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9화 (9/105)

9. 뭐하는 짓이에요

그는 카사노바였다. 툭하면 신문기사에 이름이 오르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여자문제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또 사귀던 여자와 헤어진 참인데 먼저 손 내미는 여자를 거절 한다니. 의외였다. 뭐, 취향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저는 제 토끼를 찾기 전에 화장실을 갔으면 하는데요.”

이제 그만 사라지라는 주문에 나은이 아쉬운 표정으로 사라지자 선유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소민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너 뭐야? 아까는 분명히 남자였잖아. 자웅동체야?”

무식하다더니 자웅동체는 또 어디서 주워들었대? 속으로 빈정거리면서도 그녀가 겉으로는 말끔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제가 자웅동체로 보여요? 그리고 자꾸 아까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전 오늘은 한선유씨 처음 보는 거 거든요?”

오늘 처음이란 그녀의 말에 선유가 방금 전 관람차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그의 말에 관람차 안에서 토끼탈은 순간 자신의 머리위에 쓰여진 탈이 벗겨지지 않게 꽉 잡는 듯 보였고 그 모습에 선유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었다.

지난 번 혹시 팬 사인회에서 만났던 여자인가 싶어 설마라는 진부한 멘트를 날렸던 그의 기대를 부수며 토끼탈을 꽉 잡는 듯 보였던 손이 낑낑대며 탈을 벗었다.

그 때의 허탈함이란.

봉제선이 얼굴에 눌리도록 빵빵한 볼을 가진 남자아이가 거기 앉아서 그를 바라봤다.

“너...”

“형님, 안녕하셨어요?”

일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 그를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내 땀은 왜 닦아준 거야.”

그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스토커였다. 그의 집에 침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학생인 터라 마주치면 몇 번 버럭거리고 그마저도 컨디션이 여의치 않을 때면 내버려두는 그런 아이였는데 여기까지 쫓아온 거였다.

“저... 아시잖아요. 부탁드릴 게 있어서 잘 보이려고 그런 거죠.”

“부탁? 네가 나한테 잘 보이는 방법은 딱 하나야.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않는 거.”

“그러니까 알려주세요. 알려주시기만 하면 저는 사라질 거라니까요?”

앞에 앉은 남자아이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카사노바란 그의 칭호가 탐이 난다며, 어떻게 여자를 많이 사귈 수 있냐고 묻는 이 남자아이에게 그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 동안 철저히 무시해 온 건데 이 관람차 안에서는 피할 수도 없었다.

“저는 인기 짱이 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여자들이 그렇게 쓰러져요?”

남자아이의 말에 선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딴 말버릇은 어디서 배웠어. 여자가 무슨 도미노야? 쓰러뜨려? 그 딴 어림 반푼어치도 안 되는 정신으로 인기 짱? 너 한번만 더 내 주변에 얼쩡거리면 청소년이고 뭐고 없어. 바로 경찰에 신고할 줄 알아.”

그렇게 말하고는 아니, 사실대로는 으르렁거리다시피 하고는 관람차가 서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린 터였다.

토끼탈 알바는 어떻게든 끝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줄 알고 그나마 마음이 누그러지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토끼탈과 지금 자신 앞에 토끼탈이 다른 사람이란 소리였다.

“하긴...”

그런 생각을 가진 녀석이 쉽게 바뀔 리 없었다.

“이봐요. 지금 나한테 해야 할 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그에게 톡하니 소민이 끼어들자, 선유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자신에게 할 말이 없냐는 물음에 선유가 아직 쓰고 있는 그녀의 토끼 탈을 제 손으로 벗겨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이번엔 팬 사인회의 그 여자였다. 자신에게 할 말이 없냐는 그녀의 말에 그가 차오르는 짜증을 내려 눌렀다.

괜히 엄한 데에 화풀이를 할 이유는 없었다.

“뭐.”

“뭐라니요? 나한테 할 말 없냐구요.”

이 여자는 대체 자신에게 왜 자꾸 할 말이 없는지를 묻는 것일까.

사실 이 토끼탈녀로 인해 받은 정신적 피해를 청구해야 하나 그는 잠시잠깐 혹시 그녀가 그 얘기를 하란 말을 먼저 꺼낸 것인지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만약 눈 앞에 이 여자가 자신의 팬이라면 팬을 상대로 고소한 스타라는 오명만 뒤집어 쓸 게 뻔했다.

그래서 선유는 가능한 평정을 유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봤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지금 뭐하는 짓이지?”

“뭐하는 짓? 지잇?”

“팬 사인회, 소속사 앞, 촬영장 아무데고 다 쫒아 오는 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쪼, 쫓긴 누가 누굴 쫓아요?”

물론 따라다니긴 했지만 결단코 일의 연장선일뿐, 이런 오해를 받으니 억울함이 나로호와 함께 발사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억울함은 곧이어 황당함으로 빠른 전환을 시도했다.

“그 나이에 빠순이를 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빠, 빠순이?”

“그럼 아니야? 그 쪽 그 몰골로 나 따라다니는 걸 무슨 수로 설명할 건데?”

억울한 누명에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려는 순간 밖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선유가 토끼탈을 들지 않은 반대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화장실 칸으로 잡아끌었다.

“뭐하는 짓이에요!”

아직 상황파악이 덜 끝난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선유가 아예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로 막고는 낮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 일단 네 목소리 때문에 또 사람이 들어오면 그때는 숨겨줄 생각 전혀 없으니까. 나보고 변태라 그랬지? 남자화장실 들어온 네가 변태가 되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의 말에 그녀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입을 틀어막은 그의 손을 떼내고는 뒤로 돌아 벽에 머리를 콩콩 박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속삭이듯 중얼거렸지만 좁은 공간 안에서 그 소리가 안 들릴 리 만무했고, 살짝 연 문틈으로 바깥 동태를 살피던 선유가 그녀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 지었다.

“내 27년 인생 최악의 아니, 두 번째로 최악의 수모야.”

중얼중얼 거리는 소민의 목소리에 주의를 주려 고개를 돌린 선유의 눈에 그녀의 아찔한, 그렇지만 토끼 옷을 입어 상당히 귀여운 모순적인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이나 그녀의 그 모순적인 모습에 눈을 못 떼던 그가 더 가까워진 발소리에 황급히 움직였다.

“뭐, 뭐하는 거예요.”

“조용히 해. 지퍼 올려 줄려주려고 하는 거니까 가만히 좀 있어.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한테 등짝 자랑하고 싶으면 계속 움직이던가.”

등에 와 닿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던 그녀가 선유의 나직한 목소리에 금세 순한 양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지퍼를 올리는 시간이 그렇게 길고 긴장이 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됐어.”

그렇게 말한 그가 그녀의 머리에 토끼탈을 다시 뒤집어 씌웠다.

“토끼탈이 많은 걸 보니 탈 장사라도 하는 것 같은데 예전에 팬 사인회장에 버리고 간 건 안 줘도 돼지? 그 쪽을 비롯해서 요 며칠 토끼탈 때문에 꽤나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피곤해서 화풀이할 게 좀 필요하거든.”

“나 탈 장사 안하거든요?”

“뭐든.”

그렇게 말한 그가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는 그녀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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