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급이라는 말처럼, 전함 간의 전투 역시 다르지 않았다. 타이탄급 전함 수십 기를 합친 것보다 거대한 파괴자 앞에서 타이탄급 전함은 종잇장처럼 찢겼다.
- 뭐, 저런 괴물이…!
- 피해!
여섯 번째로 건조된 파괴자 ‘리사’의 함장, 이고르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파괴된 컴퍼니 측 타이탄급 전함들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배다.
그는 이 파괴자를 타고 있노라면,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우월함을 느끼곤 했다. 아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력한 행성신들조차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 파괴자였으니 말이다.
동료를 잃은 타이탄급 전함들은 허둥지둥 선회하여, 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부스터를 발동하자 파괴자가 그들의 뒤를 빠르게 쫓기 시작한다.
번쩍-!
또다시 파괴 광선이 발사됐고, 도망치던 패잔병들을 완벽하게 소탕했다. 그는 천천히 무전기를 들며 중얼거렸다.
“임무 완수, 다음은…”
바로 그때였다. 그의 앞의 우주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는 그것이 무슨 전조 현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워프. 무언가가 워프해올 때, 저런 현상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우리 측인가?’
아니, 스스로 자문(自問)했던 그는 곧 부정했다.
아직 지도부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 컴퍼니. 컴퍼니 측에서 이곳으로 전함을 보낼 이유는 차고 넘친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라거나, 동료들을 격침시킨 파괴자를 격침시키기 위해서겠지. 그러나 그래 봤자, 타이탄급 전함일 터. 이 파괴자 앞에서는 사냥감에 지나지 않는다.
이고르는 부함장을 향해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
“먹잇감이 늘어났군.”
“그러게 말입니다.”
부함장 역시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나 곧 워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전함을 본 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다. 그들이 탑승하고 있는 파괴자보다도 수십 배는 거대하다. 행성 크기.
‘아니, 저런 크기의 전함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얼이 빠진 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그의 귓가에 시에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퇴각하십시오. 모선 – 알로비스트입니다.
“모선이라는 말은?”
- 기록자가 탑승한 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서서히 이성을 되찾기 시작한다. 이번 전쟁을 일으킨 기록자가 탑승한 전함. 그 말은, 이곳에서 저 전함을 기록자와 함께 불태워버리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이 우주는 영원히 내 이름을 기억하게 되겠지.’
그의 얼굴에 욕심이 어린다. 전공을 올릴 기회.
“가자.”
그가 탑승한 파괴자는 행성이라 하더라도 단숨에 박살낸 전적이 여럿 있었다. 설령, 그 대상이 행성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전함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발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퇴각을 권고합니다.
그러나 이미 욕심이 그득한 그의 귀에 시에니의 충고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파괴자는 모선을 향해 주포를 겨눴다. 수백 개의 플라즈마 주포들이 충전을 시작한다.
충전은 금세 완료됐고, 일제히 발사됐다. 날아간 파괴 광선들은 모선에 정확히 명중했다. 쾅! 대폭발이 일었다. 이고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이럴 수가…”
파괴 광선은 모선을 둘러싼 금색의 보호막에 가로막혔다. 모선 – 알로비스트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달아나야 된다. 달아나!”
하지만 뒤이은 파괴 광선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파괴자급 전함 ‘따위’는 단숨에 파괴할 정도로 거대한 섬광. 파괴자도, 함장인 이고르도, 부함장도, 안에 탑승한 선원들도…
한순간에 소멸해버렸다.
“저게 파괴자인가?”
기록자, 마셀러스의 말에 부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조잡하군.”
하이낸스의 역작이라 불리는 파괴자조차 그에게는 조잡한 전함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탑승한 모선 – 알로비스트에 비하면 저 파괴자는 ‘벌레’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역시 불나방답구나. 스스로 목숨을 단축하다니…”
그들은 파괴자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만약 도주했다면, 굳이 쫓을 생각은 없었다. 벌레 하나에 관심을 두는 것은 오히려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레는 먼저 공격을 가해왔고, 그들은 벌레에 대한 응징을 한 것이다. 벌레의 죽음은 그들의 뇌리에서 금세 잊혀졌다. 마셀러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곧 도착하겠군.”
“예, 군단이 집결 중입니다.”
“곧바로 전쟁에 돌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이미 군단장들에게 개별 명령을 내렸습니다.”
곳곳에서 임무를 완수한 군단장들은 한 곳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바로 U-999. 하이낸스의 본거지이자, 지금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였다.
지금껏 이 우주가 겪은 적 없던 대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어쩌면 우주의 흥망성쇠를 좌우할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런 대전쟁을 목전에 둔 마셀러스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
나는 발라르와 함께 워프 포탈을 사용해 U-999로 이동한다는 선택지를 내렸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죽음’밖에 존재하지 않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함께 우주선에 탑승해, 우리는 U-999의 행성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행성계로 진입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무수한 전함들. 처음엔 별이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다.
