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코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연병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총을 발사하고, 내가 그의 탄환을 막아낸 이 일련의 과정은 그의 인지를 한없이 초월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에게 설명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곧바로 그의 총구가 내 머리를 향했기 때문이다. 나는 탄환을 굳이 피하지 않고, 손을 뻗어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탄환은 내 머리를 꿰뚫었지만, 동시에 ‘화성’이 그의 몸에 날아들었다. 지구보다 거대한 행성이 그의 몸을 흔적도 없이 파묻어 버린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연병수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
“병수야. 미라랑 같이 피해 있어. 아니, 피할 데도 없지.”
어차피 이 우주 어디로 도망치던 별 의미는 없었다. 그 사이, 화성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속박에서 벗어난 그가 나를 향해 또다시 총을 겨눴다. 그때였다. 엔진 소리와 함께, 달에서 모습을 드러낸 전함 한 기가 그를 향해 주포를 날렸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온 파괴 광선은 정확히 벨 크라운의 몸을 때렸다.
쾅-!
거대한 폭발이 뒤를 이었다.
- 쓰러트렸나?
나는 쓰게 웃었다.
“트레이, 저 양반이 플래그를 세우네.”
분명 파괴 광선의 위력은 상당했다. 제논 족의 기술을 사용해 만든 주포. 거기에 기프트까지 더해졌으니, 그 위력은 한층 더 배가됐을 것이다. 그러나 위력이 얼마든, 그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폭발 속에서 벨 크라운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내, 멀쩡하게 걸어 나온 그는 나를 향해 칭찬하듯 말했다.
“좋은 동료들이군.”
“감사합니다.”
무언가 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그에게 이번에는 거대한 불의 검이 그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불의 검의 소유주를 바라본다. 이프리트의 본체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를 소환한 소환사를 쳐다본다. 그녀는 검은색의 갑주를 걸친 채 도도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우러 왔어.”
라우라.
“···적은 저놈 하나인가?”
나는 대꾸하지 않고 쓰게 웃었다. 이프리트는 어느새 더욱더 크기를 키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그의 검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붉은색의 섬광은 그의 몸을 꿰뚫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프리트는 존재 자체가 소멸됐다. 라우라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프리트? 이프리트?”
나는 시간을 되돌려, 이프리트를 살려낸다. 이프리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프리트,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섬광이 또다시 되살아난 이프리트의 미간을 꿰뚫었다. 이번에도 대꾸하지 못하고, 이프리트의 몸이 또다시 흩어진다.
“나중에 살려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살려봐야 지금은 의미가 없을 것 같네.”
그가 듣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벨 크라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령계의 왕. 강한 존재지만, 그래 봐야 너와 나에게는 약자일 뿐이다. 저들 역시 마찬가지지.”
나는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직접 계약자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 숫자는 하나도 아니고, 수십, 수백··· 이프리트와 비교해도 격이 떨어지지 않는 신성을 가진 강대한 신격들도 여럿 보였다. 그들 중엔 내가 알고 있는 얼굴들도 있었다. 지혜의 신, 미미르라던가, 빛의 신, 루라든가···
그러나 그런 그들의 얼굴은 어둡기 짝이 없다. 방금 전 이프리트가 소멸한 것을 보고 그들은 느꼈을 것이다. 벨 크라운은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돌격을 감행한다. 마치 최후의 항전을 하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통찰안을 사용한 후, 중얼거렸다.
“강해져라.”
지배 능력을 사용하여, 그들의 육체를 강화했다. 물론 그저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을 뿐, 무언가 기대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히 그들의 몸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벨 크라운은 그들을 향해 탄환을 날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탄환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보호막에 의해 가로막혔다.
‘어떻게?’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탄환이 아니다. 지금 그가 날리는 탄환 한 발이면, 어지간한 은하계 정도는 가뿐하게 파괴될 것이다.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선 그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막아낸 것이다. 혹시 봐줬나? 하고 벨 크라운을 쳐다봤지만, 그 역시 조금 당황한 듯한 기색이었다. 즉, 그들이 그의 힘에 저항한 게 맞다.
그사이, 벨 크라운의 앞에 도달한 거대한 악마족이 그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물론 도끼는 그의 손가락에 의해 가로막힌다. 그러나 나는 미약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가락에 생긴 작은 상처를. 직후, 발사된 탄환에 의해 악마족의 상반신은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 남은 하반신을 밟고 도약한 빛의 신, 루가 빛의 검을 뻗었다.
