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그럼 찍죠. 도장.
29.
뜨거운 불빛 아래서 화보촬영은 쉼 없이 계속 됐다. 안 그래도 더워죽겠는데 여자 모델들과의 밀착씬은 어찌 이리 많은지 이열치열을 말한 준영더러 헛소리하지 말라고 쥐어박고 싶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저건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니야?”
그의 시선이 촬영장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물론 자신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뭐라 하지 못해야 하는게 맞지만 저건 도를 넘어서도 너무 넘어선 행태였다.
저 여자가 들고 있는 저 오색찬란한 피켓에 새겨진 문구는 정말 그의 인생 최대에 수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그녀가 누구를 찾아왔는지 대변하고 있었다.
“제발 날 버리지 말아요.”
저 유치찬란한 문구를 들고 있는 여자는 얼굴에 로켓 만들 때나 쓰는 철판을 깔기라도 한 듯 대기와의 마찰보다 뜨거운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벌써 세 시간째 저러고 서 있었다.
하긴 자신과는 달리 얼굴의 반을 마스크로 가려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얼굴이 얼마나 작은 지 큰 마스크가 아님에도 얼굴이 반 정도 가려졌다. 거기다 모자까지 눌러 썼으니 지금 저 여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다만 늘씬한 그녀의 백만 불짜리 몸매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기는 했다.
그 방증으로 그녀를 위 아래로 스캔하는 감독의 눈은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아마 광고촬영 현장에 서 있는 모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몸매를 가진 소민의 모습에 저 피켓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현장에 투입시키고 싶어 하는 게 역력한 사진작가의 모습이 눈가를 자극했다.
촬영감독은 그녀를 곁눈질하면서 광고를 찍고는 있었지만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자신을 보며 혀를 차다가 촬영을 하다가 사진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소민을 쳐다보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격려 차 방문했던 광고주마저 저 여자가 든 피켓을 보더니 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는 역시 자신과 그녀를 번갈아 보던 감독에게 다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미치겠네.”
낮게 읊조린 그가 스튜디오 외각에 서 있는 그녀를 흘깃 쳐다보자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선유는 저 마스크 뒤의 그녀의 입술이 아마 호선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이 그 입술을 대변하고 있었다.
촬영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저기 선 여자와 담판이라도 짓고 싶을 정도였다.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광고주와 얘기를 나누던 감독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지 쉬었다 가자며 촬영을 멈췄고, 선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시위하잖아요.”
“이 문구를 들고 지금 1인 시위를 한다고?”
“네.”
그녀의 말에 선유가 그녀가 들고 있는 피켓을 툭툭 손으로 쳤다.
“대체 내가 언제 너를 버렸는데?”
그의 말에 지지 않고 잘도 대꾸를 하던 그녀가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여기서 계속 이렇게 얘기해도 되요?”
“왜? 무슨 문ㅈ”
말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선유는 꽤 많은 사람들이 어느 새 옹기종기 주변에 모여 둥근 원을 그리고 있고 그들의 주변에 오지 않은 사람들마저 그들을 바라보며 숨죽여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선유가 속으로 참을 인을 또 새기자 이마에 힘줄이 하나 돋았다. 요새는 아예 부적처럼 새기고 다니는 글자였다.
어떻게 된 게 이 여자랑 있기만 하면 공항이나 레드카펫을 밟을 때보다 더 많은 시선을 순식간에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이 여자가 재주가 있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동원하는 재주이리라.
선글라스를 낀다고 이 촬영장에서 자신이 한선유임을 모를 사람이 없음에도 황급히 선글라스를 낀 선유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떴다.
“자, 이제 얘기해보자. 대체 내가 너를 언제 버렸다는 거야?”
“이거요? 당연히 뻥이죠.”
자신의 차 안에 그녀를 끌고 온 그가 커튼까지 내려친 그가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말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왠지 모를 뿔이 돋는 것이었다.
“그럼 왜 이딴 피켓을 들고 있는 건데!”
끌려오는 와중에 놓칠 만도 하건만 자신의 차 안까지 들고 온 피켓을 노려보며 그가 그렇게 분통을 터뜨렸다.
“왜긴 왜겠어요? 한선유씨가 도망갔잖아요! 관상? 관상같은 소리 하고 있습니다.”
소민의 말에 제 발이 저린 선유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계약서랑 시놉시스 다시 갖고 왔으니까 확답을 해주세요. 어떻게 할 거예요?”
그녀가 피켓 뒤에 붙여 놓았던 계약서를 척 떼어 그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철두철미하기도 하지. 결국 그녀는 계약이 목표였던 모양이었다. 저 피켓을 놓치지 않고 여기까지 들고 들어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당장 결정 안 해도 된다 그랬었잖아?”
“그랬었죠. 한선유씨가 도망가기 전까지는.”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물론 그러시겠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꿋꿋하게 계약서를 내밀고 있는 소민과 계약서를 받지 않는 선유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흘렀다.
“그럼! 일단 약속해요.”
“무슨 약속?”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소민이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도망가지는 않겠다는 약속이요.”
“내가 도망을 왜 가?”
“전적이 있는 사람이 그런 말하니까 참 신빙성있다, 그렇죠?”
빈정빈정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말에 선유가 부아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래, 해. 하면 될 거 아냐!”
선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눈앞에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이건 뭐야?”
“뭐긴 뭐예요? 약속한다면서요. 약속 안 해봤어요?”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걸 하래? 그리고 요새는 애들도 이런 걸로 약속 안 할걸? 대체 아직도 손가락 걸어 약속 하는 사람이 어딨어?”
“여기요. 아무튼 빨리 새끼손가락 걸어요.”
주춤주춤 선유가 망설이자 소민이 손가락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 빨리요!”
순간적으로 바락하는 소민의 기세와 자신이 지은 죄가 있는 터라 선유가 결국 손가락을 걸었다.
“자, 사인?”
“뭐?”
“사인하라구요. 여기 손바닥에.”
“별...”
“빨랑 안해요?”
“아, 해. 한다고.”
소민의 손에 최선을 다해 손가락으로 사인을 하던 선유의 눈빛에 어느 순간 빛이 들어앉았다.
“이 봐.”
“왜요?”
“새끼손가락 약속도 도장은 찍는 것 같던데?”
“뭐 그렇게 하기도 하죠. 그것도 하고 싶어요?”
도망가지 말라고 한 말에 발뺌이나 하던 남자가 약속도장까지 찍자 하니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소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딱히 손해는 아닐 테니까.
“그래요. 그럼 찍죠. 도장. 엄지손가락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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