 한선유씨한테 설명할 시놉시스나 읽자. 시간이 정 빠듯할 것 같으면 시놉시스만 전달해야지 뭐.”

아쉬움을 달래며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시놉시스를 들었다.

“잘 어울릴 것 같아.”

시놉시스를 읽으며 소민이 남자 주인공 역에 선유를 대입해 읽으며 중얼거렸다.

“자신감이야, 한선유가 자신감 빼면 시체일 거고, 잘 생겼고, 능력도 되고. 누가 봐도 귀티가 흐르게 생겼잖아. 딱이네. 제작사에서 보는 눈이 있네. 연기도 잘 하니까 드라마 망칠까 걱정 안 해도 되고.”

시놉시스를 읽던 소민의 눈에 남자 주연과 여자 주연의 로맨스가 들어왔다. 입술을 한 번 삐죽인 소민이 중얼거렸다.

“여자 주인공 하는 배우만 잘 들어오면 안 망하겠지, 뭐.”

꼼꼼히 시놉시스를 여러 차례 체크하고 보니 약속시간이 가까워 있었다.

“근데 괜찮을까. 제운씨가 약속시간을 당겨서 빨리 가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 가서 먹게 되면 너무 늦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초조하게 시계를 보던 소민이 곰곰이 생각을 하다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이내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한선유씨. 있잖아요. 지금 어디예요?”

- 왜? 아직 약속시간 남았는데.

“네. 근데 조금 문제가 생겨서요.”

- 무슨 문제.

“제운씨가 약속시간을 조금 당겨서... 어떡하죠? 그냥 시놉시스만 전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아니면 좀 미룰까요?”

소민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선유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약속시간이 몇신데?

“어... 8시요.”

- 김제운이도 연예인 병 걸렸대? 왜 자기 멋대로 약속시간을 바꾸고 그래?

부루퉁한 선유의 말에 소민이 피식 웃었다.

“한선유씨만 하겠어요.”

- 내가 뭘.

“아니에요. 그럼 오늘은 제가 시놉시스만 전달하고...”

- 됐어.

퉁명스레 흘러나온 선유의 말에 혹시 기분이 나빠져서 오늘 안 본다고 하려는 건가 싶어 소민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굳어졌다. 그리고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입고 나가려고 꺼내어 놓은 옷을 쳐다봤다. 고르고 골라 둔 옷이 왜 지금 이 순간에는 빛을 잃고 초라해 보이는 걸까. 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엿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그 쪽 집에 다 왔으니까 조금 빨리 저녁을 먹으면 되겠네.

“네?”

- 거의 도착했어. 그러니까 지금 내려 오라고. 밥 먹게. 아직 준비 안 됐어?

“어... 어... 벌써 왔다구요? 저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요?”

- 그럼 어떻게 하라고. 나 도로 가?

“아, 아니요! 어... 음... 올라와요.”

- 뭐?

“올라오라구요. 3동 맨 꼭대기 층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딸깍 끊은 소민이 집 가운데 지뢰가 떨어지기라도 한 듯 난리법석 소란을 피우며 방 밖으로 뛰어 나왔다.

“으앗!! 어떡해!! 미치겠네!! 야!! 채민규, 일어나! 일어나라고!!”

낮잠을 자며 지극히 평범한 휴일을 보내려던 민규는 축구선수가 되기로 진로라도 전향한 것인지 자신을 발로 뻥뻥 차대며 깨우는 누나의 발길질이 박지성 뺨치는 것 같다고 느끼며 이불을 끌어안고 발버둥을 쳤다.

“아~ 또 왜!!!”

“급해, 급해!! 나 씻어야 하니까 집 정리 좀 해! 빨리! 빨리!! 계약이 걸린 중요한 문제야!!”

“그걸 왜 우리집에서 하는데!! 나가서 하면 되잖아!!!”

“야! 갑은 왕이다 몰라? 내 룰이잖아. 집에 다 왔대. 빨리해, 빨리!!!”

“집이 더러우면 계약 안하기라도 한 대?!!”

“몰라!!”

“대체 누가 오는데!!”

“한선유!!”

“그냥 나가서 하면 안 돼?”

그의 말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 소민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무늬만 나쁜 동생이지 속은 여리고 착한 동생인 민규가 일어나 주섬주섬 덜 깬 눈을 비비며 늘어져 있는 물건들을 대강 대강 베란다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부엌 개수대에서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할 때까지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대체 언제 나올 건데? 나도 좀 씻자!! 집에 사람이 오는데 거지꼴로 있어야 하냐?”

