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마치 역재생을 한 것처럼 시간이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시계. 시간을 되돌리는 권능. 물론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일어난 파괴 행각을 되돌리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기프트가 필요하겠지만, ‘신의 힘’을 각성한 내게는 더 이상 기프트가 필요하지 않았다. ‘회귀한’ 시에니와 미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시에니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방금 전 한 말과 똑같지만, 의문형이 붙었다. 이번에는 시간이 되돌아가는 장면 역시 목도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설명해 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고치에서 갓 변태를 마친 ‘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배경이 전환된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우주 공간. 이곳에 통찰안의 4단계 시험장을 구현한 것이다.
신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채 동작을 인지(認知)하기 전에 이미 그녀의 손이 내 심장을 뚫고 지나간다. 나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다시 부활한다. 내가 구현한 건 단순히 배경뿐만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간의 법칙까지 고스란히 구현했다.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그녀는 부활한 내게 손을 뻗어왔다.
간결한 동작. 내 심장은 또다시 그녀의 손에 허무하게 꿰뚫린다.
공격은 고작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초를 헤아릴 수 없는 단위로 쪼갠 ‘찰나’의 순간, 나는 죽고, 또 죽었다. 그러나 이 공간 내에서 죽음은 무의미했다. 결국 신은 나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이 공간 자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금색으로 번쩍이자, 공간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손에 잡히는 몽둥이.
<최초의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가지>
종류 : 무기
등급 : 신화(God)
내구 : ∞/∞
옵션 : 파괴 불가, 불살(不殺), 체력 +77.77, 체력 회복 속도 +777%.
일전에 동화 세계 속에서 발라르를 후려 팬 적이 있던 최초의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가지였다.
그러나 ‘파괴불가’라는 옵션이 달려 있는 것이 무색하게도, 몽둥이는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바스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공격을 피해낸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들었다. 재생성된 몽둥이에 신성을 싣는다. 백금색으로 물든 몽둥이를 신을 향해 휘두른다. 퍽! 이번에는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했고, 그대로 그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순간, 데미지가 반사된 것처럼 내 머리 역시 함께 터져나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원상 복구된다. 나는 깨달았다. 이래서는 끝이 나지 않는다는 걸. 이렇게 평생 싸울 수 있지만, 어느 쪽이 포기하기 전까지 승패가 갈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혹시 대화가 통할까,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 전, 구현된 블랙홀에 의해 빨려 들어갔다. 블랙홀은 단순히 나뿐만 아니라, 이 우주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해졌다. 공간을 이루고 있던 법칙이 무너졌고, 나 역시 죽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살아있었다. 굳이 이런 공간을 만들지 않아도, 죽음이라는 ‘법칙’은 내게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설령 몸이 원자 단위로 분해된다 한들 이제 죽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다시 몸이 구성되자, 중얼거렸다.
“없어져라.”
블랙홀은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춘다. 그러자, 블랙홀이 사라진 자리에서 기다렸다는 듯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다시 돌아온 현실- U-999의 행성계 전체를 뒤덮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폭발이었다. 전함들도, 시에니도, 미야도 그대로 잔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아니, 단순히 이 행성계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산불이 번지듯 폭발은 인근의 다른 행성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저대로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폭발은 더욱더 사이즈를 키워 우주 전체에 번질 것이다. 우주를 멸망시킬 힘. 물론 나는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통찰안을 사용해, 우주의 시간을 되돌렸다. 또다시 우주는 원래의 형상을 되찾는다. 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신의 얼굴을 살피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대화를 하는 게 어때?”
그러나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 내 온몸은 수십 토막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아직, 그녀는 별로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반복된다. 현실의 시간으로 따지면 1초도 되지 않을 정도의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 찰나 동안 이 우주는 수십 번 위기를 맞이했고, 극복했다. 무수한 시간의 굴레가 흐르기 시작했다.
정신력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신이 처음으로 변화를 보였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감정이 어린다. 나는 그녀를 후려갈기려던 몽둥이를 멈췄다.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주도권을 되찾았다.”
“당신은···”
나는 지금 입을 연 이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컴퍼니의 초대 회장인 벨 크라운이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군.”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투 끝에, 그의 영혼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나저나, 그건 내 몸인가. 썩 유쾌하지는 않군.”
나를 보며 쯧쯧 혀를 차는 그에게 나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 몸이 그의 것이고, 내가 그의 몸을 빌린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없다. 어차피···”
그의 손이 내 목을 날려버린다. 뎅겅. 상체와 분리된 채로 내 머리는 그대로 우주 공간 아래로 떨어진다.
