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날 캐스팅 할 수 있는지, 없는지
27.
“실망하고 말고 할 게 뭐 있나?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데. 근데 캐스팅 디렉터를 하면 돈을 많이 버나봐?”
“사람마다 다르겠죠.”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소민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말하자 그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캐스팅 디렉터 일하는 건 마음에 들고?”
“네. 제가 캐스팅한 사람들이 성공하면 보람도 있고, 역할을 잘 해내면 고맙기도 하구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꽃뱀이라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그저 자신을 캐스팅하기 위해 쫓아다닌 것이란 것을 깨닫고 나니 뭔가 허무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거라면 돈을 노리거나 루이의 똥이나 풀났다 등의 명품 혹은 신분 상승을 노리는 목적으로 접근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 뭐 그녀도 나름 목적이 있어 그에게 접근했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 돈을 노린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걸 보니 굳이 연예계에 발을 들이겠다 욕심을 부릴 만한 여자도 아닌 것 같았다.
팬 미팅 자리에 토끼탈을 쓰고 오고, 토끼탈을 쓰고 자신과 추격전을 찍고, 쓰러진 자신의 입장을 고려해서 자신의 차로 자신을 데려다 주고. 자신의 몸 걱정까지 해준 여자. 게다가 제법 입이 무거워 스캔들이 나지 않게 입을 다물 줄도 아는 여자였다. 입을 다문다라... 선유의 머리에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케줄을 알려 주시면 제가 작가님하고 감독님한테 전달을 해서 조율을 해드릴 수도 있구요.”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던 소민이 자신의 말에 아무 대꾸도 호응도 없자 말을 하다 말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소민의 시선에 그의 입이 겨우 벌어졌다.
“그거... 지금 결정해야 하나?”
“뭐, 꼭 그렇지는 않은데 가급적 빨리 결정해주시면 좋죠.”
소민의 말을 듣고 있던 선유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자 소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계약하시려구요?”
그 말에 선유가 뭐 헛소리야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지갑을 꺼냈다.
“지갑은... 왜요? 계산 안하셔도 돼요. 이거 제가 잡은 자리라서 제가 사는 거예요.”
“알어.”
“예?”
“보통 캐스팅 디렉터들이 그러더라고.”
“아... 그럼 지갑은 왜?”
선유가 그렇게 묻는 소민을 슥 한 번 쳐다보더니 지갑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혀 있던 하얀 종이를 꺼내더니 탁탁 소리 나게 펼치고는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무슨...?”
“각서야.”
“네?”
“내가 지난 번에는 깜빡하고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기회가 오네. 사인해.”
“뭘요? 무슨 각선데요?”
“뭐긴 뭐야? 촬영장에서 나 쓰러진 거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지.”
“그게 각서까지 써야 할 일이에요?”
“유비무환 몰라? 매사불여튼튼이지.”
“사람을 왜 그렇게 못 믿어요? 내가 얘기할 것 같았음 진작 했겠죠.”
“근데 사람 마음이라는게 잘 바뀌는 거잖아. 그 쪽 이 사람 저 사람 다 팬이라면서. 언제 내가 싫어져서 그걸 무기로 이용할지 어떻게 알아.”
선유의 말에 소민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막말로 지금 당장이라도 그걸 무기로 삼아 계약이라도 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 이내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그날 단순히 몸이 좀 안 좋았던 거 아니에요? 그걸 왜 그렇게 비밀로 해야 하는데요?”
“그것까지는 알 거 없고. 얼른 해, 사인.”
“제가 안하면요?”
“글쎄? 어떨 것 같아?”
선유의 말에 소민이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이걸 빌미로 계약 안하겠다고 나 협박하는 거예요?”
“나는 어떨 것 같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그 쪽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아니. 뭐... 변명을 하거나 정말 협박이라도 하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선유의 반응에 소민이 황당해하며 그렇게 말하자 선유가 정색을 하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평상시 내 이미지가 그런 거라면 내가 지금 몇 마디 변명한다고 그게 달라지겠어?”
“저기... 화났어요?”
“글쎄?”
