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상한 오해 한 건 아니죠?
33.
“뭐?”
“그 사람이 무슨 오해를 하던 해명 하면 되는 거고. 설령 오해를 한다 해도 어차피 일로 엮인 사인데 사생활가지고 뭐라고 하면 웃기는 거 아니야? 아니면 누나가 오해 받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이, 이유가 어딨어! 그냥 너랑 나랑 오해받을 이유가 없는데 오해받으면 기분 나쁘니까 그런 거지. 아, 나가! 왜 자는 걸 쳐다보고 그래.”
“누군 좋아서 봤냐? 대체 그 벨소리에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꿀잠을 자는지. 신기해서 들어왔다가 자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 못해 인체의 신비가 경이로워서 본 거다!”
그렇게 말한 민규가 의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소민을 바라보다 방에서 나갔고 소민은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시금 카톡 내용을 훑었다.
처음에는 꽤나 화가 난 듯했던 카톡 내용은 뒤로 갈수록 걱정으로 가득했다. 혹시나 나쁜 놈한테 붙잡힌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그의 기세는 카톡이 그녀의 집 대문이라면 그걸 열고 뛰쳐나올 기세였다.
그리고 그녀가 카톡을 읽었다는 표시를 발견한 것일까 부리나케 그녀의 핸드폰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누른 소민이 누가 엿듣는 것도 아닌데 속삭이는 듯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어디야?”
“저기... 혹시 이상한 오해 한 건 아니죠?”
수화기 너머로 여느 때보다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이 타고 넘어왔고 그에 반응해 이마에 힘줄 하나가 움찔하고 솟았다.
“글쎄?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아, 저 집인데요.”
“누구 집?”
“누구 집이라니요? 제 집이죠?”
순순히 묻는 대로 답하고는 있었지만 차라리 답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목울대까지 쓴물이 넘어왔다.
지끈지끈 쑤셔오는 머리를 문지르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피곤은 좀 풀렸나?”
“아니요. 온몸이 뻐근한 게...”
“뭐?”
“온 몸이 뻐근하다구요. 한선유씨는 괜찮아요? 나는 거의 가만히 있었지만 한선유씨는 나까지 지탱하고 그러느라 더 힘들었을 거 아니에요.”
“아... 그 의미였나.”
“뭐가요?”
“아니야.”
“아, 한선유씨 시놉시스 드려야 하는데.”
“됐어. 급할 거 없어.”
“그러면 제가 김제운씨 만나러 가는 길에 드리고 갈까요?”
“뭐?”
“저 김제운씨 만나러 가야 하거든요. 그 길에 들를게요.”
“몇 시에?”
“제운씨 스케줄 끝나고 오늘 밤에 한 9시 쯤 만나기로 했으니까... 한 6시 쯤? 괜찮겠어요? 오늘 스케줄 없죠?”
“스케줄이 없다 쳐도 그 시간이면 저녁시간이잖아.”
“아, 그렇죠? 그럼 제운씨 만나고 나서 들를까요? 아니면 내일?”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제운을 중심으로 스케줄을 왔다리 갔다리 하는 소민의 태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6시에 보지. 어제 고생했으니까 밥도 살게.”
“웬일이에요? 설마 이번에도 도망가는 거 아니죠?”
“어제 약속도 했는데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선유의 말에 소민이 순간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는 말했다.
“아, 알았어요. 그럼 6시에 봐요.”
“5시 30분에 태우러 가지.”
“네? 태우러 온다구요?”
“그럼 나 혼자 식당에 들어가서 뻘쭘하게 기다려? 그 쪽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데?”
“나간다 그랬는데 왜 사람을 못 믿어요?”
별 말 아닌 말이었는데 선유는 묵묵부답. 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한선유씨? 끊었어요?”
혹시나 전화기가 끊어진 건가 싶어 그렇게 선유를 부르자 이내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안 끊었어. 어쨌든 5시 30분까지 갈테니까 나와. 집 주소 문자로 찍고.”
그렇게 말한 선유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소민이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뭐야, 자기 할 말만 하고 끊고. 찜찜하게 알 수 없는 침묵소리나 남기고.”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폰이 다시 진동을 울렸다.
- 주소.
“성격도 급하지. 전화 끊은지 이제 30초도 안 지났는데.”
달랑 두 글자로 독촉에 들어간 선유의 문자에 소민이 도도도도 답문을 찍어 보냈다.