과연 괜히 빛의 신이라 불렸던 게 아닐 만큼 그녀의 검은 신속했다. 그러나 그녀의 검이 벨 크라운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그가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악마족의 하반신을 들고 무기처럼 휘둘렀기 때문이다. 악마족의 다리에 정통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그녀가 마치 밟힌 토마토처럼 으깨지고 말았다. 그녀는 강렬한 빛과 함께 그대로 소멸돼버렸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마치 그가 U-999의 행성계에서 펼쳤던 것처럼 거대한 블랙홀을 소환해, 그를 빨아들여 버렸다. 그는 인상을 조금 찡그렸으나, 별 저항하지 못하고 블랙홀에 빨려들어 갔다. 물론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공격을 통해, 시간을 번 것 역시 사실이었다. 나는 내 옆에 다가온 여신을 바라본다. 그녀는 미약하게 웃고 있었다.
“직접 보는 건 꽤 오랜만이구나. 조금 더 일찍 불러줬으면 좋을 텐데···”
“미미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녀라면 무언가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물어본 것이었다.
“왜, 생각보다 우리가 잘 싸워서 그러느냐?”
“예,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네가 우리에게 힘을 줬지 않느냐.”
“하지만···”
“수천 년의 시간 동안 기프트를 다뤄온 우리다. 아니, 저 중에는 수만 년의 시간을 다뤄온 이도 존재하지. 즉, 기프트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우리도 만만치 않다는 소리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그들에게 건넨 힘은, 나와 벨 크라운이 가진 힘에 비하면, 드넓은 바다서 물 한 바가지를 푼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힘을 가공해서 더 높은 출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신의 힘을, 기프트를 직, 간접적으로 다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건, 그를 쓰러트릴 실마리일지도···’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찰나의 시간, 블랙홀에서 빠져나와 신들을 모두 처치하는 데 성공한 그는 빼앗은 루의 검을 내게 휘둘렀다. 내 몸이 단숨에 양단돼버린다. 그러나 나는 웃었다. 내 힘에 의해 되살아난 신들이 그의 몸을 대신 공격했다.
“우어어···! 힘이 흘러넘친다!”
방금 전 상반신이 날아간- 사탄이라는 이름의 악마족은 힘에 취한 듯 그렇게 소리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그의 도끼는 단숨에 베었다. 물론 그를 베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그의 몸은 오히려 둘로 갈라졌다. 멍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몸이 둘로 갈라졌는데 대체 소리를 어디서 내는 것인가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몸은 다시 합쳐졌다. 내가 어떠한 수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어떠냐? 이게 바로 우리 악마족의 재생 능력이다···!”
확실히 그가 자랑하듯, 그의 재생 능력은 일반적인 재생의 범주를 한없이 ‘초월’해 있었다. 머리가 두 쪽이 나고도 재생하는 걸 과연 재생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벨 크라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떨어져라.”
우리가 있는 우주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번개가 떨어졌다. 그러나 번개는 우리에게 닿기 직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마도사, 연병수였다. 그의 외형은 조금 변해 있었다. 나는 그가 ‘마인화’를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마법 능력에 마력을 무제한으로 늘려주는 마인화가 더해졌다.
물론 마력이 무제한이라고 한들 방금 벨 크라운이 사용한 번개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할 터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형님의 힘을 받은 모양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마법 능력에 한해서는 가장 대단한 대마도사, 옐레나의 재능을 고작 이 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추월할 정도로 대단한 마법 재능. 그는 내게 받은 ‘신의 힘’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응용해, 마법에 섞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 그 응용 방법은 지금의 나조차 놀라게 만들 정도였다.
다른 신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가 플레이어가 된 지는 일 년 조금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얘가 나 대신 신의 힘을 가졌더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연병수가 나 대신 신의 힘을 가졌더라면, 어쩌면 벨 크라운을 ‘가볍게’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물론 그저 한번 재밌는 가정을 해본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그는 나처럼 신의 영혼을 각성하지 않았으니, 신의 힘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병수야, 힘내라.”
나는 그를 서포트하기로 했다. 그를 죽이면 부활시키고, 그에게 날아오는 공격을 막고. 연병수는 마법을 사용해 그를 압박했다.
“그랬군.”
내가 실마리를 얻었듯, 벨 크라운 역시 실마리를 얻었다.
“네가 좋은 동료들을 가졌듯, 나 역시 좋은 동료를 가졌지. 영령전을 개방하겠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늘에 거대한 문이 생겨났다.
“형님, 저건 뭡니까?”
연병수의 물음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나라고 해서 알 리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문은 위험하다는 것. 문을 향해 블랙홀을 생성했지만, 오히려 블랙홀은 거대한 문에 의해 흡수돼버리고 말았다. 곧, 거대한 문이 열린다. 그리고 나는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문의 내부에 있는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 만에 달하는 영혼들을.
나는 통찰안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그 영혼들 사이에, 내가 소환했던 영령들도 섞여 있다는 것을. 그 밖에도 그들 하나하나가 이 우주에서 이름깨나 날렸던 영혼들 뿐이었다.
“아···”
연병수가 탄성을 흘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옐레나의 영혼이 둥둥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