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둘이 사귄단 말이야?
미안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는 또 집요하게 그렇게 물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소민이 씨익 웃고는 말했다. 어디 한 번 마음껏 추측해 보란 듯이.
“얘기하지 않을래요. 말했잖아요. 연예인보다 더 비밀이 많은 게 여자라고.”
그리고는 그녀는 뭐라 더 이야기하려 입을 여는 그를 뒤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컷! 오케이!”
감독의 컷소리와 함께 선유와 엉켜있던 배우 하나가 황급히 떨어져 나왔다. 아까 소민과 이야기를 나눴던 제운이었다.
“선유씨, 방금 감정 아주 좋았어.”
감독의 칭찬에 선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고, 제운은 그런 선유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연기라고? 그건 누가 뭐래도 연기는 아니었다. 그냥 감정 그 자체였다. 뭔가 억하심정이 있는 사람처럼 선유는 자신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함께 뒹굴었다. 만약 정말 저게 연기라면 그는 지금 당장 칸으로 가야할 사람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선유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코디가 자신에게 건넨 생수병을 들더니 제운에게 건넸다.
“아, 괜찮은.”
“마셔.”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낮은 목소리에 제운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에게서 물을 받아들었다.
물을 마시는 제운을 선유가 찬찬히 훑었다. 몰입을 하다 보니 좀 격하게 대한 것이 못내 걸렸다.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몰입 하게 된 까닭에 안 그래도 극 중에서 적대 관계인 제운을 미워하는 감정이 평소보다 좀 더 격해졌다. 그래도 제운의 상태가 멀쩡한 듯 보이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선유가 자신이 왜 몰입을 하게 됐는지가 떠오른 순간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아까 무슨 얘길 했지?”
“무슨...?”
“그 여자랑 무슨 얘길 한 거야.”
그 여자라니? 그 여자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제운의 뇌리에 소민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소민씨요.”
친밀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제운의 목소리에 선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유의 태도에 제운이 흐음하고 뭔가를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선배님하고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나랑 비슷하다? 나랑 뭐가 비슷하지?”
선유의 물음에 제운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답했다.
“여러모로 비슷하죠.”
그와 비슷하다니? 뜬구름을 잡는 듯 한 답변에 선유의 미간이 구겨졌지만 제운은 순순히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슨 목적으로 만나는 건지 대신 다른 걸 묻기로 한 선유가 제운을 보며 물었다.
“둘이 친한가?”
“친하다... 친한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많이 좋아하는 분이에요.”
“무슨 의미지?”
선유의 물음에 제운이 싱긋 웃었다.
“그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논점을 벗어나 빙빙 도는 답변에 선유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답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계속 묻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알겠어. 가 봐.”
그 말투에는 묘한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순식간에 선유가 제운에게 움직이도록 허락을 하는 것이 당연한 듯 한 분위기가 흘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인 제운이 자리를 떴다. 제운이 사라진 자리에 홀로 있던 선유는 가라앉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나갔나?”
제운의 말은 암묵적인 긍정, 그러니까 스캔들의 긍정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둘이 사귄단 말이야? 그런 분위기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물론 친한 듯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소민의 입장에서는 봤을 때 그냥 친숙한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느낌이 있다면 제운의 눈빛이었다.
“뭔 여자가. 연예인보다 비밀이 많다더니 아주 양파네. 까도 까도 알 수가 없어.”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라면 소민은 그에게도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다는 말이 됐다.
“대체 정체가 뭐야?”
소민의 정체가 무엇일지 골똘히 생각하는 그의 상념을 방해하려는 듯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그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받지도 않을 전화를 들고는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형님!!”
어느새 다가온 매니저 준영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있던 그를 불렀다.
“형님, 다음 촬영씬은 장소 이동해야 하는데 거리가 있어서 오늘 바로 촬영 못한대요. 오늘은 그만 들어가시라는ㄷ”
“그럼 집으로 가.”
“물론 그러면 좋겠는데 사장님이 그러면 딴 데 새지 말고 영화제로 가시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준영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쉴 틈을 안 주네. 쉴 틈을 안 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
“뭐? 치근대? 하! 나 기가 차서! 아니 남자들이 나한테 치근대면 치근댔지, 어디 내가 그러게 생겼냐고.”
한참을 분에 못 이겨 씨근덕대던 그녀가 어딘가로 전화를 한 통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저녁 영화제에 저도 갈까 하는데 혹시 오시나요?
네. 알겠어요.”
상대방과 몇 마디도 안 나눈 그녀가 허락을 받고는 씨익 웃었다.
“감히 날 꽃뱀 취급하셨겠다? 꽃뱀이 아니라 꽃이란 걸 보여주겠어.”
그렇게 말한 그녀가 룰루랄라 콧노래와 함께 변신을 시작했다.
영화제에 도착한 선유는 레드카펫과 플래시 세례를 지나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며 안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서로의 영화를 보고 평가하고 상을 받고 인사하고 축하를 나누는 이 지겨운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장의 조치가 고마웠다. 아까의 짧은 전화통화이후로 오늘은 생각을 다른 곳으로 바꿔줄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필요했다.
그리고 오늘 그의 그런 바람은 아주 확실하게 이뤄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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