‘띵동’하고 울리는 문자음에 선유가 폰을 들었다. 소민이 보낸 답문에 찍힌 주소를 핸드폰 네비게이션 앱에 찍어 있는 주소라는걸 확인하고 난 선유가 정면을 바라봤다. 소민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왜 그렇게 못 믿어요?’
‘왜 사람을 못 믿어요?’
각서를 쓰라고 한 때에도, 오늘의 전화 통화에서도 소민이 반복했던 말이다.
아무 의미 없이 평상시 대화에도 잘 등장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소민 역시 아무생각 없이 혹은 그가 하는 말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그냥 쉽게 받아칠 수도 넘어갈 수도 없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한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핸드폰 잠금 화면에 밝게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못 믿을까. 어떻게 생각해, 한선유?”
그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으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믿어도 된다고 믿어보라고 하는데 머리가 안 된다고 할 땐 어떻게 해야 하냐.”
그렇게 중얼거린 선유가 눈을 감았다.
*
“민규야, 민규야!”
“왜?”
점심을 먹던 민규 앞에 한아름 옷을 끌어안은 소민이 등장했다.
“어느 게 나을까?”
“뭐가?”
“옷 말이야.”
“갑자기 웬 옷?”
“아니, 나가야 하는데 무슨 옷이 좋을지 모르겠어서.”
“무슨 약속인데? 누가 소개팅이라도 해준대?”
“소개팅은 무슨... 일 하러 간다.”
“일하러 가는데 웬 옷타령이야?”
“그, 그야. 프로페셔널해 보여야 하니까?”
소민의 말에 민규가 소민이 갖고 온 옷 뭉치를 바라봤다.
“미니스커트로 프로페셔널 어필하게?”
“어?”
“이 것도 탈락, 이 것도 탈락, 얘도 탈락, 요 것도 탈락, 다 탈락.”
탈락 탈락을 외치다 탈랄라를 외칠 것 같은 분위기인 민규를 노려보며 소민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 뭐하냐.”
그렇 소민의 태도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민규가 외려 허리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들떴는데?”
“드, 들뜨긴 누가 들떴다 그래.”
그 말에 민규가 시계를 쳐다봤다.
“몇 시 약속인데?”
“6시 쯤?”
“근데 6시 좀 넘어서 있는 약속에 입을 옷을 이 대낮부터 고른다고?”
“도저히 못 고르겠어서 그래. 옷이 없다. 옷이 없어.”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누나를 민규가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게? 이게 옷이 없는 거냐? 하긴 이건 옷이라기보단 사방팔방 찢어놓은 천 쪼가리지. 그래. 네 말이 맞다.”
한없이 비아냥 거리는 민규의 말에도 소민은 진지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왜? 없잖아.”
“너 가서 내 옷장 좀 열어봐라. 아주 이게 복에 겨운 소리하고 있네.”
“넌 남자잖아. 빨리 봐봐. 뭐가 괜찮냐고.”
“아무거나 입어!”
“이씨!! 이 동생같지도 않은 놈!!”
“너 아무거나 잘 어울리니까 아무거나 입으라고!!”
분명 칭찬이었는데도 소민은 도끼눈을 뜰 뿐이었다.
“도움이 안 돼. 도움이.”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다시 옷을 끌어안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체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저래?”
그렇게 중얼거린 민규가 뚫어져라 소민의 방문을 쳐다봤다.
“으휴! 지지리도 도움이 안돼요. 있으나마나야. 아빠한테 다 얘기할 거야.”
방에 돌아와서도 투덜거리며 소민이 거울에 이 옷 저 옷을 비춰봤다.
“이게 낫나? 아닌가? 이게 나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옷을 하나 들었다 팩 내팽개치고 하나 들었다 팩 내팽개치던 소민이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발그레한 얼굴로 잔뜩 들뜬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는 초승달같은 미소가 물려 있었다.
“어머, 나 뭐해?”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자신의 발 밑에 수북이 쌓인 옷을 내려다봤다. 이건 마치 첫 데이트 나가는 여자 같은 모습이었다.
“이, 이건!”
한참이나 변명할 말을 찾던 소민이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이건! 한선유씨랑 같이 밥 먹는데 꿇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러는 거야. 연예인이랑 밥 먹으려면 잘 차려입고 먹어야지.”
얼토당토않은 핑계였지만 그녀에게는 그보다 더 나은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데 또 다시 전화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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