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중에 봐요
그녀의 말에 포장을 뜯던 그의 손이 멈췄다. 그 상태로 그가 잠시 멈춰있던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마치 농담인양 툭 내뱉었다.
“말했잖아. 네가 무만 쏟지 않았으면 없었을 일이라고.”
“정말 말도 안 되는 핑계네요. 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요.”
“그래. 알려주기 싫어.”
단호박 돋는 대답에 소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들어가지? 요새 세상이 흉흉한데 이러고 돌아다녀도 돼?”
“안 그래도 이제 갈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유가 이내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또 왜요?”
창문을 내린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선유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근데?”
“도와준 이유가 뭐야? 정말 내 빠순이야?”
선유의 질문에 그녀가 제운에게 지었던 미소보다 더 달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빠순이라서가 아니라 일종의 서비스예요. 나중에 봐요.”
빨간 후미등 불빛과 달큰한 미소만을 남기고 그녀의 차가 그곳을 떠났다.
며칠 간의 촬영이 겨우 끝나고 간만에 집에 돌아온 선유가 지친 몸으로 쇼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소파 테이블 위에는 차에 있던 토끼탈이 옮겨져 있었다. 그 토끼탈을 멍하니 쳐다보던 선유가 자신이 입고 있는 셔츠를 내려다 봤다. 셔츠는 집을 화보현장으로 만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근사하게 어울렸다.
“한 디자인에 한 사이즈, 한 벌이 모토인 제품인 브랜드 제품을 그냥 막 퍼 돌리는 여자라니.”
일반 브랜드가 아니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브랜드 안에 또 다른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줄을 서서 기다려도 옷 한 벌 사기도 힘들만큼 매니아층이 두터운 유명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브랜드 안에 만든 블랙 라벨. 그도 언뜻 듣기만 하고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인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이 제품을 그에게 넘겼다.
“정말 정체가 뭐야?”
그의 머리에 궁금증이 맴돌았다. 온통 그 여자, 채소민에 관한 것이었다.
“아니, 돈 많은 집 딸이나 돈 많은 여자인 것 같긴 한데. 왜 밥 차 알바를 하지?”
어지간한 사람들은 브랜드명 외에는 잘 알지도 못할 모델명을 가진 차를 타고 다니는 여자였다. 그 여자가 차를 타고 가면서 한 말도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봐요... 나중에 봐요... 이건 또 볼 사이에서나 쓰는 말 아니야?”
혼자 골똘히 생각을 하던 그가 무릎을 쳤다.
“내 엄청난 빠순이가 확실한 건가? 사실은 이것도 내 선물로 준비해뒀던 거고?”
동생주려 했다는 소민의 말은 까먹었는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탁자 위 테이블에 놓여있던 토끼탈을 들어 자신의 옆자리에 두고는 팔을 얹었다.
“뭐, 성의가 갸륵하니 요정도는 허락해주지.”
그렇게 말한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토끼탈을 토닥거렸다.
*
“하! 그래서 내 밥도 차려주기 귀찮아하는 바로 그 분이!! 남의 밥을 차려주러!! 그것도 남이 먹을 음식 뒷설거지하러 가셨다?”
“그게 뭐?"
민규는 자신 앞에 아니 정확히는 침대 위에 길게 엎드려 있는 자신의 누나를 노려봤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뭐가?”
“동생 밥은 귀찮다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남의 밥을 차려주러 다니신다? 아주 열녀 나셨어?”
“열녀는 사랑하는 낭군을 위해 수절을 지키고 온 정성을 바치는 거고, 나는 그냥 일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렇게까지 하셨는데 결과가 어떠실 것 같냐고.”
“거야 모르지. 얼굴을 익숙하게 만들면 그래도 낫지 않을까 싶어 한 거니까.”
“내 생각엔 까일 것 같은데?”
“왜?”
“그 사람 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그랬지.”
“그런데 누나가 그날 저녁을 완전 무폭탄으로 날렸는데 누나가 했다는 걸 알아봐.”
그가 쓰러질 정도였다는 건 말하지 않았지만 완전히 숨기고는 얘기가 진행이 되지 않아서 대충 무를 완전 엄청 매우 싫어하는 편식쟁이 같다고 한 설명을 들은 민규가 한 말이 저랬다.
“그게 뭐?”
“그런데 누나가 그런 행동을 했는데 그게 좋았겠어? 원수지, 원수. 그런데 그런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캐스팅 좀 하려고 왔어요. 하면! 네. 당신이 나에게 좋은 추억을 안겨줬으니 계약 하겠습니다. 하겠어?”
“안 할까?”
“안 하지.”
민규의 단호한 대답에 소민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사람은 늘 한결같아야 한다니까? 누나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지금 얼마나 누나한테 안 좋게 돌아올지를 생각해봐.”
민규의 말에 곰곰이 생각을 하던 소민이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안 들키게 조심해야지. 뭐. 그리고 그 일 없었어도 한선유는 캐스팅 어렵기로 유명해.”
“그러니 더 문제인 거지.”
“아, 몰라. 만약에 안 된다 그러면 그 때가서 생각해 볼래.”
“그래, 세상 참 단순하게 생각해서 좋겠다. 안 그래도 캐스팅 잘 안 되는 인간을 본인이 더 잘 안 되게 만든 셈인데, 속도 편해.”
“괜찮아. 내 전매특허 몰라? 물불 안 가리고 매달리기?”
그녀의 말에 민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쯧쯧, 난 모르겠다. 잘 해봐라.”
“언젠 지가 알았나 뭐.”
그녀의 말에 민규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가 아무 생각 없는 듯 보이는 소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금세 풀어졌다.
“그래. 너 잘났다.”
“뭐? 저번부터 자꾸 너라고 할래? 야, 채민규. 많이 컸다?”
“진즉에 컸거든?”
“일로 와, 일로 와.”
“미쳤냐? 내가?”
소민을 향해 혓바닥을 내밀고는 민규가 부리나케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자 평상시와는 달리 소민이 민규를 따라가는 대신 침대에 드러누워 팔로 두 눈을 가리고는 중얼거렸다.
“채민규, 하여간 소심하기는.”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은 침대에 누워 미동도 없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밤 소민은 선유가 무를 들고 그녀를 향해 뛰어 오는 웃기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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