군데군데엔 일전에 봤던 파괴자도 여럿 보였다.
“곧 전쟁이 시작되려는 모양이군.”
그의 말처럼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 그런 거 같군. 그런데 어떻게 가지? 그냥 다가가서 보내달라고 하면 되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발라르와 함께 온 이상, 하이낸스는 더 이상 이진서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발라르를 버리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 죽고, 너 죽자 식으로 나온다면 내가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하이낸스의 삼엄한 경계를 피해 가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건데?”
[곧, 빈틈이 생길 겁니다.]
“곧?”
[발라르의 말처럼 곧,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빈틈 역시 생길 겁니다.]
“그러면 그냥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건가?”
[…일단 가까운 행성에 피신해있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나는 발라르를 바라봤다. 그는 이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광속을 몰아, 가까운 곳에 있는 행성으로 향했다. U-312.
온통 얼음으로 가득한 행성. 생명체가 거주하는 행성은 아니었다. U-312에서 우리는 기다렸다. 시스템이 말한 대로, 전쟁이 시작돼 우리가 들어갈 틈이 생길 때까지 말이다.
통찰안을 사용하지 못하는 나는 우주를 바라볼 순 없었지만 시스템 메시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황에 대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대략 한 시간쯤 경과했을까?
[컴퍼니의 전함들이 행성계에 진입했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바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됐다. 다시 우주 공간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전쟁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함들이 우주 공간을 빼곡히 메우고.
맞은편을 향해 주포를 발사하는 모습을.
“전쟁은 누가 이길까?”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비대칭’ 전력도 계산에 포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수많은 전함들이 파괴된다. 그러나 아직 남은 전함들이 훨씬 더 많았다. 아니, 지금 드러낸 것은 마치 ‘일부’라고 말하는 것처럼 전함들은 실시간으로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동하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회하여, U-999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까에 비해서 확실히 경계가 느슨해지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아까에 비해서지, 여전히 경계는 삼엄했다.
우리는 곧 걸리고 말았다.
- 당장 멈추고, 소속을 밝혀라.
물론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나는 광속의 ‘기능’을 사용하기로 했다.
“제논 부스터.”
제논 족의 기술을 활용했다는 부스터 기능을 사용하자, 광속의 속도가 순간적으로 수 여 배 이상 빨라졌다. 경고를 해온 전함이 우리를 향해 주포를 날렸지만, 전부 다 빗나갔다.
- 적기다.
- 격침하라.
다만, 제논 부스터를 사용한 것은 눈에 띄는 일이었기에 우리를 좇는 전함의 숫자가 더욱더 늘어났다는 정도. 아마 어지간한 운전 실력이었다면 파괴 광선에 얻어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발라르는 그때 트레이가 보여줬던 신묘한 항해술 못지않은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조종하는 광속은 파괴 광선을 모조리 피해냈고, 오히려 광선의 궤적에 있던 전함만 얻어맞고 말았다. 전함들은 혼란에 빠진 듯 더 이상 우리의 뒤를 쫓지 못했다.
그물을 통과한 우리를 맞이한 것은 또 다른 전함들. 뿐만 아니라, 파괴자 역시 대기하고 있었다. 파괴자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파괴자의 주포에 짙은 회색의 구체가 어린다. 순간적으로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느꼈다. 아무리 광속이 빠르다 하더라도, 그때 봤던 공격을 피해내는 것은 무리일 터였다.
마침내 주포가 발사됐다. 그리고… 발라르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역시 거의 동시였다. 밖으로 나간 그는 검은색의 방어막을 둘렀다. 직후, 파괴자의 파괴 광선이 충돌했다.
쾅!
귀를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우주선이 거칠게 떨린다. 그러나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광속이 떨리는 것은 그저 충격으로 인한 여파일 뿐, 파괴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괴물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발라르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시나트리온을 제압한 데에서, 이미 느꼈지만 말이다. 파괴 광선을 막아낸 발라르는 다시 광속에 탑승했다.
파괴자는 재충전 시간이 필요한지, 바로 주포를 발사하지는 못했다. 광속은 빠른 속도로 파괴자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이후에는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소형, 중형 전함들이 여럿 떠다니긴 했지만 고작 그들로 광속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침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붉은색의 행성.
‘아니, 이게 행성이 맞긴 한가?’
내가 의아함을 품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같은 행성이니 지구에 비해서 수백 배는 거대해 보였기 때문이다.
[U-999가 맞습니다. 행성의 방어 시스템이 따로 설치돼 있지는 않으니, 착륙하시면 됩니다.]
광속은 단숨에 대기권에 돌입했고, U-999의 지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통 붉은 사막. 발라르가 광속에서 내렸고, 나 역시 뒤이어 내렸다.
‘이제… 어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