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오해하진 않겠지?
32.
사과 안하면 와서 허리를 기역자로 꺾을 기세인 선유의 말에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소민을 향해 꾸벅 몸을 굽히자 소민이 민망한 표정으로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작가가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누그러진 표정을 한 선유가 메이크업을 수정하라는 말에 메이크업을 고치러 들어갔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선유의 뒷모습을 보며 소민이 중얼거렸다.
“아니 애시당초에 제일 문제아는 자기인데 누가 누구더러. 본인도 내 이름 안 부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소민의 입가엔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그래도 뭐. 나름 배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민이 배시시 웃으며 바닥을 발로 괜히 툭툭 차고 있을 때였다.
“채소민씨?”
감독이 소민을 부르는 목소리에 소민이 황급히 달려갔다. 또 무슨 소리라도 하려는 건가 긴장한 표정으로 선 소민을 향해 감독이 아까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태도로 사과를 건넸다.
“생각해보니 미안해요. 우리가 일방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한 꼴이 됐네요. 어떻게 보면 우리 요구 들을 필요 없는 건데. 고마워요. 그런데 기왕 시작한 거고 돕겠다고 했으니까 끝까지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아... 네.”
소민의 말에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하겠다고 한 걸로 알고 컨셉부터 설명해줄게요. 컨셉 설명도 안 해주고 자꾸 요구를 하니 어려운게 당연한 거니까. 지금 컨셉이...”
감독이 설명하는 컨셉을 진지하게 경청한 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런 소민을 보며 한 손으로 턱을 쓸던 감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배우가 아가씨를 꽤나 아끼나봐.”
“네?”
“누굴 위해 저렇게 역성을 드는 걸 본 일이 없는데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그럴 리가요.”
소민이 부인했지만 감독은 다 안다는 듯 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더니 촬영 소품을 다시 한 번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리러 사라졌고, 소민은 괜히 감독의 말에 홧홧해진 볼을 감쌌다.
“어우, 괜한 소리를 하셔가지고.”
“왜 그러고 있어?”
“와, 왔어요?”
발그레한 소민의 얼굴을 본 선유가 자못 심각한 얼굴을 했다.
“어디 아파?”
“왜, 왜요?”
“얼굴이 빨간데?”
“아, 아픈게 아니라 더워서요. 여기 조명 아래 서 있다 보니까 덥네요. 하하하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소민의 말에도 불구하고 선유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아.”
여러 포즈를 잡다가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주며 선유가 그렇게 말했고 소민은 얼굴을 푹 숙인 채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확실히 컨셉을 알고 난 뒤로 촬영은 보다 수월하게 풀렸고 선유도 제법 진지하게 촬영에 임했다. 덕분에 듣고 싶던 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기나긴 촬영이 끝나고 선유와 준영이 태워다 주겠다는 것을 소민은 부득불 기어이 택시를 타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민을 밤늦게 집 앞에서 캐치해온 민규는 지금 자신의 귀를 자극하는 저 벨소리에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직장의 노예인 그가 간만의 휴일의 늦잠을 즐겨보려 하는데 그의 잠을 방해하는 저 벨소리는 그의 착하디착한 심성을 삐뚤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저 벨소리는 자신의 벨소리도 아니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그래, 다 잘 살아 보자고 잠도 자고 먹고 싸고 하는 건데 저 놈의 벨소리가 그를 잘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으아악! 전화 좀 받으라고!!!”
아무리 제 방에서 발광을 하며 외쳐 본들 자신의 누나는 귀에 말뚝이라도 박은 것인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아니! 새마을 운동이 끝난 지가 언젠데 이런 옛날 옛적 노래를 벨소리로 해놓느냐고! 악! 악!”
자신이 바꿔놓은 벨소리이건만, 그는 그 사실을 잊은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안 받는 누나를 향하던 분노가 이제는 전화를 한 어디 사는 뉘신지도 모를 사람을 향해 불타오른 민규가 소민의 방으로 달려가 힘차게 새마을을 외치고 있는 누나의 전화기를 들어 수신인을 확인하고는 짜증을 냈다.
