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어디 갔어. 이 남자?
28.
“보고 있는 거 맞아요?”
시간이 지나도 잠잠한 선유에게 소민이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리며 그렇게 물었고 그런 소민의 입술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우앗!! 뭐, 뭐한 거예요? 지금?”
무언가 입술에 와닿은 감촉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소민의 시선에 자신의 코 앞까지 가까이 와있는 선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거리에 놀란 소민이 뒤로 휙 몸을 재끼며 소리쳤다.
“내, 내가 헛수작 부리지 말랬죠? 지금 설마 나한테!”
흥분해서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보며 선유가 말했다.
“입술... 움직이면 안 되는데 움직여서 움직이지 말라고 손으로 짚은 거 뿐이야.”
“거짓말하지 말아요. 손이 그렇게 초, 촉촉할 리가 없잖아요.”
“거 봐, 내 팬 아니지? 나 다한증이야. 눈이나 감아. 관상 마저 보게.”
더 추궁하기에는 너무나 태연한 선유의 행동에 소민이 미심쩍어하면서도 눈을 감았다.
“빨리 봐요. 빨리 보고 한선유씨 캐스팅 될지 안 될지 얘기 해봐요.”
소민이 눈을 감고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미닫이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한선유씨?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소민의 질문에도 선유는 답이 없었다.
“언제까지 있어야 하냐니까요?”
답이 없는 선유에게 따지려 소민이 눈을 떴을 때였다.
“어? 어디 갔어. 이 남자?”
방 안에는 덩그러니 소민 혼자만이 남은 채였다.
“뭐, 뭐야? 화장실 갔나? 아, 혹시 화장실 가고 싶은데 체면은 있고 부끄러워서 괜히 관상 어쩌고 핑계 댄 건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설마 천하의 한선유가 흔히 말하는 먹튀라든지 뭐 그런 걸 한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캐스팅 대상과 캐스팅디렉으로 만난 정식자리에서 멍청히 눈뜨고 사람을 보낸, 아니 정정해서 멍청히 눈감고 사람을 보낸 역대 최악의 캐스팅디렉터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하, 아하하하하하하. 화장실 간 거야. 화장실. 돌아오면 뭐라고 해주지? 모르는 척하는 게 좋겠지? 전화 받고 왔나 봐요? 그래. 그게 좋겠네.”
그러나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선유는 돌아오지를 않았다.
“벼, 변비인가보지. 한선유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지.”
선유를 위한 혹은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면서 기다리길 수 십분 결국 소민은 폭발하고 말았다.
“아 놔, 지금 각서만 받고 계약하기 싫어서 도망간 거 맞지? 애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처럼 눈감고 있으라 그러고. 어쩐지 관상이 어쩌구 할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
씩씩거리던 소민이 물을 들이키고는 컵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미.동? 미동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앞으로 너는 미.똥이다. 이 미친 똥개!! 그 나이 먹고 편식이나 하는 이 편식쟁이 미똥아!! 내가 너! 기필코 계약하게 만들고 말겠어. 각오해라. 미.똥!”
그녀의 뒤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주 활활~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한 선유는 마른 세수를 하다가 이내 운전석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미친놈.”
아무리 생각해도 그 때 자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그 눈빛에 홀렸다.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갖고 열의에 차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빛에. 그래서 자꾸만 얼굴을 보게 됐고, 그 눈빛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얼굴은 보고 싶고, 눈빛을 보다보면 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고 그래서 관상을 봐주겠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관상? 관상의 관도 모르는 그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스스로도 기가 찼다.
눈을 감으라는 그의 요구에 꽁시랑거리면서도 그녀는 일 때문이었는지 순순히 눈을 감았다. 눈빛이 안 보이니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는 종알거리는 그 입술에 시선이 갔다. 시선을 옮기려 애를 쓰는데 분홍빛으로 생기를 띈 작은 그 입술이 오물거렸다.
“뭐에 홀린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선유가 자신의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찰나였지만 기억력은 순식간에 그 때의 심장박동을 재연해냈다. 멀쩡한 얼굴로 태연스레 거짓말을 했어도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중구난방의 박자로 뭘 훔친 어린아이처럼 펄떡거리는 심장을 감추려 더 태연한 척했다.
“도망이나 오고. 비겁한 놈.”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을 욕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다. 미심쩍어 하면서도 다시 또 순순히 눈을 감는 소민을 계속 보고 있다 보면 같은 행동을 반복할 지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는 몸을 제어하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었으니까.
“화났으려나. 일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리고 선유는 자신의 말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보통 화가 난 게 아님이 틀림없었다.
평범한 여느 스케줄 있는 날과 다름이 없는 아침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거실에 앉아 시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방에 쳐들어올 시간을 계산하고 있던 준영을 본 것까지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벌써 갈 시간이야?”
“벌써라니요? 지금 시간이 10시인데요. 10시면 성실한 직장인들은 이미 출근해서 오전 업무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구요.”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잖아.”
선유가 퉁명스레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화보촬영이랬지? 어차피 가서 의상, 메이크업, 헤어 다 손 볼 거니까 상관은 없을 것 같고. 대충 씻고 옷만 입고 나올게.”
“15분 드립니다. 총알같이 움직이세요. 실시!”
“까분다.”
그렇게 말한 선유가 욕실로 사라졌다 나왔고 늘 그랬듯이 촬영장으로 향했다.
“오늘 컨셉이 뭐래냐?”
“글쎄요? S/S 시즌 화보촬영이니까 봄, 여름 의상이 주겠죠.”
“난 S/S 시즌 화보가 제일 싫어.”
“왜요? 어차피 상의탈의 해도 탄탄하시잖아요. 복근은 그걸 대비해서 만드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거 말고. S/S는 꼭 여자들이 등장하잖아. 그게 딱 질색이야. 여름인데 왜 달라붙어서 찍어? 더우니까 뚝 떨어져서 찍어야지.”
선유의 되도 않는 궤변에 준영이 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열치열이죠.”
“그러다 더위 먹어.”
“그 정도로는 안 먹어요.”
만담에 가까운 대화를 하며 촬영장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스텝들이 선유에게 달려들었다.
“늦었어요. 오늘 찍을 컨셉이 여러 개라서 일정이 타이트하거든요.”
여기까지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촬영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달라졌다.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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