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 사람, 내 남자야.
제운과 소민은 자신들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돌아봤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빛이 나는 듯 한 그의 얼굴에 소민이 저도 몰래 흡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런 소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유의 눈은 제운만을 향했다. 낮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김제운씨. 여기가 당신 집 안방인가? 다른 선배 분들도 계신데 영화제에 집중하지. 영화인으로서 영화제에 왔으면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다음 순간 선유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소민이 그의 눈을 바라 봤다. 눈을 내리 깔은 채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어조는 차가웠지만 눈빛은 뜨거웠다.
“그리고 그 쪽도 마찬가지야.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게 행동했으면 하는데? 영화제에 왔으면 시시덕거리지 말고 영화제에 집중해.”
그렇게 말한 그가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기자 소민이 숨을 파아하고 내쉬었다.
“괜찮아요? 소민씨?”
제운이 멀어지는 선유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말하자 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향해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분위기를 흘리면서 그렇게 말하는 그는 섹시했다.
맙소사, 혼나면서 그가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두뇌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선배 말이 틀린 건 없어서 뭐라고 못하겠어요. 소민씨랑 얘기하는 게 좋아서 생각없이 얘기하다 소민씨까지 혼나게 만들었네요. 미안해요.”
제운이 속닥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소민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저도 생각이 짧았는 걸요, 뭐. 이제 영화제에 집중해요.”
영화제에 집중하자고 제운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통 영화제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씨. 또 그 쪽이라고 했어.”
그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혼내 자존심이 상한 것보다도 그게 더 신경이 쓰인다니 기가 막혔다.
‘난 여자 이름은 안 불러.’
라고 말했던 그의 말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일어 당장이라도 가서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또 시시덕거린다 그래.”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선유가 앉은 테이블을 흘긋 쳐다보자 그의 시선이 그녀를 마주했다.
그리고 마주친 시선을 도대체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 문득 아까 이 곳에서 축하공연을 하던 일전에 선유의 차 안에 타고 있던 그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어차피 연인사이잖아요.’
그 여자아이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얼음물이라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이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듯 그토록 뿌리치기 힘들던 그의 눈빛을 뿌리치게 된 그녀가 무릎 위에 모아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 아이돌은 이름으로 불러줄까?”
그렇게 말한 그녀가 순간 답답한 마음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선유의 자리를 봤을 때는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영화제에 집중하랄 때는 언제고.”
그렇게 낮게 중얼거리는데 제운이 그녀를 향해 걱정스런 시선을 두자 그녀가 그런 제운을 안심시키기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시끄러운 머릿속을 무시하며 아직 한창 영화제가 진행 중인 앞을 바라봤다.
*
“두고 봐!! 내가 당신 꼭 후회하게 만들 거야!!”
씨근덕대며 돌아서는데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아, 뭐...”
그렇게 말하던 퀸의 입이 순식간에 닫혔다. 이내 꾸벅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인사에도 앞에 선 여자는 고개만 까딱할 뿐 말이 없었다. 그저 퀸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여자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인 퀸이 발길을 옮기려 할 때였다. 다시 퀸의 앞을 막아서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너...”
“네?”
“네가 퀸이지?”
“아, 네. 맞아요. 저, 언니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들뜬 듯 말하는 퀸의 그 말에 앞에 선 여자, 지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정말 예쁘신 것 같아요. 언니.”
“내가 언제 봤다고 네 언니야.”
“네?”
반문하는 퀸의 물음에 지유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표정을 보이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말해 봐. 내가 네 언니야?”
“죄송합니다.”
지유의 기에 눌린 퀸이 사과를 했지만 지유의 기세는 쉬이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건 넘어간다 치고. 너... 성형했니?”
지유의 말에 퀸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괜찮아. 원래 이 바닥이 다들 한 두 군데씩은 손 보더라고. 전신 뜯어 고친 건 아닐 거 아니야. 안 그래?”
비아냥이 가득한 그 말투에 퀸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 미안. 전신이었나보네.”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지유가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복도에는 세찬 마찰음이 울렸다.
‘짜악!’
붉게 손자국이 남은 볼에 손을 얹은 퀸의 시선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손톱을 살피는 지유에게 가 닿았다.
“지금... 이게...”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 상황에 지유는 태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네가 방금 껄떡거리다 두고 보라고 한 그 남자.”
지유의 눈에 순간적으로 표독스러움이 담겼다.
“네 까짓게 껄떡거릴 그런 남자 아니야. 네가 두고 볼 남자도 아니고. 그 사람, 내 남자야. 몇 년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알아 들어?”
지유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자 퀸이 질끈 눈을 내리 감았다. 하지만 그 손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려왔다.
퀸의 어깨를 토닥인 그녀가 그녀에게 다가서 귓가에 속삭였다.
“이건 경고야. 내 남자한테 헛소리, 헛짓거리 하지 말라는 경고. 그러니까 잘 새겨들어.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날테니까.”
그렇게 말한 지유가 고개를 떼더니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다음에 만나면 언니라고 부르고. 알았지?”
얼이 나가 있는 퀸을 뒤로 한 지유가 선유가 향한 영화제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 테이블에 앉아서도 한 곳을 바라보는 선유의 시선이 들어왔다.
“하나 퇴치했다고 생각했더니 정작 퇴치해야 할 건 따로 있는 모양이네.”
그렇게 중얼거린 지유의 시선의 끝에 제운과 함께 앉아 있는 소민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얼굴을 확인한 지유가 선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오빠. 나예요. 차 준비해줘요. 집에 가야겠어요. 몸이 안 좋네요. 그리고... 하나 알아봐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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