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12화 (12/105)

12. 대체 뭐하는 여자야?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에 그가 고개를 저으며 차에서 내린 그가 쾅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쉬기는 글러먹은 게 뻔히 보였다. 그걸 방해한 저 여자아이가 조금도 곱게 보일 리 만무했고, 열이 올린 머리를 식히며 그가 주변을 살폈다.

“뭐야, 여자 우사인 볼트야? 뭐가 이렇게 빨라?”

문을 닫고 사라진 그 여자는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질 않았다.

“여긴 또 무슨 일로 온 거야? 정말 내 빠순이야?”

며칠 안 보인다 싶더니 다시 나타난 그 여자의 속내가 내심 궁금했다. 게다가 오늘은 토끼탈도 없이 맨얼굴로 나타났다.

“대체 뭐하는 여자야?”

머리도 식힐 겸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슬렁어슬렁 그 여자가 어디로 갔을까 찾아볼까 할 때였다.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촬영을 재개한다는 스텝의 목소리에 낮게 새어나오는 한숨을 삼킨 그가 촬영장으로 복귀했다.

선유가 촬영장으로 복귀한 그 시각, 밥차로 돌아온 소민은 스텝과 배우들이 아침을 먹고 간 설거지를 하며 아까의 장면을 떠올렸다.

“좋은 구경이었어. 음. 음.”

물론 처음 보는 것도 아니요, 새로울 것도 없는 장면이었건만 뭔가 구도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다른 거지?”

종알거리며 식판에 트리오 칠을 하던 그녀의 손이 뚝 멎었다.

“맞다. 그런 대사는 원래 남자가 여자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TV드라마나 촬영 현장에서 본 대부분의 고백신 혹은 애정을 갈구하는 신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는데 그 상황은 정 반대였다.

“뭐지? 잘 나가는 아이돌이랑 사귀는 거면 왜 튕기지?”

“당신, 스토커내지는 빠순이가 맞는 건가?”

소민은 갑작스레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빠질 뻔했지만 겨우 균형을 잡아 체면을 구길만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하, 한선유씨?”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캐스팅 대상이란 것이 퍼뜩 생각난 소민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까는 경황이 없으신 것 같아서 아니! 제가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네요.”

선유는 자신에게 능청스럽게 인사하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 컷을 찍고 나서 다음 촬영 씬까지 시간이 남는다는 소리에 아까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차에 가는 대신 촬영장 주변 산책을 택한 그의 눈에 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토끼 탈을 쓰고 자신 앞에 수도 없이 나타났던 여자, 자신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고는 즐기라는 사인을 보내던 그 여자였다.

당돌하게 그리고 자신을 황당하게 만들던 그녀가 마치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가 자신의 차를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하도 팬들이 자신의 차에 낙서를 해대고 번호판을 외워 쫓아 다녀서 차를 바꾼 게 바로 요 며칠 전이었다.  그리고 차가 나오자마자 이곳으로 와서 외부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매니저와 코디, 스텝과 소속사를 제외하고는 아직은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 그의 차를 그녀는 과연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너 뭐야?”

“보시다시피 저는 밥 차 알바생인데요.”

그의 질문에 바로 돌아오는 그녀의 씩씩한 답변에 그제야 그가 그녀의 복장을 훑어보았다.

노란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앞치마에 핑크색 고무장갑을 끼고 하얀 색에 도트무늬가 새겨진 두건까지 쓰고 있는 그녀는 식판을 앞에 쌓아두고 수세미를 들고 있었다.

“밥 차? 언제부터?”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곳에 없었던 존재였는데, 하루아침에 뿅! 하고 나타난 이 상황을 그는 쉽게 넘기지 못했다.

“오늘만요. 오늘이 식사 인원이 제일 많다고 하던데요?”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오늘 들어오는 인원이 제일 많고 고된 촬영 중인 것은 사실이니 밥 차에도 인원 한 명 더 늘어난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래도 밥 차 일을 하나? 아직 젊어 보이는데?”

“아, 알바라니까요. 원래 직업은 따로 있어요.”

“원래 직업이 뭔데?”

직업을 묻는 그의 질문에 소민이 목구멍까지 나왔던 답을 꿀꺽 삼켰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토끼탈=악연’이라는 공식이 너무도 확고한 지금은 절대 이야기할 수 없었다.

“있어요. 언젠가 알게 되면 깜짝 놀라실 걸요?”

“흠... 밥 차 알바랬지? 나 아침을 안 먹어서 배고파. 밥 좀 줘봐.”

밤샘 촬영 때문에 그다지 입맛도 없었지만 이대로 그녀를 보낸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아까 아이돌과의 대화를 오해할게 뻔히 보였다. 그런 불필요한 오해는 사절이었고 어떻게든 해명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밥 시간 정해져 있잖아요. 지금은 배식시간 아닌데요.”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잖아.”

분명히 부탁하는 말은 아니었는데 부탁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에 그녀가 입술을 한번 삐죽이더니 수세미와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서 내려놓고는 앞장 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따라오라는 말이 없었지만 선유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싸장님~ 밥 남은 거 있어요?”

그녀의 뒤를 따라 돌아간 밥 차의 뒤쪽에 밥 차 사장부부가 양파를 까고 당근을 썰고 있었다.

“왜? 소민씨 배고파?”

“저 말구요. 여기 한선유씨가 아까 점심 못 드셨거든요.”

“아니 왜? 아까 소민씨가 한선유씨 밥 갖다 준다고 하지 않았어?”

밥 차 사장이 던진 말에 선유의 시선이 소민에게 향했다.

그래서 자신의 차에 왔던 건가 싶었다.

그나저나 이 여자 아까 그 모습을 얘기하면 어쩌지?

스캔들 하나 더 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진즉에 알게 됐다.

그리고 그런 스캔들이야 이력이 나있는 마당에 하나 더 나는 것쯤이야...

하지만 미리 이야기 된 스캔들이 아닐 경우, 소속사 사장이 기함을 하고 그를 잡아먹을 듯이 난리를 칠 것은 자명했다.

한 번 마음먹고 입을 열면 기본이 2시간인 그는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처럼 한 말씀에 또 보태고, 마지막 말씀에 한 마디를 더 얹고 하는 식으로 밑도 끝도 없이 그의 귀를 괴롭게 했다.

게다가 아까 그 상황은 그의 잘못이라곤 그 여자아이가 대본을 맞춰보자고 해서 순순히 들였던 거, 그것 하나뿐인데 구렁텅이에 빠져야 한다면 그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불상사는 피해야 했다.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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