“아니... 나는 그냥 좀 욱하는 마음에... 미안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도 선유는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아, 미안하다고요. 사인하면 되잖아요. 사인하면! 한선유씨도 나 못 믿으면서. 괜히 나만 나쁜 사람 만들고. 한선유씨 앞에 을인 내가 죄인이죠. 어휴!”
투덜투덜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민이 각서에 사인을 하고는 내밀자 선유가 언제 정색을 했냐 싶게 순식간에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
“헐. 완전히 속았네. 속았어. 왜 한선유씨가 배우 중에 탑이라고 하는지 알겠네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어.”
천연덕스레 그렇게 말하며 각서를 다시 지갑에 넣는 선유를 쳐다보던 소민이 다시 입을 뗐다.
“한선유씨 용건 끝났죠?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구요. 이 계약이...”
선유는 쉬지 않고 왜 한선유가 이 배역을 해야 하고 이 작품을 해야 하는지 열변을 토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름대로 괜찮은 아니 객관적으로도 꽤나 괜찮은 여자였다. 약간 그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태클 거는 것만 빼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알고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 사려깊음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외모가 별로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밀조밀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 속쌍커풀이 진 큰 눈에 경복궁 처마를 연상시킬만큼 오똑한 코, 그리고 한 번 맛보고 싶을 만큼 달콤해 보이는 입술까지. 저 입술을 맛보면 과즙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궁금증이 일자 눈을 돌리려 해도 왠지 그녀의 입술만 눈앞에 클로즈 업 됐다.
“듣고 있어요? 한선유씨?”
자신의 용건이 끝나자 또 딴 생각을 하는 것처럼 멍하니 그녀 쪽을 바라보는 선유의 앞에 소민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소민의 행동에 선유가 순식간에 뒤로 몸을 물렸다.
“뭐, 뭐하는 거야.”
“딴생각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집중해요. 집중. 계약과 관련해서 중요한 얘기하는데.”
선유의 행동에 진지한 표정으로 일갈한 소민이 몸을 뒤로 물렸다. 소민의 말에 선유가 흐음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중요한 건 그거 아니야? 내가 계약을 하나, 안하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네요.”
소민이 선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 소민에게 선유가 인심쓴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관상을 좀 보거든.”
“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봐줄게. 네가 날 캐스팅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네? 아니. 한선유씨 마음에 달린 거지, 그게 무슨 내 얼굴에 달렸다고 그래요.”
“뭐, 그렇게 생각하려면 그렇게 생각하든가. 이렇게 내 말 안 듣는데 내가 퍽이나 그쪽 말이 듣고 싶겠어?”
“아, 알았어요. 그래요. 봐요. 봐. 내 머리로는 한선유씨가 관상을 본다는 것도 안 믿기고, 내 얼굴에 한선유씨 캐스팅이 달렸다는 것도 안 믿기지만 보겠다면 봐요.”
그렇게 종알거리면서도 선유를 이길 수 없는 숙명적인 자신의 처지에 소민이 얼굴을 가까이 댔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뒤로 몸을 뺐다.
“괜히 헛수작 부리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헛수작? 헛수작 뭐?”
“예를 들면... 그... 키... 키...자로 시작하는 뭐 그런 걸 한다든가?”
지레 겁먹은 소민이 카사노바로 소문이 자자한 선유에게 그렇게 경고했다.
“내가 키스한댔어? 관상본댔지? 아, 됐어. 계약이고 뭐고 캐스팅이고 뭐고, 관둬. 이런 취급받으면서 무슨...”
“아아아아아! 아니에요. 자요. 자. 제 얼굴 여기 있습니다.”
선유의 말에 화들짝 놀란 소민이 마치 짜장면왔습니다라고 하는 중국집 배달원처럼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그렇게 말했다.
“눈이나 감아.”
“왜요? 관상 보는데 눈 감아야 돼요?”
“눈 모양 보게 감으라고.”
“나도 잘은 모르지만 원래는 뜨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종알거리면서도 소민은 선유가 또 안 한다고 할까봐 그러는지 얼른 눈을 감았다. 그로 인해 방 안에는 묘한 광경이 연출됐다.
온갖 진미가 차려진 상을 하나 사이에 두고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여자와 건너편에 앉아 그런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남자. 둘은 몰랐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느낄 수 있었을 묘한 기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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