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25.
“김준영! 또 왜!! 비밀번호 알면서 벨은 왜 누르는데!!”
짜증을 부리면서도 뜬금없이 예의를 지키는 게 누구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인가 싶어서 현관으로 가 문을 여는데 문 앞에 인물은 예상 외의 인물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선유를 바라보며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달싹였다.
“좀 들어갈까?”
여유롭게 선유를 제치고 들어가려는 여자를 퍼뜩 정신이 든 그가 제지했다.
“꺼져.”
“심한 말을... 오랜 만에 보는 건데 반가워해야지. 전화도 안 받고.”
“대문은 어떻게 들어왔지?”
요새와도 같은 그의 집에 들어오려면 대문을 들어오는 키부터 있어야 했다. 그런 그의 집을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거야 뭐.”
하긴 이미 여기까지 들어온 걸 되돌릴 수도 없었다. 되돌릴 사람도 아니었고.
“용건만 말하고 꺼져.”
“너무하네. 이렇게 입구에만 세워 둘 거야?”
여자의 말에도 선유는 흔들림 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낮은 소리로 내뱉었다.
“말했을 텐데. 내 구역은 침범하지 말라고.”
“아직도 어린 애 같은 구석이 있어. 금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는 말하는 초등학생들 말이야.”
“용건이 그거라면 알고 있으니 꺼져.”
“그게 용건일리 없잖아. 빨리 다음 작품 해야지?”
그 말에 선유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었다.
“내가 알아서 해.”
“네 문제가 내 문제기도 하니까 하는 소리지.”
“알아서 한다고 했을 텐데? 당신이 원하는 것만 지켜주면 상관없는 문제잖아.”
“아, 그래서 말인데.”
그렇게 말한 그녀가 그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코를 자극하는 향수냄새에 선유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도 언제까지 외모만으로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든든한 보험 하나 정도 들어둬야지. 재벌 집 사모들이 너한테 관심이 많던데...”
“꺼져. 두 번 다시 이 집에 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나한테서 더 이상 얻지 못할 거라는 거만 알아둬.”
“어머, 무서워라. 근데 네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네 유일한 혈육인 나를? 그럼 오늘은 돌아가줄까? 스트레스 받아서 미간에 그렇게 주름 잡히면 네 잘생긴 외모도 금방 망가질테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가 선유의 볼에 입술을 살짝 닿았다 떼며 말했다.
“그럼, 또 보자.”
자신이 보는 앞에서 거칠게 볼을 닦는 선유를 보면서도 싱긋 웃은 그녀가 사라지자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선유가 주륵 무너져 앉았다.
“왜 난 포기를 모르냐. 등신같이.”
허탈하게 중얼거린 선유가 아까보다 더 지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
준영은 약속시간에서 단 30초도 늦지 않고 정확한 시간에 나타났다. 준영이 늦게 오기라도 했으면 준영을 핑계로 어깃장이라도 놓을텐데 그마저도 뜻대로 되질 않았다.
“하여간에 도움이 안 되는 놈.”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억지로 억지로 차에 몸을 실었고 그런 선유의 불만 섞인 말을 가뿐히 무시한 준영이 말을 걸었다.
“걱정이 좀 되긴 하셨나봐요? 얼굴이 까칠하시네요?”
“배우 얼굴이 까칠해서 좋냐?”
“그럴 리가요. 가는 동안 좀 주무시죠.”
준영의 말에 선유가 뻑뻑한 눈을 감았다. 복잡한 머리 탓에 차에서도 잠을 잘 수는 없겠지만 눈이 더 빨개져서 호러영화를 찍기 전에 눈은 쉬게 해줘야 했다.
“형님. 예약 제 이름으로 해놨으니까 들어가세요. 저는 사장님이 또 시키신 게 있어서 다녀올게요.”
“뭐?”
“그럼 형님 나중에 봬요.”
그렇게 말한 준영이 매연만 남기고 사라지자 홀로 남은 선유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식당 안으로 옮겼다.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그를 종업원이 요상하게 바라봤다.
“김준영이요.”
“아, 예약하셨네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안내를 받아 룸으로 들어간 선유는 안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혼자 멀뚱멀뚱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올 때까지 기다린다던 사장은 연락도 없고 시계 바늘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렸다. 한참을 기다린 선유도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자기가 약속 잡아놓고 자기가 늦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사장이 언제 올지 창밖으로 주차장 쪽을 자꾸 바라보던 그의 눈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소민은 요근래 선유를 만날 때면 익숙하게 찾아오던 약간은 답답한 가슴을 어떻게든 뚫어보려 들숨날숨을 반복하고 있었다.
일전에 팬 사인회에서 본인의 잘못이 있어 기사를 막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유의 매니저인 준영은 그녀에게 거듭 고맙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라면 왠지 간이라도 빼줄 기세였다.
“나야, 고맙지 뭐.”
오늘만 해도 그랬다. 준영에게 부탁하자 그는 빠른 시일로 잡겠다고 하더니 정말 순식간에 약속을 잡아줬다.
뭐, 준영이 한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형님한테는 소민씨 나오신다고 말씀 안 드렸어요. 데면데면한 사람과 만나는 거 워낙 안 좋아하시는 분이어서요. 이해하시죠?”
이해하다마다였다. 얼굴이 조금 익어도 쌀쌀맞게 대한다는 걸 그간 겪어본 터였다.
“그나마도 내가 전화했으면 약속도 못 잡았을 걸, 뭐.”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한 차례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방 안에 앉은 선유의 시선은 여전히 익숙한 자동차, 정열적인 빨간 스포츠카에 꽂혀 있었다. 자신의 팬이라던 그 여자가 끌었던 차와 같은 차였다.
“뭐야? 저 차가 이렇게 흔한 차였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긴 했나보네. 저 비싼 차를 요새 자주 보는 걸 보면.”
기다림에 지쳐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며 나름대로 시사적인 소리를 하고 있는데 차보다도 더 익숙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빨간 스포츠카에 잘 어울리던 그 여자, 채소민이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짧은 치마에 힐을 신고 총총거리며 뛰는 폼이, 아니 좀 솔직히는 그녀가 이곳에 온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뭐야? 설마 김제운도 여기 온 거야? 둘이 같이 점심 먹으러 온 건가?”
룸 안에 있는 그가 밖이 보일 리 만무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하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주변을 둘러보던 선유가 불현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왠지 초조한 몸을 벽에 기댔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여는 소리가 나자 사장이 왔나 고개를 돌리는 선유의 눈보다 먼저 귀가 도착한 사람을 알아 차렸다.
“안녕하세요.”
청량하리만큼 상쾌한 느낌이 드는 여자의 목소리가 먼저 그에게 다가온 까닭이었다. 뒤늦게 돌아간 눈이 목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 선 사람 아니 그녀, 채소민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가 있는 룸 입구에서 그를 보며 서 있는 소민의 모습에 선유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저 여자가 대체 여긴 무슨 일일까?’
“다른 사람을 보러 온 거면 룸을 잘못 찾아 왔는데?”
뇌를 차지한 생각은 금세 입 밖으로 나왔다.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에 그녀가 웃음을 머금고는 방으로 들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오늘 한선유씨 뵈러 온 건데요, 저.”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머릿속에 오늘 자신이 사장과 약속이 있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그녀가 여기 어떻게 왔는지 불쑥 의심이 들었다.
“그 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