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할게요. 남자친구
처음엔 사람이 워낙 많은 터라 눈치 채지 못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가 무심의 극치라 하더라도 사람이 벽처럼 둘러 있는 곳을 모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모두의 이목을 받으며 있는 건 다름 아닌 토끼탈녀, 채소민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그의 기름한 눈이 원모양이 될 것처럼 둥글게 커졌다. 그녀의 주변에는 온갖 배우들 여자건 남자건 할 것 없이(그래도 남자가 더 많았기에 선유의 눈은 묘하게 짜증이 담겼지만) 모여 있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전혀 기가 죽지도 꿀리지도 않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있었다.
영화제에 누구의 초대를 받아 온 것인지 영화제에 맞게 은은하게 톤다운 된 민트컬러에 튜브탑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그 의상을 무리 없이 아니, 어느 누구보다 빛나 보일만큼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한쪽으로 낮게 묶은 찰랑거리는 굵은 웨이브까지도 스타일링의 일부로 그녀를 더욱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의 마음속의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연예인도 아닌 그녀가 여길 온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그의 시야에 김제운이 들어왔다.
“아까 촬영장에서도 둘이 붙어 속닥대더니 여기서도 또 붙어있는 거야?”
제운이 다정한 얼굴로 소민을 향해 걸어가더니 미소 띈 얼굴로 대화를 했다. 그리고 그런 제운을 향해 소민도 상큼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 왠지 기분 나빴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는데 무슨 비밀 이야기가 또 있는지 그가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소민은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와 자리를 떴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선유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한쪽 으슥한 구석으로 간 까닭에 그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선유가 서 있는 코너에서 목소리는 들렸다.
“생각해보셨어요?”
소민의 목소리가 나고 곧이어 제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생각이 빠르게 끝나셨네요?”
“원래 소민씨 앞에서는 제가 생각을 빨리 끝내는 편이잖아요. 어느 분 말씀인데 거절하겠어요.”
웃음기를 담은 그녀의 목소리가 제운에게, 그리고 몸을 숨긴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선유에게까지 닿았다.
“그래서, 결론은요?”
“할게요. 남자친구.”
수락의 의미를 담은 그의 말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선유는 순간,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를 타고 11M상공에서 뚝 떨어지던 기분을 느꼈다.
그들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그가 황급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영화제 중간 중간에 여자 아이돌 가수들이 나와서 축하공연을 했지만 선유의 뇌리에는 소민과 제운의 얼굴, 그리고 “할게요. 남자친구.”라는 말이 온통 가득해 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건 오지랖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아니 물을 필요도 없이 명료한 의미의 대사였다.
타는 듯 한 갈증에 연거푸 물을 들이키던 선유는 끝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영화제를 살짝 빠져나와 바깥으로 향했다.
“오빠.”
한참이나 바람을 쐬다가 다시 영화제가 진행중인 곳으로 돌아오는 길, 몇 몇 스텝만 간간이 지나가는 복도를 걸어가는 그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돌아보자 일전에 자신의 자동차에 올라탔던 예의 그 아이돌이 서 있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뭐? 나 아까 축하공연 했잖아. 왜 이제 와서 모른 척이야. 아까 나만 보더니?”
그럴 리가. 그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저 다른 생각을 하며 무의미하게 던지던 시선의 끝에 이 여자애가 있었으리라.
애써 식힌 머리가 다른 생각에 미치자 다시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를 모르는 여자아이는 그의 옆에서 끊임없이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지난 번에 날 거절한 게 아쉽긴 했지? 사실은 나 안 싫어하면서.”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그가 무감한 표정으로 내려 봤다.
단순히 내려 본 것 뿐인데 얼굴이 붉게 물든 그녀가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 보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앞트임, 뒤트임, 쌍커풀, 애교살 400. 코 300, 양악 900. 뭐 기타 등등하면 몸에 한 돈 이천 들였겠네.”
그의 대사에 화들짝 눈을 뜬 그녀가 아까와는 다른 빛깔로 얼굴을 물들였다.
“그, 그게 뭐 어때서. 예뻐 보이려고 한 건데. 그게 뭐!”
“그래. 그게 뭐. 난 그냥 널 보고 견적을 읊었을 뿐인데. 내가 너무 정확했나?”
그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 봤다.
“그게 뭐 어떠냐고 말하면서 그렇게 흥분하는 건... 스스로 그걸 창피해 한다는 뜻인가?”
그의 말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쏘아봤다.
“아니. 오빠는 연인인 내가 이래서 창피해?”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는 말했다.
“대단하네. 요새는 성형하면 얼굴에 철판도 같이 시술해주나?”
“지금 뭐라고!”
“드라마에 감정이입하는 건 좋지만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말했었는데. 머리가 나쁜 건가?”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잖아.”
그녀의 말에 선유가 자꾸만 구겨지려 하는 미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물론 그렇긴 하지. 근데 취향은 확 바뀌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내 취향은 몸에 이천만원 들인 사람은 아니거든.”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선유가 그녀를 지나쳐가자 여자아이가 선유의 뒤에 대고 악을 썼다.
“두고 봐!! 내가 당신 꼭 후회하게 만들 거야!!”
그녀의 말에도 그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그런 그였는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던 도중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제운의 테이블에 함께 앉은 여자. 채소민 때문이었다. 둘은 영화제 중인데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머리를 맞대고 소근거리고 있었다. 한참이나 지켜보던 선유의 발걸음이 절로 제운과 소민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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