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26화 (26/105)

26. 그래서 실망이에요?

26.

정체가 뭐야?라고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때 맞춰 문이 열리더니 사장이 들어왔다.

“오~ 벌써 오셨구만.”

소속사 사장의 등장에 그가 당황했다. 여자친구와 방에서 이야기만 하고 있다 부모님 등장에 잘못한 것도 없이 당황하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소민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만약 소속사에 들어가려는 것이라면 오히려 저 여자에게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았다.

선유의 소속사 사장인 백사장은 그런 쪽에서는 나름대로 깨끗하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사장의 시선이 소민 쪽을 향하자 그가 황급히 말했다.

“저 여자는 나랑 잘 모르는 사이야. 아마 내 팬인 것 같아. 내가 식당 들어오는데 마주친 것도 같아. 아마 사인해달라고 들어온 걸 거야. 방금 들어왔거든 방.금.”

평상시 뻔뻔하고도 싸가지 없는 선유이건만 지금 보이는 이상한 태도에 사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선유의 옆으로 가서 소민을 마주하고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채소민씨, 이렇게 직접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자신이 아닌 소민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장의 태도에 선유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이 그녀를 안다는 사실도 놀랄 노자인데 더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소속사 사장을 보고도 태연하게 인사를 하는 저 여자의 모습이었다.

언제 일어섰는지 반듯한 얼굴로 사장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선유를 사장이 발로 툭툭 쳤다. 일어나라는 신호내지는 어서 너도 인사를 하지 않고 뭐하냐는 채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유는 이 충격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소민을 바보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런 선유의 귀에 사장의 호령이 빗발쳤다.

“너 소민씨께 제대로 인사는 했어? 빨리 일어서지 못해?”

사장의 목소리에 그제야 엉거주춤 일어선 선유를 향해 봄 햇살같은 웃음을 입에 문 그녀가 단정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캐스팅 디렉터, 채소민입니다.”

선유의 머리가 그 안에서 누가 에밀레 종이라도 친 듯 뎅하고 울렸다.

“하하하하하. 죄송합니다. 우리 한배우가 가끔 세상 모든 여자가 자기 팬일 거라고 착각할 때가 있거든요.”

입은 웃고 있었지만 선유를 바라보는 사장의 눈은 “이 미친놈”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장의 눈빛을 받는 선유가 사장에게 보내는 눈빛도 만만치는 않았다. 사전에 귀띔이 없었기에 그 나름대로는 소민을 배려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선유와 사장의 신경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민이 꽃 같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러실만 하죠. 대한민국 탑배우신데요. 그리고 실은 저도 한선유씨 팬이에요. 그러니까 착각은 아니시죠.”

“이거 소민씨가 저희 한배우 팬이시라니 왠지 든든한데요? 간혹 좋은 작품 있으면 저희 기획사 한배우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 말씀을요. 저야말로 믿어주셔서 감사하죠. 저도 n기획사에 배우 분들께서 보여주시는 활약에 감탄하고 있는 걸요.”

소속사 사장과 소민이 훈훈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선유가 반은 자포자기한 듯 한 반은 기가 찬 듯 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그 생각만이 그의 온 머릿속을 꽉꽉 메우고 있어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가 있었는지 머리가 돌로 만들어진 건지 의심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럼 계약에 관해서는 저에게 일임해 주시고, 배우분과 캐릭터에 대해 그리고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 나눠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말해 놓고도 소속사 사장이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소민이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한 눈빛을 보냈다.

“아, 우리 한배우가 혹시 소민씨께 실례라도 할까봐서요.”

소속사 사장의 말에 소민이 더없이 온화해 보이는 어쩌면 마더 테레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실례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그리고 캐릭터에 대한 의견이나 계약에 대한 내용이 자유롭게 오가려면 한선유씨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계약내용이나 서류는 나중에 사장님께 다시 한 번 더 상의 드릴게요.”

소민이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로 사장을 안심시키자, 사장이 조금은 마음이 놓인 듯 한 표정으로 룸에서 나가고 소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장이 가거나 말거나 선유는 그녀의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꽤나 충격이 심했던 모양인지 선유는 평상시의 싸가지를 조금은 내려놓은 모습이었다.

소민은 조용히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댁이 캐스팅 디렉터라고?”

산책 갔던 정신이 겨우 돌아왔는지 그가 그렇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미소와 함께.

“김제운도...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선유는 제운과의 친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그도 그녀가 캐스팅했던 사람이거나, 이 바닥에서 알게 된 사람 중 하나겠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온 자신은 몰랐지만 꽤 유명한 사람인 듯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게 다!!! 그녀의 직업 때문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내 팬은 맞아?”

“아까 못 들었어요?”

“그럼 팬들이 날 부르는 애칭 중에 1위에 꼽힌 애칭인 미.동이 무슨 뜻이야.”

“미.동이요?”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선유가 던진 질문에 소민이 끙끙대며 머리를 쥐어 싸매고 팬카페에서 봤던 글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소민이 주문한 음식이 다 나올 때까지 머리를 쥐어 싸매도 생각나는 거라곤 미.싸와 냉동인간 뿐이었다.

아마 미.싸가 ‘미안하다 싸가지다’의 약자였었지?

얼마나 싸가지면 팬들마저 그렇게 애칭을 지었을까 생각했던 기억 때문에 그 별칭들만 기억에 남았었다.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입술을 보던 선유의 미간이 순간 꿈틀거렸다.

“솔직히 말해. 너 내 팬 아니지?”

“팬은 맞아요!”

“내 팬이라는 사람이 미친 동안 혹은 미동도 없는 동안얼굴의 약자인 미.동을 모른다고? 너, 사실은 내 팬이 아니지?”

그의 말에 입술을 꾹 한 번 깨문 그녀가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대답했다.

“팬은 맞아요. 저는 제가 캐스팅 작업을 들어가는 모든 배우에 대해서 팬이거든요.”

앞 문구만 듣고 붕 뜨려던 기분이 뒷말로 인해 물에 젖은 머리처럼 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모든 배우?”

“네. 모든 배우요.”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걸 잡팬이라고 불러.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거. 결국 아무의 팬도 아니지.”

자신을 잡팬이라 칭하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내려가는 입 꼬리를 의지로 끌어올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그런데 비빔밥에 나물이 여러 개 들어간다고 해서 비빔밥이 아닌가요? 원래 비빔밥은 그렇게 먹는 거예요. 여러 배우를 좋아한다고 해서 팬이 아닌 건 아니죠.”

그녀의 말에 그가 입을 꾹 다물고는 턱을 괸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밝힌다는 정체가 캐스팅 디렉터였어?”

어딘가 약간은 허탈한 듯 한 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아니. 난 뭐 재벌집 딸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무난한 직업이길래.”

그 말에 소민이 물컵을 집다가 멈칫하고는 물었다.

“그래서 실망이에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