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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코인 채굴-236화 (완결) (236/236)

236화

“의원님, 깨어나셨습니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박승기는 눈을 떴다. 보좌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아무리 봐도 보좌관의 얼굴이 맞다. 변이체들로부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져 희생했던 보좌관. 그런 그가 어떻게 멀쩡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인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흐흠?”

“곧, 자양 시장에 도착합니다.”

“시장?”

“예, 오늘 자양 시장에서 유세를 하기로 하셨잖습니까.”

그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본다. 거리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다. 가게 역시 문을 열었다. 아이스크림 가게, 타코 가게, 우동 가게···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화로운 도시의 풍경이었지만, 동시에 그에게는 한없이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그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유세··· 그랬었지. 근데 그게 전부 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이었단 말인가.”

무려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꿈속 세상을 현실이라 믿으며 생활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그가 유세장으로 향하는 길에 꿨던 찰나의 꿈에 불과했다니. 물론 현실이 아니라 다행이다. 꿈속 세상에서는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졌고, 지구 인구의 태반이 목숨을 잃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가슴 깊숙이 치밀어 오르는 허무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예?”

보좌관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박승기는 고개를 절래 저었다.

“···아닐세. 이 나이 먹으니까. 별 뒤숭숭한 꿈도 다 꾸는군.”

그들은 곧 자양 시장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한 선거 차량을 보고 몰려든 시민들을 향해 그는 손을 들어 올린다.

“안녕하십니까, 광진의 아들, 박승기입니다.”

“오오오!”

정신없이 선거 유세를 했다. 자양 시장을 돌면서, 시장 상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지지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바로 그때였다. 한 청년이 그에게 다가왔다. 겉보기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청년. 그러나 박승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청년을 본 적이 있었다.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데자뷔 현상인가···’

그는 소름이 끼침과 동시에, 한편으로 흥분되기 시작했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에.

“자네는···”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의원님.”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가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의원님, 아시는 분이십니까?”

보좌관이 그에게 물었다. 박승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여기서 대기하고 있게.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있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는 보좌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청년을 바라봤다.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청년과 함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를 알아본 시민들이 그에게 다가왔지만, 그는 그들의 손을 잡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청년을 따라 걸었다. 그들은 곧 인적이 드문 거리에 도착했다. 따라오는 시민들은 있었지만 소수였고,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박승기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뭐가 말입니까?”

“이 세계 말일세. 어떻게 죽은 보좌관이 멀쩡히 살아있고, 이 도시도 멀쩡한 거지?”

“‘이 세계’에서 의원님의 보좌관은 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숨에 청년이 말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내가 있던 세계와 다른 세계라는 건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는 코인 채굴기로 변하지 않은 세계, 즉 변이체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은 세계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창조? 무슨 신이 되기라도 한 건가?”

청년- 이진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웃었다. 그러나 박승기는 그것이 긍정의 침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신이라니···’

그는 자세한 내막을 알진 못했지만, 이진서가 그가 알던 그보다 한층 더 상식을 초월한 존재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된 건가? 혜연이나, 민혁이 같은 그룹원들 말일세.”

“대부분 이 세계 안에 있습니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얼굴 몇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건 다행이군. 그나저나 나를 찾아온 목적이, 단순히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이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진 자네의 부탁이라니, 슬슬 두려워지는데··· 뭔가?”

“관리직을 맡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관리직이라니?”

“말 그대로 이 세계를 관리할 관리직입니다.”

“어떻게 관리한다는 건가?”

“···수락하신다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맡아주시겠습니까?”

“···자네가 그러니까 괜스레 더 불안해져서 거절하고 싶은데.”

“거절하고 싶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박승기는 고민했다. 거절이냐, 승낙이냐. 그러나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야, 사람 관리하는 일엔 이 박승기가 제격이지.”

평생 좌우명이 ‘후회할 짓을 하지 말자’였던 그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곳에서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의 생각을 읽은 이진서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박승기에게 손을 뻗었다. 강렬한 빛과 함께, 박승기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이 초록색 물이 가득 잠긴 유리 수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푸어푸, 그는 물속에서 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이내, 물속에서도 숨이 쉬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얌전해졌다.

그런 그에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룹의 간부들이었다.

“의원님,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신수가 좋아지셨네.”

“문주, 순철이 자네들···”

반가운 얼굴들의 등장에 그는 눈물이라도 왈칵 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때, 뒤에서 새초롬한 표정의 진혜연이 입을 열었다.

“저도 있거든요? 배신자다, 배신자.”

“혜연아, 어허, 배신자라니··· 그나저나 나 여기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나?”

“지금 꺼내 드릴게요.”

버튼을 누르자, 유리 수조 안의 물이 점점 빠진다. 그는 그의 몸에 부착된 플러그를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열린 앞문으로 나왔다. 그는 동시에 이곳이 전함 내부라는 사실과, 이 공간에 그처럼 사람이 담긴 유리 수조들이 잔뜩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타난 정민혁이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는 수건을 받아 들어 몸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아냈다.

“환영합니다, 의원님. 모선 – 노아입니다.”

