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1화 (1/105)

1. 벗겨주세요

선유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가 있는 이곳에 나타난 허옇기 그지없는 토끼탈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열흘 사이에 나타난 저 토끼탈은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함께 했는데, 그의 소속사 앞, 혹은 촬영장에, 심지어 그가 들어간 화장실 앞에도 나타나 서 있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덤벼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니 뭐라고 할 수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 들이대고 덤비는 사생팬도 아니고 겨우 이만한 일로 신고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남자 체면에 말도 안 되는 일.

게다가 대한민국 여자라면 누구나 섹시하다,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남자답다 칭하는 그이기에 그는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다만 그는 궁금했다.

‘대체 저건 정체가 뭐야?’

사생팬에 관한 거라면 대한민국에서 그보다 잘 아는 사람이 또 없을 거였다.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가 제일 많이 그런 팬들에 시달려봤으니까.

불쑥 자택에 침입하는 건 기본이요, 집이 비어 있는 사이에 화장실에 들어와 그의 체취를 맡겠다며 바디워시를 훔쳐가질 않나, 그 때 사라진 아끼는 소장품들을 생각 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덕분에 지금은 어떤 사생팬에게도 뚫리지 않을 삼엄함을 자랑하는 성 같은 모습의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에게 허세가 심하다는 둥, 과소비라는 둥 말이 많았지만 딱히 개의치는 않았다. 그들의 집요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저 토끼는 조금 종류가 달랐다. 사생팬처럼 미행을 하기는 하는데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것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골목길 같은데서 뒤에서 튀어나와서 뒤통수라도 치는 거 아니야?”

“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고 그런 그의 상상의 나래를 낯선 목소리가 방해하고 나서자 그가 인상을 구겼다.

“뭐야?”

“저, 전 저,정하얀인데요. 한선유씨 팬인데...”

자신의 앞에 흰 종이를 든 앳된 소녀의 모습을 보고서야 선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저 토끼탈 때문에 자신이 지금 팬 사인회장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거다.

“우리 하얀이 미모가 아주 어느 날 골목길에서 보면 뒷통수 치게 예쁘게 생겨서. 그럼 우리 하얀이한테는 뭐라고 적어줄까?”

팬 사인회라는 것도 잊고 온갖 말을 중얼거렸던 그가 사태 수습을 위해 7,80년대 작업수법 같은 멘트를 날렸지만 콩깍지가 쓰인 그의 팬은 그저 좋아했다.

소녀 팬의 요청대로 사인지에 사인을 하고서 건네주려 고개를 들었을 때 예의 그 토끼탈은 시야에 없었다.

오늘은 일찍 갔구나 싶었는데 소녀팬이 사인지를 받아들고 옆을 비켜서는 그 순간, 줄 끝에 서 있는 토끼탈의 모습이 보였다.

‘대체 왜? 여태껏 가만히 보기만 하다가 왜?’

라는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러나 토끼탈 안에 있는 누군가가 독심술가가 아닌 이상, 그의 속생각을 알 리 없었고, 그가 사인을 하면 할수록 줄은 줄어들어 토끼탈은 서서히 한발짝 한발짝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토끼탈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으니...

업계 탑으로 꼽히는 캐스팅 디렉터, 채소민이었다.

저 앞에 앉아 팬들에게 쓰잘데기 없는 멘트를 던지며 사인에만 몰두하는 듯 보이는 한선유를 보며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녀가 누구던가? 업계 최강을 자랑하는 캐스팅 디렉터였다. 그런 그녀가 열흘이 넘게 캐스팅해야 하는 대상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닌다니!

사람들이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처음부터 쫓아다니려고 했느냐?

맹세코 당연히 아니었다.

그녀가 내쉬던 한숨을 집어삼키고는 토끼탈에 뚫린 구멍으로 한선유를 노려보며 자신이 이런 처지에 처하게 된 상황을 곱씹었다.

“여보세요.”

첫 목소리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목소리는 딱 그녀 취향이었다. TV에서 듣던 그녀가 좋아하는 음색과 톤이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여보세요를 한 까닭에 그녀는 하마터면 그녀가 전화를 건 목적을 잊고 “목소리가 섹시하시네요.”하고 말할 뻔 했다.

그렇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은 그녀가 신분을 밝힌 후가 문제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캐스팅디렉터, 채소민이라고 합니다.”

“소속사랑 얘기하는 걸로.”

“아, 물론 소속사와는 얘기를 했습니다. 소속사에서 한선유씨와 이야기ㄹ”

“소속사랑 얘기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전화통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그리고 수차례 전화를 더 했지만 한선유와의 통화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아니 차라리 받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결이 됐길래 전화통화 하려나 싶어 계속 들고 있던 내가 머저리지. 나쁜놈.”

그녀가 앞에 앉은 그를 새삼 노려봤다.

그는 통화버튼을 누르기는 했으나 연결한 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왜 통화버튼을 눌렀는지는 모르는 그녀는 그 상태로 1시간을 이제나 저제나 그가 말을 할까 지아비 기다리는 열녀처럼 기다렸었드랬다.

전화기가 곧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뜨거워진 후에야 그녀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그녀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아 열을 받을 대로 받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한 그녀가 처음 생각한 방법은 따라다니며 괴롭히기였다.

하지만 소문을 듣자하니 괴롭혔다가는 캐스팅은커녕 경찰에 신고만 당할 것 같았다.

그에게는 냉동인간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두 가지 의미였는데 외모가 불변이어서가 첫째요, 둘째는 사람들에게 차갑기 그지없다 해서 냉동인간이라 불린다 했다.

그런 별명답게 그는 일단 사생팬이다 판단되면 얄짤 없이 경찰서로 신고하는 눈치였다.

결국 그녀는 조심조심 그의 행적을 쫓아다니며 관찰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나중을 대비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토끼탈까지 쓰고 철두철미하게 그를 관찰한 것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열흘 간의 긴 미행 끝에 그녀가 알게 된 결과는...

이런 미행을 하면서 관찰을 하는 것은 그녀의 성미와는 도통 맞지 않는다는 것.

그거 하나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니 죽긴 내가 왜 죽어? 한선유가 죽거나 내가 살거나 둘 중 하나지 뭐.”

결국 같은 의미인 말을 중얼거리며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들린 시놉시스를 꾹 다시 쥐고는 한 발 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선유의 앞에 도착해 시놉시스를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그야말로 흥겹고도 경쾌한 우리네 가락이 울려 퍼졌고, 시선을 갈구하는 가사와 일치하게 그녀를 향해 시선이 몰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맹세코 자신의 벨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액정에 뜬 전화기 모양이 네 전화가 맞다고, 어서 받으라고 눈짓을 하고 있었다.

벨소리를 바꿔 놓은 범인이 누구이건 지금 이 쪽팔림을 무릅쓰고 전화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채소민, 그녀 자신이었다.

주변에서 새어나오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심지어 협상을 해야 할 한선유마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 상황에 당황을 금치 못한 그녀가 잽싸게 홈키를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나 상대방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혹시 끊어졌나 싶어 얼른 다시 화면을 봤지만 화면에는 분명 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던 토끼탈이 떠올랐다. 한손에는 전화 한 손에는 시놉시스를 든 그녀는 벨소리에 당황하고, 어서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토끼탈을 벗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녀는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그리고 누가 봐도 이상한 극단적인 방법으로 탈을 벗으려 했다.

“벗겨주세요.”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한창 팬 사인회로 인해 웅성거리던 주변을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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