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원하는 게 뭔데?
준영은 묘하게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선유의 안색을 살폈다. 자신이 소민의 꿈에 등장한 사실을 알 턱이 없는 그는 한 없이 침침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앉아 있었다.
원래도 친절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러고 있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준영은 좌불안석이었다.
“형님, 어디 불편하세요?”
“운전이나 해.”
돌아오는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이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아니, 몹시 불편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선유는 자신이 왜 기분이 나쁜 것인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게 잘 안 돼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고 있는 중이었다.
껌딱지처럼 따라 다니던, 아니 눈 돌리는 곳마다 짠하고 나타나던 그 여자의 행방이 며칠째 묘연했다. 마치 내가 언제 너를 쫓아다녔냐고 항변하는 것만 같은 이 상황이 그의 기분을 묘하게 뒤틀리게 만드는 참이었다.
“설마 내 약점을 알았다고 빠순이질을 그만 둔건가?”
수많은 이유로 팬이 늘었다 떨어졌다 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그 여자가 그렇다고 하니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냥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또 어디서 식판 닦고 있는 걸 거야.”
억지로 억지로 그렇게 생각한 그가 촬영현장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억지 주장이 단지 억지임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지금, 저 여자가 누구를 쓰다듬고 있는 거야?”
“어? 채소민씨?”
“저 여자를 네가 어떻게 알아?”
선유의 말에 준영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대충 둘러댔다.
“제가 명색이 형님 매니저인데 주변에 가끔 출몰하는 사람의 신상정도는 아는 게 기본 아니겠습니까? 아하, 아하하하하하!”
“너 지금 되게 수상해. 나 촉 되게 좋아.”
“그럴 리가요.”
준영의 말을 대충 뒤로 하고 그가 눈을 돌린 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의 가슴을 더욱 무언가 들끓는 상태로 만들었다. 만약에 가슴에 솥이라도 걸어놨으면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라도 나게 할 만큼.
*
“그림 좋네?”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착 가라앉은 그렇지만 빈정거림이 가득한 말투가 등 뒤로 날아왔다. 해변을 거니는 커플에게 나타난 깡패가 던질 만한 대사가 던져졌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괜찮은 목소리 아니, 솔직히 꽤나 근사한 목소리가 그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돌린 소민의 눈에 역광을 받으며 선 선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눈부신 역광에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좋은 시간 방해받아서 짜증이 좀 나시나?”
무언가가 베베 꼬인 듯 나오는 대사마다 삼류 날건달 같은 멘트였다. 뭔 생각인지 참 가늠하기 힘든 남자였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말을 똑같이 따라하는 그의 모습은 심통 그 자체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아무튼 제운씨, 잘 생각해보고 연락주세요.”
“네. 꼭 연락드릴게요.”
원래도 친절하다 소문나긴 했지만 얼굴 가득 미소를 퍼뜨리며 말하는 제운의 모습, 그 대답, 그리고 그 묘한 대화에 선유는 더더욱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랬다. 목례를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뜨는 그녀를 따라간 것은.
“너 뭐야?”
“뭐냐니요?”
“연예계 모든 남자한테 꼬리라도 치고 다니는 거야?”
“내가 꼬리가 어디 있어요.”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대답하며 걸음을 재촉하는 소민을 그가 단번에 잡아 세웠다.
“이렇게 남자들한테 접근하는 이유가 뭐야?”
갑자기 자신을 세운 것으로도 모자라 팔을 움켜쥔 그의 손아귀 힘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남자에게 접근하다니 이 무슨 개미핥기가 개미 집 지어주는 소린지.
선유는 선유 나름대로 열이 받을 대로 받아 있었다.
자신의 팬이라고 생각한 여자가 며칠 만에 나타난 것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었다. 팬이라고 해도 자기 생활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자신의 팬이 이 남자 연예인 저 남자 연예인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생각하니 뭔가 분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내가 남자들한테 접근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본 바로는 그래. 왜 자꾸 치근대는데?”
“지금 뭐라 그랬어요? 치근?”
“아니야? 목적이 뭐야?”
선유의 말에 소민이 입을 떠억 벌렸다.
“원하는 게 뭔데? 너도 뭐 소속사라도 필요해? 연줄이라도 닿아 들어가고 싶은 거야?”
그의 말에 소민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연줄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우리 소속사에 얘기해 줄테니까.”
이제껏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먼저 해본적은 없었지만 이 여자가 더 이상 이 남자 저 남자에게 기웃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입 밖으로 필터링도 없이 나왔다. 그리고 만약 그녀의 목적이 그의 말과 같다면 그래도 그녀의 행동들이 쉽게 납득이 갈 터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는 고마운 기색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온갖 표정이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요. 목적? 당연히 있죠. 사람이 누군가에게 접근할 때는 이거든 저거든 목적을 갖고 접근하는 거니까. 제가 접근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는 목적을 갖고 접근해요. 그런데요. 번지수 잘못 짚었어요. 연예인? 그까짓 거 하고 싶으면 나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근데 나 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거든요?”
“그동안 얼마나 꼬리를 치고 다녔길래 그게 하고 싶으면 바로 가능하단 거야?”
“뭐라구요? 지금 나 두 번씩이나 저급한 여자로 취급하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일순 움찔했다.
“오해라면 미안하게 됐어. 이 바닥이 그런 곳이니까.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생각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어.”
선유의 말에는 미안함과는 별개로 또 다른 씁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딱딱거리던 소민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뭐, 정 미안하다고 하면... 나도 이해해 볼게요.”
“그래. 그래서 뭘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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