“노아라··· 아직은 얼떨떨하지만··· 어쨌거나 환대해줘서 고맙네. 그나저나 이건 다 뭔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으로 정민혁을 바라보는 박승기. 그는 수조 안에 있는 사람들의 정체가 그룹원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형님이 만드신 세계로- 오퍼레이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이브(Dive)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러면 나는 실제로 그 세계 안에 있었던 게 아닌가?”

“아뇨, 그 세계는 분명 형님이 만드신, 실존하는 세계입니다. 다만 그 세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이 전함 내부에 있는 코어- 그러니까 일종의 장치를 이용해야 할 뿐입니다.”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혼란스러운 낯빛으로 말했다.

“이진서, 그 친구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겠군. 뭐가 뭔지를 모르겠어.”

“지금 형님은 이곳에 안 계십니다.”

“나한테 도착하면 설명해준다고 했는데? 이곳에 안 있으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민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저 우주 공간 어딘가에서 전투 대기 중이실 겁니다.”

“전투?”

“이 우주의 존망이 걸린 전투라더군요.”

“우주의 존망?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닌 모양이군?”

“예,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그렇게 말한 정민혁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이진서는 그에게 두루뭉술하게 말해줬을 뿐이니까. 그렇다고 그로서 따로 알아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형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당신이 패배해 우주가 멸망하더라도, 이 전함은 괜찮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전함의 이름이 노아였나?”

“예, 노아의 방주 할 때, 그 노아가 맞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 친구가 또 우리를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은 알겠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정민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형님께서 꼭 돌아오실 거라 믿습니다.”

“그래, 나도 그 친구가 꼭 돌아올 거라 믿네. 어쨌거나··· 이제부터 뭘 하면 되는가?”

“말 그대로 이 전함의 관리입니다. 이 전함, 보기보다도 훨씬 커서 항상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거든요.”

전함 – 노아. 그 모태는 모선 – 알로비스트로 한때 컴퍼니의 대장함이었던 전함을 이진서가 직접 개조해 만들었다. 그 크기가 파괴자의 수십 배, 일반 타이탄급 전함의 수백 배에 달하는 만큼 전함은 거대했다. 그리고 그런 전함에 실린 건 물경 수십만 이상에 달하는 우주 생명체들. 전부 이진서와 크던, 작던 연(緣)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그는 정치인 특유의 감으로 어렴풋 짐작했다. 관리직이 그가 생각하는 평범한 관리직이 아니라는 걸.

“···그냥 지금이라도 관리직 포기하면 안 되겠나?”

“그건···”

“미안하지만, 포기는 허가하지 않겠어요.”

“안 된다네요.”

생소한 여자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주홍색 머리 소녀- 오퍼레이터, 미야가 그를 보며 생긋생긋 웃고 있었다. 곧, 그녀가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게 입을 열었다.

“새로운 노예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

전함 - 노아와 수십억 광년 떨어진 자그마한 행성계에서 나는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박승기가 관리직을 맡는 것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작 그런 전함 따위에 그 위대한 힘을 20%나 낭비하다니···

벨 크라운의 목소리였다.

그는 내게 흡수됐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내게 말을 거는 등의 행위까지 가능했다. 물론 그를 제거하려면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앞으로 이어질 전투에 대한 조언을 구할 심산에서였다.

“저 방주는 제게 있어서 모든 것입니다.”

- 가뜩이나 불리한 전투를 더 불리하게 만들어서 어쩌자는 거지?

“너무 타박하지 마십시오. 이제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자만하지 마라, 상대는 신이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검을 들었다. 이내, 공간을 가르며 신이, 정확히 말하면 신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즉시 검을 휘둘렀다. 문답무용. 그에게 일말의 여유조차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손쉽게 검기를 받아냈다.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색 보호막.

신성도, 그렇다고 내가 알고 있던 신의 힘도 아닌, 처음 보는 생소한 힘이었다. 거대한 거인 형상의 그가 선고하듯 입을 열었다.

“너희 우주의 ‘관리자’가 죽었다. 따라서 너희 우주 역시 폐기하겠다.”

나는 그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당신이 알던 관리자는 죽었지만, 저는 그 힘을 물려받았습니다. 제가 관리자를 대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엔, 너는 그 힘의 사용에 미숙해 보이는구나.”

나는 이를 꽉 깨물며 검을 들었다. 사실 그에게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승산이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나타나고 난 후에 깨달았다. 그는··· 지금의 내게도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얌전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결사항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방주는 무사하겠지.’

“하지만 당분간 지켜보도록 하겠다.”

“그 말은?”

“보류하겠단 말이다. 하지만 잊지 마라. 어디까지나 보류 판정이 난 것뿐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나는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거면 방주는 왜 만들었단 말인가?

“끝난 겁니까?”

벨 크라운의 목소리 역시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 ···그런 것 같군.

물론 허무함은 금세 사라지고, 기쁨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얼마 뒤에나 올까요?”

- ‘그들’의 시간 개념은 우리와는 다를 것이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수천, 수만 년 뒤일지도 모르지.

“지금 당장만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수천, 수만 년 후에 이 우주가 멸망하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방주로 눈길을 돌렸다. 방주는 여전히 순항 중이다.

‘이제 어쩔까.’

이내, 나는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당장 내일 멸망할지 모르는 이 우주에서 나 역시 그룹원들과 함께 단꿈을 즐기기로 말이다.

-<나 혼자 코인 채굴> 완-

K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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