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가만 있어 봐요
제운을 뒤로 한 소민은 살그머니 촬영장 중심부로 향했다.
지친 표정을 한 선유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 번 가겠습니다. 바이~ 액션!”
감독의 말에 선유는 지친 표정을 지우고 금세 와이어 액션에 몰입했다. 의외로 진지한 그의 태도에 감탄하던 소민은 선유의 지친 듯 한 표정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나중에 내가 한 거 알면 출연 안 한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조금은 불안한 목소리로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도 약이 올라 충동적으로 했던 행동인데 그의 심각성을 보니 영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가 될 것 같아 걱정이 됐다.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 나는 밥차 알바생이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가 그를 바라봤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와이어 액션과 함께 유려한 선을 그리며 그가 그녀의 눈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컷! 다음 씬 찍겠습니다. 잠깐 쉬었다 갈게요.”
그 말에 선유가 와이어를 벗고는 현장에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소민이 주변에서 새 생수병을 찾아 그에게 다가갔다.
“이건 순전히 캐스팅을 위한 밑밥이야. 절대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민이 선유의 뒤를 따랐다.
땀 범벅이 된 선유가 사람들을 피해 차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워낙 사람이 많은 현장인터라 다른 볼일이 있는 사람이겠거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멈추면 발걸음이 멈췄다가 또 걸으면 다시 따라서 소리가 나곤 해서 이상함을 느낀 선유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소민의 모습에 주변을 살폈다. 제운의 모습도 다른 사람의 모습도 없었다.
“밥 차도 갔는데 아직 안 가고 뭐해? 늦게 돌아다니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글쎄?”
어깨를 으쓱한 선유가 뒤를 돌아 다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디가요? 어차피 곧 촬영 다시 할 텐데?”
그녀의 말에 그가 뒤를 돌아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시 걸어왔다.
“혹시 이 냄새 무슨 냄새인지 알겠어?”
“무슨?”
그렇게 말하던 소민이 멈칫했다. 옅기는 했지만 무국 냄새가 아직도 그에게서 나고 있었다.
“무국 냄새네요. 심한 냄새도 아닌데 뭘 그래요. 이미지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맞지? 무 냄새지? 이미지는 무슨...”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저기...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아요?”
소민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그의 몸이 그녀에게 슥 기울었고 둘은 순식간에 흙바닥으로 쓰러졌고 그녀가 들고 있던 물통은 어둠 속으로 굴러갔다.
선유의 몸에 깔린 소민은 그녀의 위로 늘어진 선유의 몸을 밀쳐 내려 애썼다.
“왜, 왜 이래요?”
카사노바라는 칭호답게 자신에게 치근덕대는 줄 알고 그를 밀어내려던 소민은 그의 입가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에 화들짝 놀랐다.
“한선유씨. 아파요?”
“호들갑 떨지 마. 옷만 갈아입으면 괜찮아. 아까 갈아입었어야 했는데.”
“코디는요?”
“퇴근시켰지. 이 옷으로 버틸 생각이었고 내일 입을 의상 가져와야 하는데 늦게까지 남아 여기서 쪽잠자고 비몽사몽 갔다 오는 거 보고 싶지도 않고.”
“그럼 뭐로 갈아입으려구요?”
“차에 뭐든 여분 옷이 있겠지.”
대화 중에도 선유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어쩐 연유인지 그는 통 기운을 못 쓰고 있었다. 게다가 와이어 액션으로 힘들어 흘리는 땀인 줄 알았는데 그는 지금도 눈에 보이게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나 일이 힘들어서는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나는 뜨거운 김이 그걸 증명했다.
그 와중에도 소민에게 신기했던 것은 카사노바라는 별명과 다르게 그가 그녀에게 어떻게든 닿지 않으려고 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겨우 그녀에게서 떨어져 옆으로 누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뭐 하는 거야.”
“가만 있어 봐요. 부축해 줄게요. 계속 여기 누워 있을 거예요?”
“뭐?”
“옷 갈아입어야 한다면서요. 갈아 입혀주진 못해도 차까지 데려다는 줄게요. 알았죠? 스텝들이 지나가다 봐도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가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그의 어깨 밑으로 들어갔다.
“하나 둘 셋 하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 둘, 셋!”
그녀의 신호에 그가 끙하고 소리를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에 그의 키가 큰 탓에 그가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그녀를 의지해야 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를 부축해 그의 차로 데려갔다.
“하아, 하아.”
차에 도착해 겨우 그를 차 안에 쑤셔 넣은 그녀가 그를 바라봤다.
부축한 그녀보다 그는 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고, 상태도 아까보다 더욱 안 좋은 듯 해 소민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가 친 장난이 뭔가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어 보였으니까.
“한선유씨, 괜찮아요? 옷을 찾아야 갈아 입죠.”
그녀의 말에도 그가 식은땀만 흘리고 있자 그녀가 그의 차에 올라탔다. 한참을 차 안을 뒤진 끝에 그녀는 겨우 검은색 티셔츠와 체크셔츠 등을 찾아냈다.
“한선유씨, 어떡하죠? 일단 옷을 찾긴 했는데.”
소민의 목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그가 겨우 눈을 뜨고는 말했다.
“내려.”
“뭐라구요? 이 남자가! 기껏 도와줬더니 내리라니, 나 참!”
“옷 갈아입을 거야.”
마른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말에 그녀가 순간 멍하니 있다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고도 소민은 차 앞에서 서성였다.
얼마나 서성였을까 곧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차문이 열리고 검은색 셔츠를 입은 선유가 차에서 내렸다.
한결 나아진 모습이긴 했지만 파리한 안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원래도 흰 피부인 그가 파리해지자 더욱 창백한 안색이 검은 옷과 대비가 됐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이 그를 마치 뱀파이어처럼 보이게 했다. 저런 모습으로 여자 여럿 꼬시는 건 일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색기가 흘렀다. 아픈 남자가 참 용하기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소민이 물었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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