“굳이 싸우려는 이유가 뭡니까?”
다시 회귀한 나는 목을 매만지며, 그에게 물었다. 그도 우리 둘이 싸우면, 이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싸우려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한 하나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받아들여라.”
“죽으라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죽으라는 게 아니다. 이 힘을 사용하면 너 하나 창조하고, 네가 바라는 ‘소망’을 이뤄주는 건 일도 아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주 공간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지구의 풍경으로. 지구에서 그룹원들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나는 단순히 풍경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이곳이 정말 지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벨 크라운은 손을 뻗었다. 그를 막으려고 손을 들었던 나는, 이내 손을 내려놨다. 지구의 시간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1년 전, 2년 전, 코인 채굴기가 되기 이전의 세상으로.
‘복원된’ 지구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니고, 지상에는 동물들과 곤충들이, 그리고 수많은 인간들··· 그의 말처럼 지금 그의 힘이라면,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이라 하더라도 살려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행성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쯤은 그에게 간단한 일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나 역시 가능한 일 아닙니까.”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한 건, 지금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폭발을 막기 위해, 우주의 시간을 되돌렸던 나인데, 이런 자그마한 행성의 시간 하나 돌리지 못할 리가 없지.
“그래, 할 수 있지.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고 싶은 건 그게 전부 아닌가? 너는 이 우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
“물론 지금의 너는 나와 동등한 힘을 가졌다. 하지만 네게는 가장 중요한 ‘대의’가 결여돼있다. 내 대의는 이 우주를 번영하고, 다가올 거대한 위협에 맞서는 것이다. 네 대의는 뭐지?”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그런 엄청난 대의 같은 건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내가 아는 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유일한, 소박한 목적이었다. 그는 그런 내 생각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그런 사소한 목적 때문에 이 대단한 힘을 가지겠다고? 네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확실히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면 내 요구를 들어주는 건가?”
“그건···”
나는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의 말처럼, 대의를 품은 나보다, 그가 더 이 힘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아틸라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성을 잃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엷게 웃으며 내게 손을 건넸다. 그것은 적의가 담긴 행동이 아닌, 악수였다. 그의 손을 잡는다면 더 이상 골치 아프게 생각할 것 없이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고개를 짤막하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어째서지?”
“당신은 당신의 계획을 달성하겠다고, 사소한 것들을 짓밟았습니다. 제가 경험한 동화 세계에서 당신은 전부 악역 내지 흑막으로 나오더군요.”
라그나로크를 일으킨 존재가 누구일까? 발라르의 행성, 테라에 신의 유해를 퍼트린 존재가 누구일까? 제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신의 육체를 풀어놓은 존재가 누구일까? 그 밖에도 내가 겪었던 동화 세계들은 직, 간접적으로 그, 혹은 그의 계획과 연관이 있었다. 동화 세계는 기록자의 양심이 담긴 회고록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의를 위한 사소한 희생이었을 뿐이다.”
“악당의 흔한 레파토리네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신과 달리, 저는 그 사소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 대의를 이루고 나면, 사소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거늘. 그러나 네가 내 선택을 존중하듯이 나 역시 동시에, 네 선택을 존중한다.”
그는 내려놨던 손을 다시 들었다. 나는 그제야 손을 맞잡았다. 그는 엷게 웃었다.
“이제 결판을 내지.”
잠시 간의 평화는 끝났다. 그는 총을 쥐는 시늉을 했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생겨났다. 발라르가 쥐고 있던 것과 똑같은 권총.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 뻗어나간 탄환이 내 머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나 역시 몸을 움직여 들고 있던 몽둥이를 투척했다. 몽둥이는 그대로 그의 상체에 직격했다. 물론 우리 둘 다 죽지 않고, 금세 재생해버린다.
직후 날아온 탄환에 온몸이 꿰뚫려 버렸지만 말이다. 나는 몸을 재생하지 않고, 잠시 그를 탐색했다. 그러자, 그는 권총을 지구를 향해 겨눴다. 나는 황급히 몸을 재생하고, 그를 막아섰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 찰나의 순간, 탄환은 그대로 지구를 향해 떨어졌고, 지구는 그대로 산산조각 나 버렸다.
지구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남은 이들은 존재했다. 새하얀 빛과 함께 우리 앞에 로브를 걸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병수. 그는 나를 보자 둥그런 눈을 떴다. 탄환이 그에게 발사된다. 나는 손을 들어 탄환을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