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망할 토끼탈. 거지같은 토끼탈.
혜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소민이 애매한 웃음을 물었다. 이걸 인정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다는 그런 표정.
“이 바닥에 있으면서 그런 것도 모를까봐. 다 알아. 근데 그 때 너 하는 짓이 귀여워서 내가 홀랑 넘어갔잖아. 뭐, 동창이 와서 졸업앨범 들이밀면서 협박하는데 안 넘어갈 수도 없고.”
“아하하하하하.”
협박이란 말에 웃는 소민의 얼굴을 보면서 혜민이 말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캐스팅하면 꼭 넘어올 거야. 다른 캐스팅 디렉터와는 다르게 귀여운 구석이 있으니까. 여자인 나한테도 먹혔다면 남자인 한선유한테는 당연히 먹히겠지. 그러니까 나한테 했던 것처럼 계속 들이대 봐.”
촬영 재개한다는 말에 혜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민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전화로 수도 없이 까여 막막했던 소민은 혜민의 격려 덕분에 힘이 났다.
“그래, 계속 들이대 보지 뭐, 까짓 거 지가 캐스팅 안 되고 배기겠어?”
그런 당돌한 결심으로 토끼탈을 쓰고 주변을 얼쩡거렸건만 결과는 이 모양이라니. 화장실 욕조에 걸터앉아 그녀는 혜민에게 칭찬을 듣기 전 내뱉던 한숨을 다시 내뱉고 있었다.
*
그리고 같은 시간, 소민이 사라지고 난 뒤 사인회 현장은 다른 현장보다 빠르게 그리고 정신없이 끝이 났고, 예정보다 일찍 끝난 사인회에 차로 돌아온 선유는 토끼탈을 옆자리에 집어 던지며 반은 황당한 반은 짜증이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님, 이거 오늘 마지막 스케줄이었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집으로 가.”
짧게 대답한 선유는 옆자리에 던져둔 토끼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스토커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니까. 뭐 연예인을 많이 봐온 까닭에 엄청 놀랄 만한 미모는 아니지만 확실히 시선을 끄는 외모이긴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망할 토끼탈. 언젠가 다시 보게 되면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겠어.”
토끼탈을 쓴 여자가 그에게 준 수모는 분명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둘이 있는 와중에 그랬어도 쪽팔릴 상황인데, 하물며 수많은 팬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게 끔찍한 그였다.
“이 망할 토끼탈. 거지같은 토끼탈.”
옆 자리에 앉은(?) 토끼탈을 괴롭히며 선유는 그렇게 몸부림쳤고, 그런 그를 보며 매니저인 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토끼탈을 괴롭히는 선유는 이제 집에 가면 쉴 수 있겠지만 자신은 전혀 상황이 다른 것이 새삼 억울하게 느껴졌다. 이 상황을 수습하는 건 둘째 치고 소속사 대표에게 혼날 일을 생각하니 급 피곤이 몰려오고 있었다.
선유를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호출을 받고 소속사로 들어온 준영은 사장실을 살그머니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소속사 사장은 그닥 좋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준영은 내가 죄인이오. 반성하고 있소. 하는 표정을 짓고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어, 왔어?”
“예. 사장님. 죄송합니다.”
“뭐가?”
뭐가라니? 이 사장이 아직 소식을 못 들은 건가 싶어서 준영이 입을 떼려는 순간 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오늘 팬 사인회? 괜찮아, 괜찮아. 선유때문에 놀라는게 한 두번이냐?"
물론 사장의 말이 백 번 맞는 말이긴 했지만 사장의 지금 저 반응은 이상했다. 아니 몹시 많이 이상했다. 득도라도 한 건지 자신을 쳐다보는 준영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던 사장이 준영의 옆자리로 왔다. 느닷없이 격의 없고 친밀하게 구는 사장의 행동에 준영이 몹시 놀란 사이 사장이 그에게 물었다.
“준영아, 네가 선유 매니저로 몇 년 일했지?”
“3년 됐습니다.”
“그래, 다들 1년도 안 돼서 그만뒀는데 넌 근성있는 놈이야.”
“예? 감사합니다.”
잘 버텨서 근성있다니. 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리고 있는 그에게 사장이 몹시 간곡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
“부탁말입니까?”
“그래.”
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사장이 저런 표정을 짓는가 궁금해 하던 준영이 사장이 하는 다음 이야기에 얼굴 가득 놀라움을 담았다가, 감탄 섞인 얼굴이 되더니 이내 감동받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사장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는 사장의 손을 덥석 부여잡고는 말했던 것이다.
“그런 귀인이 있었다니요. 제가 꼭 돕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준영의 말에 사장역시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도원결의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두 손을 굳게 부여잡았던 것이다.
여느 날과 같이 스케줄을 위해 선유를 차에 태우고 운전을 하던 준영에게 선유가 말을 걸었다.
“야. 준영아.”
“예. 형님.”
“팬 사인회에서 있었던 그 일 말이야.”
“예.”
“기자들도 많았는데 왜 기사가 안 나지?”
무슨 말을 하려 그러나 했는데 날아온 질문에 준영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 글쎄요?”
“흠... 사장이 수습했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긴 이골이 났겠지? 내 뒤처리쯤은?”
“예. 그렇죠, 뭐.”
그게 사장님이 한 일이 아니라는 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 능력은 정말 엄청나다 생각했다. 그리고 능력 뒤에 숨어 있는 세심함이 그에게는 크나큰 감동이었다. 일단 가십이 터지고 나면 제일 피곤한 건 소속사와 그였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돕기로 했던 것이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자신까지 배려한 그 마음에 감동받아서.
아마 다음 스케줄 현장에 도착하면 선유는 그야말로 사색이 되거나 있는 대로 화가 나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느새 눈을 감고 있는 선유를 슬쩍 쳐다보며 준영은 제발 무사히 촬영만 마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달리는 사람 예능 촬영 현장에 도착한 선유는 느긋하게 오프닝을 찍고 첫 미션 장소에 도착한 순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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