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누가 그거 벗겨 달랬어요?
잠잠해진 주변상황 덕분에 그녀와 선유의 대화가 확성기 없이도 잘 들리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유혹을 하는 대사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저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에 선유는 되묻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좀 벗겨 달라니까요?”
그녀가 다시 한 번 외쳤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선유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리며 재촉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선유는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일어서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그 역시 제정신이었다면 이런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는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그녀의 등 뒤로 가서 인형 옷에 달린 지퍼에 손을 대고는 내리려고 한 것이다.
그제야 사태파악이 된 소민이 황급히 비명 같은 소리로 외쳤다.
“꺅! 뭐하는 거예요!”
“벗겨 달라고 했잖아?”
“누가 그거 벗겨 달랬어요? 이 탈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선유가 자신을 향해 몰린 수많은 눈에 황급히 정신을 수습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자의 옷(정확히 말하자면 그래봐야 토끼탈에 연결된 옷이긴 하지만)을 벗기려 했다는 사실에 당혹감이 밀려온 그가 황급히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뇌리에는 그 유명한 연예인 한선유가 공공장소에서 여자의 옷(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래봐야 토끼탈에 연결된 옷인 그것)을 벗기려 했다는 것이 각인된 상태였다.
뒤늦게 사태수습을 하려 그가 황급히 다음 말을 내뱉었지만 역효과일 뿐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반말을 하는 그를 향해 그녀가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전화요. 전화 받아야 하는데 전화를 못 받겠어요. 빨리 벗겨 달라니까요? 전화가 내 밥줄이란 말이에요.”
전화가 밥줄이란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더더욱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그는 밥줄이 달린 전화를 받기 위해 토끼탈을 벗겨달라고 한 여자의 옷을 벗기려고 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그가 재빠르게 그녀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마치 그가 처한 상황이 우습다는 듯 밝게 웃고 있는 토끼탈을 벗겨냈다.
쏙! 하고 벗겨진 탈속에서 땀에 젖기는 했지만 완벽한 워터 프루프 풀 메이크업으로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모습인 소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는 탈이 벗겨지자마자 전화기를 귀에 가까이 갖다 댔다.
그리고는 이 상황에, 그리고 뜻밖의 미모를 가진 그녀의 모습에 멍하니 선 그를 홀로 남겨두고 전화통화를 하며 현장에서 유유히 멀어져갔다.
정말 사라지고 싶은 당사자인 그를, 토끼탈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둔 채로...
팬 사인회장에서 나온 소민은 이미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다가 슬슬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전화가 끊어진 것도 끊어진 것이지만 뒤늦게 밀려오는 팬 사인회장에서의 민망함과 토끼탈도 없이 토끼탈에 하의만 입고 돌아다니고 있단 자각에 여자 우사인 볼트라도 되는 듯이 냅다 내달려 자신의 차로 돌아온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완벽한 워터프루프 화장의 위엄에 안도하던 그녀는 이내 화장실 가득 메아리치도록 민망함이 가득한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신음소리로는 모자라다고 느꼈는지 세면대에 자신의 머리를 콩콩 박기까지 했다.
“으으으으. 역시 이번 건은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었어. 그 영감들 아주 교묘하게... 아니지 역시 그 놈의 술이 문제지 술이!!"
그렇게 내뱉은 그녀의 머리에는 얼마 전 이 일의 원흉이 된 사건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
“네. 소라씨. 그러니까 내일 오전은 현장에 안 나오셔도 되구요, 내일 저녁 7시부터 촬영 들어간다고 감독님이 그러셨거든요. 그러니까 그때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목소리만은 변치 않게 조심하며 그녀가 수화기 너머 상대의 비위를 맞추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요. 제가 알죠. 그렇게 밤샘 촬영을 하셔도 어쩜 그렇게 피부가 고우신지 제가 소라씨 쓰시는 화장품 다 찾아 쓰고 있잖아요. 소라씨가 광고하시는 파란화장품 저도 엄청 사 모으고 있죠.”
전화기 너머로 보이지 않는 배우에게 미소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입꼬리에 슬슬 경련이 오는 듯 어깨로 전화기를 바쳐 받으며 양손으로 입꼬리를 매만졌다.
“이거 쓰면 저도 소라씨 피부 닮을 수 있을까요? 많이도 안 바라요. 소라씨 반의반만 닮았으면 좋겠어요.”
귀를 후비던 소민이 일순 동작을 딱 멈췄다. 그리고 남이 보면 경련이라고 표현할 법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그래 주시면 저야 영광이죠. 네. 네. 그럼 내일 저녁에 촬영장에서 뵐게요.”
가식적인 웃음으로 통화를 마친 소민이 핸드폰을 침대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벅벅 긁어댔다.
“어우 닭 되는 줄 알았네.”
전화 통화할 때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톤으로 투덜거리는 그녀를 보며 그녀의 통화를 지켜보던 동생 민규가 혀를 끌끌 찼다.
“누나, 다른 사람들이 누나가 가면 쓰고 다니는 거 알아?”
“모르지. 알면 내가 어떻게 일하겠어?”
천연덕스럽게 저렇게 말하는 자신의 누나를 쳐다보는 민규는 세상 80%의 남자 형제가 공감한다는 누나의 이면을 목격하는 중이었다.
볼품없이 질끈 묶은 똥머리에 언제 산 건 지 알 수 없는 얼룩덜룩한 머리띠로 앞머리를 넘기고, 이소룡의 친자식도 그렇게는 못 입을 것 같은 노란 츄리닝을 아래 위 세트로 맞춰 입은 채 방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그녀의 모습은 행여 누가 볼까 겁났다.
하긴 어쩌면 저 모습을 하고 나가면 그녀가 업계 최고의 캐스팅 디렉터 채소민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밖에 나갈 때는 어떻게든 저런 모습을 숨기고 감춘다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 사람 노릇을 하는 건 다행이긴 했지만 일터에 나갈 때와 집에 있을 때의 모습이 어쩜 저렇게 다를 수 있는지 민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런 그녀의 성격을 세상 사람들은 다 모른다니 사기극도 이런 대 사기극이 없었다.
“누나,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연애하려면 집에서도 샤랄라 샤방샤방하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민규의 말에 소민이 자신의 방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도로 고개를 숙이더니 묵묵히 아이스크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누나. 누나. 누나. 이봐요. 어이, 누님?”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아이스크림에 몰두한 소민을 연신 불러봤지만 소민은 답이 없었고 그녀의 몰골을 내려다보던 민규가 누나의 저 모습을 탈피시키기 위해 자신의 불쌍한 친구들이라도 털어 연애를 시켜야하나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아이스크림을 다 먹었는지 소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고 있어.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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