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계속 따라 올 셈이야?
선유가 심상치 않은 추측과 함께 빙글빙글 관람차를 타고 돌아내려오고 있는 그 시간에 토끼탈을 쓴 또 다른 인물이 안내 데스크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니. 대체 촬영을 하긴 하는 거야?”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곤 다시 쏙 주저 앉은 그 토끼탈의 정체는 소민이었다.
소민이 선유를 기다린 지도 자그만치 1시간이 지났다.
“이게 뭐야. n기획사 백대표님이 어떻게 만들어주신 기회인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소민이 백대표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 그게... 소민씨였다구요.
팬사인회에서의 자초지총을 설명하는 소민의 말에 백대표가 짧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명백한 쌍방과실이기에 소민은 일단 사과의 말을 전했다.
“네. 죄송해요. 대표님.”
- 소민씨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우리 한배우가. 하아...
말대신 나오는 그의 짙은 한숨이 백대표의 심경을 대신하고 있었다.
“제 잘못이 컸어요. 일단 기자분들은 제가 다 처리했으니까 기사는 안 나갈 거예요. 죄송해요. 대표님.”
- 소민씨가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아니에요.”
- 선유를 대신해서 제가 미안하다고 말씀드릴게요.
“제 잘못이 컸죠. 벗겨달라고 한 바람에. 오해하시기 딱 좋게.”
- 어떻게 미안한 마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소민씨는 선유 캐스팅하려고 그러신 건데. 그 녀석이 그런 결례나 저지르고.
“에이~ 아니에요.”
- 내가 소민씨한테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회는 이 때다 싶었다. 쌍방과실이긴 해도 백대표가 그녀가 곤란한 일을 겪었다고 미안해하는 틈을 놓쳐서는 안됐다.
“저기... 대표님...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 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으면 뭐든 도울게요.
미안해하는 대표의 말에 소민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한선유씨 스케줄을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 그녀의 질문에 백대표는 아예 자기가 매니저에게 말을 해놓겠다며 언제든 필요할 때 매니저에게 연락하면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거라면서 선유의 매니저의 번호를 알려줬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선유가 달리는 사람 녹화를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잠복 중이었다.
그런데!! 선유는커녕 사람 코빼기도 안 보이니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토끼탈까지 쓰고 있으려니 절로 땀이 주륵주륵 흘러 주변을 살핀 그녀가 에어컨이 있는 곳까지 잔뜩 수그린 자세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토끼탈을 잠시 벗은 그녀가 에어컨 바람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식히려는 듯 바짝 다가섰다.
“어휴. 이제 살겠네."
더운 날씨에 토끼탈을 쓰고 있으려니 얼굴에 땀띠가 날 것 같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녹화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대한민국 예능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열과 성을 다해서 1초도 쉬지 말고 찍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쫑알대며 겨우 머리에 배인 땀을 말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이제껏 머리털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던 선유가 드라이아이스를 얼굴에 풀어놓은 듯 한 표정으로 반대편 통로에서 슥 지나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런 시원함을 알기 전에 나오든가 하지. 이제 겨우 땀 좀 식히나 싶었는데. 에이. 타이밍도 드럽게 못 맞춰요."
기다리던 때는 안 나타나고 이제야 나타난 그의 모습에 투덜거리면서도 어쨌든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인 그녀가 억지로 다시 토끼탈을 쓰고는 뒤를 졸졸 쫓아가기 시작했다.
한편 관람차에서 내린 선유는 함께 관람차를 탔던 토끼는 어쨌는지 싸늘한 표정으로 VJ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지긋지긋한 놈. 이제는 촬영장까지 따라와서 스토커질이야. VJ는 또 어디 갔어? 아예 달리기 실력이 안 되면 VJ를 하질 말든가. 감독님한테 사람 데리고 올 때 달리기 속도 측정해보고 데려오라고 한 소리 해?"
중얼거리던 선유가 불현듯 뒤를 돌아봤다. 선유에게 뭐라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며 선유의 뒤를 좇던 소민이 갑자기 멈춰 자신을 돌아보는 선유의 표정에 움찔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을 소민을 본 그가 한껏 싸늘한 표정으로 소민을 향해 갔다.
"계속 따라 올 셈이야? 안 가?"
도리도리.
"너 아까 내가 좋게 말해 줬더니 아직 모자라? 쓴소리 좀 더해 줘?"
그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을 보고 팬 사인회의 악연이 떠올라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른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가 자신에게 뭘 좋게 말 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소민에게 선유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그녀와 숨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서 그녀가 쓰고 있는 토끼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댔다.
"실력으로 해결해. 실력으로. 이렇게 사람 뒤를 스토커질하지 말고. 네 힘으로."
선유가 토끼탈을 밀 때마다 고개가 앞뒤로 까닥까닥거리던 소민은 부탁도 하기 전에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선유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가 밀어대고 있는 머리를 흔들리지 않게 힘껏 고정시켰다.
"어쭈? 버텨? 버텨?"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을 반항이라 생각한 선유는 더욱더 힘을 줘서 손가락으로 토끼탈의 머리를 밀었다. 그리고 얼마나 힘겨루기를 했을까. 소민의 목에 담이 오려고 할 쯤 선유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손을 떼어냈다.
그가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소민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VJ를 찾아야 등을 까보고 떼어놓든가 하지. 젠장."
뻐근한 목을 풀어주려 목 스트레칭을 하던 소민이 등을 깐다는 선유의 말에 팬 사인회에서의 일이 불현듯 떠올라 숨을 들이 삼키며 팔을 X자로 하고는 한 발 물러섰을 때였다.
"어? 한선유씨랑 토끼!!"
"이런 젠장. 야, 일단 뛰어."
다른 통로에서 나타난 여자 게스트가 그렇게 외쳤고, 선유가 소민의 손을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 이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관람차 안에서 등 까보는 건데. 야, 너 이따 사람들 따돌리기만 하면 VJ고 뭐고 없어. 그냥 바로 등 까 볼 거니까 그런 줄 알어."
덜그럭거리는 탈을 부여잡고 달리는 소민의 귀에 그의 말이 들릴 리 만무했다.
그녀가 땀에 김장배추처럼 절여질 무렵 선유가 따라오는 게스트가 여자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남자 화장실로 냅다 달려 들어갔다.
따라오던 여자 게스트가 화장실 앞에서 선유의 이름을 몇 번 외쳐 부르더니 포기한 듯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댔다.
그래도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남자인 선유였다.
"야. 이제 됐으니까 너 등 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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