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8화 (8/105)

8. 유감스럽게도요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던 소민이 그의 말에 놀라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났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 있던 터라 바로 물러나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선유는 더욱 다가왔다.

"그래. 내가 네 근성은 인정한다. 신고는 안할게. 그러니까 일단 등 대."

알 수 없는 소리로 협상을 시도하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움직일 리 만무했다.

"못 알아들어? 신고 안한다니까?"

아니 대체 그녀가 신고를 당할 일이 뭐가 있는 건지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당최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짜증 어린 목소리를 내자 선유가 일순 멈칫했다.

“야, 너 목소리도 변조할 줄 아냐? 개인기야? 나한테 개인기 어필하는 거야?”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려 머리를 굴리느라 소민이 아무 반응이 없자 선유가 짜증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지긋지긋한 스토커질. 경찰에 신고 안하겠다고. 그러니까 등 까. 나는 미션만 하면 되니까 등 한 번 시원하게 까고 끝을 내자.”

시작도 안했는데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끝을 외치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선유는 이미 손 내밀면 닿을 거리로 다가와 있었다.

다리에 힘이 돌아온 소민이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지만 그래봐야 뒤는 벽이요 앞은 선유인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꾸만 물러나는 토끼탈을 향해 선유는 인상을 구겼다.

“아, 진짜. 토끼탈 쓴 것들은 왜 하나같이 사람을 열 받게 만들지? 저번에 팬사인회에서 만난 여자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넌 왜 이번에 또 토끼탈을 쓰고 나타나서 팬사인회 토끼탈이 떠오르게 만들고 난리야.”

그의 말에 소민의 머리에 반짝 전구가 켜졌다. 그는 지금 그녀를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두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확실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게 불리할 것만 같았다. 그의 머리에는 지금 ‘토끼탈=악연’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게 틀림없어 보이니까.

필사적으로 물러서는 그녀를 보고 선유가 토끼탈을 노려봤다.

“왜 자꾸 도망을 가. 네가 등 한 번 보여준다고 죽냐? 어차피 탈 쓴 거면서. 진짜 토끼라도 되는 것처럼 뭐 이렇게 몰입을 하고 그래. 네 등을 봐야 내가 다음 미션을 할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한 선유가 잽싸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지퍼를 내렸다.

"뭐야? 너 필사적으로 등을 숨기더니 왜 등에 아무 것도 없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선유가 그렇게 물으며 혹여나 작은 종이라 자신이 못 본 것인가 싶어 조금 더 등을 샅샅이 관찰하다 외쳤다.

"그리고 너는 사내자식이 왜 여자들이 입는 탑을 입고 다녀? 변태냐?"

그리고 그의 말과 동시에 있는 힘껏 그를 밀친 소민 역시 악을 쓰며 외쳤다.

"뭐래 이 등에 환장한 변태가! 자아성찰하냐? 이 변태자식아?!!!"

소민이 그렇게 외친 목소리가 겨우 사라졌을 때였다.

“한선유씨!!”

간 줄만 알았던 게스트의 목소리에 선유가 소민의 손을 잡고는 냅다 화장실 문 뒤쪽으로 안 보이게 밀어 넣은 후, 재빨리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함께 출연한 여자 게스트가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밖으로 나온 선유가 여자게스트를 부르자 그녀가 화장실 안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아까 여자 목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요?”

그녀의 말에 화장실 안에 있는 토끼(소민)가 아까 관람차 안에서의 토끼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선유가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여기 보이시죠? 남자 화장실.”

“그나저나 토끼도 안 보이네요?”

“걔네도 미션을 받았는지 미친 듯이 도망가서요.”

청산유수, 태연자약한 선유의 말에 소민은 화장실 안에서 지금 나가서 황당하게 만들까 고민을 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캐스팅에 대한 굳은 의지가 그녀에게 제정신을 돌려 줬다. 그리고 왠지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 여기 우리 둘 뿐이네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선유에게 바짝 다가와 슬금슬금 그를 화장실 벽 쪽으로 몰아붙이더니 몸을 가까이 대고는 귓가에 속살거렸다.

“어때요? 이번엔 나랑 스캔들 한 번 내보지 않을래요?”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선유가 가까이에 선 그녀를 내려다 봤다.

“달리는 사람 촬영, 사실 한선유씨 나온다 그래서 나온 거거든요. 나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어쩐지 아까 오프닝부터 묘한 시선을 흘리긴 했었는데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 못했던 바였다.

“선배님은 좋은 선배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확연하게 선을 긋는 그의 태도에 그녀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바닥에서 한선유씨 소문 모르는 사람이 한 둘도 아니고. 나도 그 소문 들었거든요.”

“소문이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한선유씨 스캔들 말이에요.”

태연하게 묻는 선유에게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화장실 안에서 듣고 있던 소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유의 스캔들이라니 새삼스러울 게 뭐가 있나 싶어서였다. 그런 소민과는 반대로 미간을 가볍게 구겼다 편 선유가 이내 말했다.

“그렇다 해도 선배님에게 해가 된 일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선유의 냉정한 말에 그녀가 몸을 떼더니 선유를 쳐다봤다.

“어린 애들은 본 체 만 체 하길래 성숙한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아닌가 봐요?”

“유감스럽게도요.”

그의 말에 단단히 빈정이 상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지자 그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소속사에서 요구하는 것 외에는 스캔들을 낼 하등의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 연예계에 있고 싶었다. 여기가 그가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를 상기하며 그가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뭣보다도 선배님께 혹여라도 상처를 드리고 싶지 않거든요.”

선유의 말에 이미 선유를 흠모하고 있던 나은은 제멋대로 그의 말을 해석해 감격한 듯 한 표정을 지었고 화장실 안에서 듣고 있던 소민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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