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많이 놀랐어요?
멍하니 그와 눈빛을 마주하고 있던 그녀가 잠에서 깬 듯 황급히 시선을 돌림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
“아, 맞아. 그 얘길 해야지.”
제운의 등장으로 잊고 있던 화제가 떠올랐다.
“이거 혹시 네가 한 짓이야?”
“뭐를요?”
그녀의 반문에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이 내려두었던 식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의 식판은 거의 텅 비다 시피 했다. 기껏 있는 것이라곤 배추김치와 최선을 다해 무를 피해 담은 듯 한 밥, 무는 단 한 조각도 들지 않은 무국이었다.
“이 식단 말이야.”
“그... 내가 식단을 무슨 수로 정해요. 난 알바라니까요?”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그녀가 그렇게 대답했다. 만약 그게 그녀의 장난이라고 한다면 그가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 듯 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에 조금은 미안해진 소민이 물었다.
“무가 그렇게 싫어요?”
그녀의 질문에 선유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시선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담는 눈빛이 아니었다. 텅 빈 그 눈동자에는 풍경이 담겨 있지 않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식판을 내려놓은 그가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알았어.”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궁금해졌다. 단순히 편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식판은 단순한 편식의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
“무가 왜 싫은데요?”
그녀의 질문에 그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쪽이 한 짓이 아니라면 됐어.”
그녀가 뭐라도 줄까 물으려는 찰나 촬영 재개를 알리는 스텝의 외침에 선유가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소민은 멀찌감치에서 그가 와이어 액션을 하는 것을 바라봤다.
“힘들겠다.”
그의 와이어액션은 감탄이 절로 났다. 와이어와 한 몸이 된 듯 움직이는 그의 액션에 감탄을 하다 그녀는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든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장난기에 그는 점심을 제외하고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배고픈 영혼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처음 시작은 단순한 장난이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건드리면 안 되는 뇌선을 건드린 듯 한 기분마저 들었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일을 끝낸 후 내일 필요한 식재료를 사러 간다며 밥 차가 떠났음에도 소민은 떠나질 못하고 앉아 있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보이고 난리야. 괜히 죄 지은 느낌 들게.”
그렇게 투덜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난입했다.
“소민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제운씨. 별 거 아니에요.”
“이마에 온에어 표시처럼 고민 중 불 켜져 있는데요?”
“진짜요?”
자신의 이마를 더듬더듬하는 그녀의 모습에 짧게 웃으며 앞에 섰던 제운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가짜요. 그런데 정말 고민이 있는 거예요?”
“있긴요. 그냥 지나가는 생각이겠죠. 그나저나 촬영은 끝났어요?”
고개를 빼고 촬영장 쪽을 기웃기웃하자 여전히 촬영장은 불빛이 환했고, 그 불빛 가운데 아직도 와이어 줄이 움직이는 걸 보니 선유는 촬영 중인 듯 했다.
촬영장을 향해 고개를 빼는 소민의 모습에 제운이 다시금 웃음을 보였다.
캐스팅 현장에서처럼 참 매너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제가 오늘 촬영할 씬은 끝났어요. 나머지 팀들은 아직 더 찍어야 하나 봐요.”
“그렇구나. 막바지라 더 바쁘죠?”
“다 그렇죠. 뭐. 근데 이제 저는 캐스팅 안 하세요?”
“제운씨는 워낙에 찾는 데가 많잖아요. 게다가 성격 착한 사람은 굳이 캐스팅 디렉터 없어도 되요.”
“아... 그럼 저 이제부터 들어오는 작품 다 거절하고 못되게 굴면 캐스팅 하러 오실 거예요?”
“에이~ 제운씨 성격에 퍽이나 잘도 그러겠네요.”
“하하하하하. 들켰어요? 근데 소민씨가 캐스팅하러 온다고 하면 정말 캐스팅될 준비하고 기다릴 텐데요.”
“내가 다음에 들어오는 작품 중에 아 이건 제운씨 거다! 하는 느낌 드는 거 있으면 그 때 꼭 찾아 갈게요. 그 때 나 박대하면 안 돼요?”
“그럴 리가요. 근데 여긴 어쩐 일이예요? 정말 밥 차 알바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캐스팅 할 사람이 있어요?”
“네...”
“설마 그게 아까 그 한선유씨예요?”
“원래 설마가 늘 사람을 잡는 법이죠.”
“아. 그럼 아까 제가 망친 거 아니에요? 그래서 고민 중이었던 거예요?”
정말 미안한 듯 말하는 제운을 향해 소민이 씨익 웃으며 바라보자 제운도 이유는 모르면서도 덩달아 그녀를 향해 미소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소를 보이던 그녀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더니 정색을 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변한 그녀의 표정에 제운이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맞아요. 사실은 그래서 고민이었어요.”
“어... 어떡하죠? 제가 이제라도 가서 한선유씨한테 사과하고 올까요?”
순진하게도 그렇게 되묻는 제운을 향해 소민이 깔깔대고 웃어보였다.
“제운씨. 어쩜 2년 동안 때가 하나도 안 탔어요? 당연히 농담이죠.”
“정말인 줄 알고 놀랐어요.”
“많이 놀랐어요?”
“네. 순식간에 표정이 변하는 게 어우... 소민씨야말로 배우해도 되겠어요.”
“어휴 제가 배우는 무슨 배우예요? 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왜요? 한 번 해봐요. 잘 할 것 같은데요?”
“어쨌든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제운씨는 와이어액션 안 해요? 보니까 한선유씨는 하는 것 같던데.”
“아, 봤어요? 볼 때마다 감탄한다니까요.”
“뭐가요?”
“한선유씨 와이어액션이요. 그거 되게 힘들거든요. 그런데 한선유씨는 몇 번을 다시 찍어도 한마디도 안 해요.”
“의외네요?”
“뭐가요?”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저도 처음엔 그럴 것 같았는데 현장에서는 전혀 불평불만 안 하는 타입이에요. 몇 번을 컷이 나도 늘 처음 찍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더라구요. 지금도 저 와이어씬 거의 스무 번 가까이 찍는 것 같던데. 어후.”
“왜요?”
“저 같으면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서요.”
“제운씨도 잘하면서 뭘 그래요.”
그녀의 말에 제운이 소민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좋게 봐줘서 좋긴 한데 한선유씨 보면 역시 프로는 프로고, 선배는 선배라는 생각이 들어요. 넘사벽이랄까.”
제운의 말에 소민은 흥미가 동했다. 제운이 입에 발린 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제운씨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제운이 빙긋 웃었다.
“지금 쉬고 있었는데요?”
“아니요. 내일 촬영하려면 가서 쉬어야죠.”
“그래야죠. 소민씨는요?”
“전 좀 더 있다 가려구요.”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가요. 제운씨.”
그렇게 말한 소민이 돌아서서 촬영장으로 향하자 제운이 그녀의 뒤에 중얼거렸다.
“소민씨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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