“잠깐만 기다려!”

대체 뭔 놈의 샤워를 매일 저리도 오래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민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충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사이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한선유라고 하는데...”

의아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신분을 밝히자 민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할 사람이 왔는데 아직도 열릴 생각은커녕 미동도 없는 화장실을 한 번 바라본 민규가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만일 지금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는 곧 지상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게 될 게 자명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데 그럴 수는 없었다.

한숨과 함께 문을 열자 자신을 위 아래로 훑는 이방인의 날 선 시선이 날아왔다. 그 시선에 지지 않고 ‘뭐야, 이놈은.’이라는 시선을 되돌려준 민규가 대충 거실로 그를 안내했다.

대한민국 탑배우 한선유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제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뇌리에는 그저 자신의 잠을 방해한, 굳이 포장하고 미화하자면 자신의 누나를 괴롭히는 악당 정도로 각인 되었으니 푸대접은 절로 나오는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었다.

거실로 들어오자 그는 쇼파에 긴다리를 꼬고 앉아 민규를 노려봤다.

성질 같아서는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오늘 자신은 누나에게 얼마나 시달릴지 알 수 없는 까닭에 민규가 뻣뻣하니 말했다.

“마실 거라도 줘?...요?”

어거지로 그가 반말 뒤에 ‘요’자를 붙였을 때였다.  화장실문이 빼끔 열리더니 고개를 내민 소민이 선유를 발견하지 못하고는 그의 동생을 향해 말했다.

“민규야~ 목욕 가운 좀 갖다 줘. 안에 가운이 없네? 널어놨나봐.”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선유의 시선이 자신의 누나의 A-짜리 쇄골을 훑는 것을 놓치지 않은 민규가 반사적으로 선유의 시선을 차단했다.

어떻게?

미간을 향해 당수를 날려서. 선유가 고통의 신음을 흘렸음은 두말 할 나위 없었다.

“그 쪽은 뭐야.”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요새는 계약할 때 캐스팅 디렉터 사생활도 조사해가며 계약하나 보지?...요?”

신랄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 이런 푸대접이 생소한 선유가 민규를 노려봤고 자신의 누나를 힘들게 하는(사실은 자신의 주말 단잠을 방해한) 선유가 마음에 들 리 없는 민규 역시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민이 옷을 입으러 들어간 사이 그들의 분위기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타클라마칸 사막 같았다.

황사바람 같은 까칠하기 그지 없는 시선을 얼마나 나눴을까.

어느새 옷을 입고 다가온 소민이 민규의 뒤통수를 손에 든 계약서로 강타했다.

“민규, 너 혼날래? 내가 뭐랬어? 그새 까먹었어?”

“아, 안 까먹었어!”

기껏 청소도 대신하고 손님이 들어오도록 문도 대신 열어주고, 누나 쇄골의 순결도 지켜줬건만 돌아온 것은 뒤통수 수타였다.

힘으로는 얼마든지 누나를 이길 수 있지만 그의 아버지는 말하셨다. “내 딸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선 피눈물이 나게 될 거다.”라고.

분명 한 배에서 난 같은 자식인데 끔찍이도 누나를 아끼는 아버지의 등살에 그는 누나의 말이라면 우선 순종해야 했다. 때문에 누나가 왕으로 삼는 사람은 그에게도 왕이어야만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그녀의 누나는 계속 재잘댔다.

“내가 뭐랬지?”

“갑은 왕이다.”

“갑은 왕이다.”

동시에 입을 모아 말하는 그 둘의 모습에 선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곧 펴졌다.

그리고 소민의 이어지는 잔소리에 자신을 향해 눈에서 광선이라도 뽑아 죽일 기세이던 제 앞에 사내가 대충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 남자에게 소민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고민했다.

“어떻게 하실래요? 일단 여기서 얘기하실래요? 아니면 나가실래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에서 향긋한 샴푸내음을 풍기며 소민이 그렇게 묻자 선유는 절로 이성이 소멸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지금 이 공간 안에는 소민의 시선이 떠나자 슈퍼맨마냥 다시 자신을 향해 눈으로 레이저빔을 쏠 기세인 남자가 있었다.

그런 이 상황에서 계속 여기 있는 것은 바람직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얼굴로 먹고사는데 얼굴에 구멍이라도 날까 걱정이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으니까 나가지. 내려가서 기다릴 테니까 준비하고 나와.”

“왜요?”

“여기 있는 게 좋은 선택지가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선유가 민규를 한 번 흘깃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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