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마음대로 해
로봇연기 저리가라로 뻣뻣하게 물은 그녀를 슥 쳐다본 그가 말했다.
“아직 안 갔나?”
“사람이 못 돼가지고. 걱정하는 사람한테 말 좀 곱게 하면 어느 누가 와서 때려요?”
힐난조인 그녀의 말에 그가 한 번 그녀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 일은...”
“걱정 말아요. 비밀로 해줄게요.”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그녀가 뚫어지게 바라봤다.
“오~ 날 꽤나 믿나 봐요?”
그녀의 말에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여전히 기운이 다 돌아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근데 괜찮겠어요?”
“뭐가?”
“아까 와이어 촬영 할 때 흰 셔츠 입고 있었잖아요. 다른 옷이 없어서 그걸 준 거긴 한데 옷이 바뀌어도 괜찮겠냐구요.”
“나중에 다시 재촬영을 하든지. 아니면 이어지는 씬을 다음에 찍든지 하게 해달라고 해야겠지.”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에 소민이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런 거예요?”
“뭐가?”
“그... 쓰러진 거요. 아까까진 괜찮았잖아요.”
그래, 정확히 그는 그녀를 돌려세울 때까지는 말짱해 보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독감기운이 돌고 독감에 쓰러졌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그가 침묵으로 일관했다.
“좀 치사한 거 아니에요?”
“뭐가?”
“나는 부축해주고, 비밀도 지켜주고 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은인한테 이럴 수 있냐구요. 궁금한 거 하나도 안 알려줘요? 설마 나는 불치병에 걸렸어라거나 이런 막장드라마 대사를 읊는 건 아니죠?”
그녀의 말에 그가 그녀를 내려다 봤다.
“애시당초 그쪽이...”
그쪽이란 말에 소민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했다.
“내 옷에 무국을 쏟지 않았으면 없었을 일이야.”
“어머, 지금 몸 상태 안 좋은 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그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옷이 바뀌어서 촬영 일정이 미뤄지던지 재촬영을 해야 하는 것에는 당신 탓도 있는 거니까. 비긴 걸로 하지.”
그의 말에 소민이 무슨 생각인지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한선유씨 이제 걸을 수 있는 거죠? 그럼 잠깐 저 좀 따라 와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그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내가 왜 따라가야 하지?”
“내 탓이 있다면서요. 정확히는 내 탓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오해를 받는 건 싫으니까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단호한 말에 선유가 차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나 참. 김제운이랑 아는 여자면서 김제운이랑은 다르게 순둥이과는 아니구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제운씨랑 내가 어떻게 같아요?”
톡 쏘아붙인 그녀의 말에 등을 떠밀린 듯 선유가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임시 주차장 쪽으로 걸어간 그녀가 빨간 스포츠카 앞에 멈춰 서자 그는 그녀와 차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거... 댁 차야?”
“댁 아니고, 채소민이예요. 이제 내 이름도 알면서 대체 왜 자꾸 그런 호칭을 쓰는 건데요?”
그런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선유는 그 말을 무시하고는 되물었다. 시선은 그녀가 아닌 차를 향해 있었다.
“정말 이게 그 쪽 차라고?”
“그게 왜요? 이게 내 차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물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니만큼 자동차를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게다가 이 빨간 스포츠카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통통 튀는 그녀와 딱 맞는 것도 같았다.
“이게 정말 당신 차라고?”
캐스팅 대상이라 좋게 좋게 대하려던 소민의 인내심에 금이 가고, 목소리마저 집에서처럼 나오고야 마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자꾸 나한테 야, 너, 댁 그 쪽하면 나도 이봐요, 그쪽 이런 식으로 불러줄 거예요?!”
“마음대로 해.”
“이씨! 이봐요.”
그녀의 말에 그가 드디어 차에서 시선을 떼고선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 기분 나쁘죠? 나도 그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거든요?”
“기분 안 나빠. 그리고 난 여자 이름은 안 불러.”
“왜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지만 선유는 그저 그런 그녀를 한 번 슥 쳐다볼 뿐이었다. 절대 대답해주지 않을 듯 한 그의 표정에 소민이 포기했다.
“참 나. 역시 싸가지. 아파 보여서 도와줬더니.”
그녀가 그렇게 종알거리며 차 뒷 좌석 문을 열었고, 그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체 정체가 뭘까 궁금해지는 여자였다. 자신을 따라 다니는 건 둘째치고 그녀가 끌고 다니는 이 차를 보니 그게 더 궁금해졌다.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차이기도 했고, 가격이 만만치 않은 차이기도 했다. 그런 차를 끌고 다니는 이 여자의 정체가 대체 뭘까.
“당신... 정체가 뭐야?”
호기심에 그렇게 묻자 뒷 좌석에서 무언가를 꺼내던 소민의 등이 멈칫하고 굳었다가 이내 밖으로 몸을 빼내고는 그에게 쇼핑백을 하나 내밀었다.
“자요. 옷 망친 거 내 탓이라면서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한선유씨 잘못이지만.”
딱 잘라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쳐다보며 그녀가 내민 쇼핑백을 받아든 그가 쇼핑백 안 내용물에 더더욱 호기심이 동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셔츠는 어디서 난 거야?”
“그걸 알아서 뭐하게요? 자기는 스타라서 다 베일에 감싸인 신비주의 컨셉으로 나가놓고 나보고는 다 알려 달래. 원래 연예인보다 더 비밀이 많은 게 여자거든요?”
그녀가 그렇게 톡 쏘면서 말하자 그의 시선이 다시 날아들었다.
김제운과도 아는 여자, 비싼 차를 타고 다니고, 비싼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주는 여자.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녀를 파고들자 소민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선물 받은 거예요. 동생 갖다 주려고 했는데. 한선유씨 지금 몸 상태가...”
그녀가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좋지 않잖아요. 괜히 재촬영을 하거나 하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입어요. 그거 흰색 셔츠거든요.”
“신경써주는 건가?”
그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소민이 제발에 저려 괜히 소리를 높였다.
“흥! 신경쓰긴 누가요? 괜히 나중에 또 쓰러지고는 내 탓 할까봐 그러는 거거든요?”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 웃고는 옷의 포장을 뜯자 그녀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나도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아까요. 왜 그렇게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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