“대체 이 꼭두새벽부터 전화질 하는 미똥이가 누구야?”
거절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기도 전에 핸드폰이 또 다시 잘 살아보세를 외치자 민규가 참을 인을 새기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습니다.”
멀쩡한 남자의 목소리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곧 바로 다시 전화가 울렸다. 같은 번호임을 확인한 민규가 한숨을 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방금 거셨던 번호고 잘못 거셨습니다.”
“죄송한데 그 번호 혹시 채..소민씨 번호 아닙니까?”
상대방이 무슨 언어장애라도 있는 듯 어렵게 누나의 이름을 발음해냈고, 잘못 걸었다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정확한 수신인을 알고 있는 그에게 민규가 대답했다.
“맞는데요?”
“너 누구야?”
“어디서! 반말이세요?”
욱하는 성질을 어거지로 누르며 민규가 그렇게 말하자 상대방이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반말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상대방이 그렇게 나오자 지고는 못산다는 인생철칙을 가진 민규가 인상을 구기며 지지 않고 말을 반토막 내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가 왜 궁금한데?”
“......됐고, 그 여자 좀 바꿔.”
“그건 좀 어렵겠는데? 지금 자고 있거든.”
“뭐? 당신 누구야? 누군데 자는 여자 옆에 있어.”
“그걸 댁이 알아서 뭐하게.”
그 말이 상대방에게는 몹시도 화가 나는 말이었는지 예고도 없이 전화가 뚝 끊어졌고, 민규는 무슨 일 있었나 싶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물론 진동으로 바꾸는 것을 잊지 않고.
전화기 너머 선유는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벌렁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아빠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젊디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나름대로 목소리만 따지면 아나운서 뺨치게 안정적이고 듣기 편안한 중저음의 보이스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김제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그 여자랑 그 놈이 같이 있다는 것, 그보다 더 열이 받는 사실은 그 놈이 그 전 밤도 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도망 안 가겠다고 약속까지 해줬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가장 화가 나는 사실은 왜 그녀 때문에 화가 나는지도 모르는데 화가 나고 있는 자신의 몰골이었다. 매 번 이 여자랑 엮이면 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이 생기는 감정기복에 휘둘리느라 피곤했다.
“아, 짜증나!!!”
그렇게 신경질을 낸 선유가 핸드폰을 노려봤다.
한편 한낮이 돼서야 잠에서 깬 소민은 눈을 뜨자 마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민규의 모습에 짜증을 내는 중이었다.
“너 뭐야아.”
“이 아침에 다들 왜 그렇게 내 정체성이 궁금한 건데?”
“뭔 소리야?”
“미.똥이 누구냐? 미.똥이가 전화해서 너 찾다가 너 잔다 그러니까 나더러 누구냐고 자꾸 따지더라.”
“뭐?”
민규의 말에 소민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살폈다.
헉소리가 나게 선유에게서 수많은 전화와 카톡이 들어와 있었다.
“뭔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일은 무슨. 멀쩡한 목소리로 통화하는 놈한테 무슨 일이 있겠냐? 그리고 안 받을 거면 수신거부를 하든가 진동으로 해놓든가.”
“미쳤어. 미쳤어. 설마 너 이상한 소리 하거나 그러진 않았지?”
“뭘 뭐라 그래. 나한테 자꾸 반말 하길래 같이 반말 좀 해주고, 자고 있다고 말한 거 말고는 없구만.”
“못살아. 내가 못살아. 망했어. 어제 도망 안가겠단 소리도 겨우 들었는데. 설마 오해했으면 어떡해? 아 망했어.”
머리를 쥐어뜯는 그녀의 모습에 민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대체 미.똥이가 누군데?”
“한선유.”
“뭐?”
“한선유라고. 이씨, 공든 탑 무너지면 다 너 때문이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남의 전화를 왜 받아. 안 받았음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설마... 너랑 나를 오해하진 않겠지? 했을까? 어떻게 해. 너 같으면 어떨 것 같아? 어? 어?”
그녀의 말에 민규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오해받을까봐 겁을 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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