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오지랖도 넓네
24.
요 며칠 선유의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조한 컨디션 탓에 게스트로 나간 쇼프로그램에서는 무슨 딴생각을 그렇게 해대는지 사회자의 질문에 뜬금포를 수차례 날려댔다. 덕분에 뜬금포 매력남이란 또 다른 칭호가 생기긴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준영의 입장에서는 그저 조마조마한 시한폭탄일 뿐이었다. 게다가 왜 그러는 건지라도 알면 마음이 좀 놓일텐데 굳게 다문 조개처럼 도통 입을 열지를 않았다.
대체 영화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날 이후로 저 상태였고, 이런 상태는 거의 없는 일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더욱 답답할 노릇이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준영이 울리는 벨소리에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알려드렸던 건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어요.”
상대방의 답변에 준영이 기억을 더듬느라 잠시간 말이 없다가 이내 답변했다.
“원래는 싫어도 웬만하면 참는 분이신데 그 날은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못 견디겠다고 가자고 하셔서 일찍 나왔어요. 네. 네.”
준영의 말에 상대방이 또다시 뭐라고 말을 하자 준영이 흐음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스케줄러를 꺼내 눈빛으로 빠르게 달력을 훑었다.
“다음 스케줄은... 나흘 뒤에 화보촬영이요.”
그 말에 또 상대방이 뭐라고 얘기를 하자 준영이 펜으로 옆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전에요? 네. 잡아볼게요. 그럼.”
준영의 말에 상대방이 감사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
선유는 생각만 하면 자꾸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 날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던 소민의 모습과 더 환하게 웃던 김제운의 얼굴, 그리고 그의 말이 자꾸만 꿈에 나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꿈에서 자신이 김제운에게 고백하고 제운이 “할게요. 남자친구.”라고 답하고, 옆에서 그 여자 채소민이 축하해주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악몽을 꿨을까.
“꿈은 현실과 반대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멍하니 또 벽을 쳐다보던 그가 무언가 생각난 듯 후다닥 스마트폰을 들어 인터넷을 검색했다.
“열애설이 안 난 이유가 뭐야? 아니 다스패치는 뭐하는 거야? 그 날 그렇게 기자가 많았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김제운의 열애설을 검색했지만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면서도 찜찜하고 더러운 기분이 드는 이유를 선유는 알지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소민을 찾아가 사실여부를 묻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과 그녀가 타고 다니는 차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멍청이. 알면 또 어쩔 건데? 그걸 묻는 네가 이상한 놈이지. 안 그래?”
소파로 푹 가라앉던 그가 다시금 발딱 일어났다.
“아니지! 촬영을 같이 한 후배가 갑자기 열애설이라도 터져봐. 몰랐던 내가 이상한 놈 될 걸? 물어 봐야겠어!”
그렇게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섰다가 그는 도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묻기는 뭘 물어. 오지랖도 넓네.”
결국 도로 소파에 얌전히 앉은 그가 짜증스런 기분에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는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다.
“이름 불러주면 나한테도 좀 웃어주려나.”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입 밖에 새어나온 말에 그가 누운 채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 그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미소가 탐이 나는지 알 수 없는 마음과 다른 사람들은 잘만 부르는 이름을 부르기 어려워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빠진 그를 벨소리가 불러냈다. 손을 뻗어 폰을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지도 않고는 다시 폰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놨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그를 지금의 상태로 만든 원흉이 쉬지도 않고 그를 옭아매려 했다. 지겹게 울려대던 벨소리는 몇 번 더 반복 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삑삑삑삑삑 삐리리리리’
번호 키 소리가 나더니 발걸음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형님.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익숙한 준영의 부름에 선유가 눈을 떴다.
“전화했었어?”
선유가 팔을 뻗어 폰을 확인하자 다른 번호와 함께 준영의 번호가 여러 차례 교차로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휴, 일단 어디 아프신 건 아니니까 됐어요.”
“왜?”
시큰둥한 선유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준영이 선유의 옆에 앉아 말했다.
“사장님이 내일 점심 좀 같이 드시자고 하셨는데요.”
“안 먹는다 그래.”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준영아, 방금 그 멘트 어디서 많이 듣던 멘트 같지 않냐?”
“뭐...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래. 그럼 사장이 여자냐 남자냐.”
“형님 갑자기 왜 그래요? 백대표님이야 당연히 남자잖아요. 그 얼굴의 여자면 끔찍하죠.”
정말 싫다는 듯 준영이 진절머리를 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근데 지금 그 멘트가 가당하냐? 가당해?”
자신의 답에 소파쿠션으로 구타하는 선유의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 보였지만 그에 굴할 준영이 아니었다.
“아니. 친구끼리도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잖아요.”
“백대표랑 내가 친구로 보이냐?”
“아니요. 갑을관계죠.”
“예리한 놈. 그래, 갑을 관계지. 근데 지금 그 말이 나와?”
“그러니까 더더군다나 가셔야죠.”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대표님이 갑이니까요. 솔직히 계약 파기하면 형님이 더 손해잖아요.”
그 말에 선유가 끙하는 신음을 흘렸다. 준영의 말이 틀린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힐끗 자신의 손에 들린 폰을 한 번 내려다 보는 선유를 준영이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12시에 청기와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11시10분까지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의 답을 기다리는 듯 앉아 있는 준영을 향해 선유가 미간을 곱게 접어보았지만 그게 통할 리 없었다.
“어쨌든 나가야 한다면서. 내 대답은 뭐하러 들으려고 앉아 있냐?”
“형식적인 절차죠.”
얄밉게도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렇게 말했고 선유는 결국 체념이 섞인 고갯짓과 함께 물었다.
“왜 보자는 건데?”
“나가보시면 알겠죠.”
“힌트만 줘. 마음에 준비라도 좀 하게.”
“마음에 준비 같은 거 필요 없으신 분이 무슨.”
“야!”
깐족깐족 그렇게 말하던 준영이 선유의 고함에 찔끔하더니 결국 나름대로의 힌트를 던져주었다.
“요 근래 일 잘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는 선유를 보며 자신이 너무 큰 힌트를 준건지 잠시 고민하던 준영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준영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선유는 계속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고 그런 선유를 뒤로 하고 준영이 그의 집을 나왔다.
선유의 집을 나서 골목에 주차해 둔 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어딘지 낯익은 얼굴이 준영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를 과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패션계의 이단부인이라도 되는 것인지 온통 금은보화로 치장한 여자였다. 저런 얼굴을 대체 어디서 봤을까 고개를 갸웃한 준영이 이내 차에 타면서 그 여자를 잊었다.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네. 사장님. 눈치는 못 챈 것 같구요. 전달은 했습니다. 네. 네.”
통화를 마친 준영의 차가 선유의 집 골목을 떠났다.
한편 쇼파에서 고민에 고민을 하던 선유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하다보면 슬럼프도 오고 할 수 있지 세상에 어느 누가 항상 베스트 컨디션일 수 있어? 혼내려고 부르는 거야? 아니 혼내려면 사무실로 부르던가. 미운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건가?”
일식집으로 자신을 부른 사장의 의중을 헤아려보려 노력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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