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행성 A-607, ‘소니아’. 정령들의 행성 역시 컴퍼니와 하이낸스의 전쟁에 휘말렸다. 소니아 행성계에 진입한 컴퍼니의 전함들은 닥치는 대로 행성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의 포격은 전부 다 행성을 둘러싼 검은색의 장막에 의해 가로막히거나 튕겨 나간다.
“알폰소인가.”
지켜보던 컴퍼니 소속 제17 군단장, 사예는 인상을 찡그렸다.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휘하 함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래서는 전함이 별 의미가 없겠군. 다들 상륙을 준비해라. 정령왕 죽이기를 시작한다.”
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행성에 상륙해, 정령왕들을 처치할 생각이었다.
- 예, 알겠습니다.
전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 기에 달하는 대함대. 저런 함대가 상륙하게 되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지 정령왕들 역시 모르지 않았기에, 격렬한 저항을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알폰소의 말에 엘퀴네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괴물에게 말해 보지 그래?”
그녀가 말하는 ‘괴물’은 컴퍼니의 전함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바로 그들과 같은 정령왕.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소행성 크기의, 거대한 거인으로 변한 그는 실시간으로 타이탄급 함선 하나를 손에 쥐고, 그대로 터뜨려버리는 중이었다. 알폰소는 그 모습을 보며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미쳤냐, 엘퀴네스? 저건··· 우리도 못 말려.”
“그래 보이네. 그런데 이프리트가 저렇게 강했나?”
엘퀴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프리트가 정령왕들 중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큰 차이가 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프리트가 보여주는 전투 능력은 그들의 상식을 파괴했다.
“글쎄, 어디서 대단한 호구라도 물어왔나?”
“저 빚쟁이가 호구를 물었다고? 그런 호구, 나도 있으면 좋겠는데.”
“알 것 같기도 하고···”
알폰소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이프리트가 그의 몸집에 걸맞은 거대한 불의 검을 소환했다. 엘퀴네스와 알폰소의 얼굴이 둘 다 새파랗게 질렸다.
“야, 이프리트··· 네가 이 행성을 직접 파괴할 생각이야···!?”
***
시나트리온은 강하다. 원래부터도 최상위권의 강자였던 그는, 나를 만난 이후에는 한층 더 강해졌다. 하지만 상대가 그 발라르다. 지구를 코인 채굴기로 만든 만악의 근원.
물론 나는 발라르를 직접 본 적은 없다. 동화 세계에서 ‘과거의 그’를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이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괴물이라는 걸.
하물며 시나트리온은 방금 베스타스 제독의 함대를 궤멸시킨 것이 발라르라고 말했다. 즉, 그는 이미 한번 발라르에게 패배한 적 있는 셈.
내가 힘을 사용할 수만 있었다면, 설령 발라르라 하더라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죽이진 못해도 최소한 날려 보낼 순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나는 육체가 붕괴해가는 상태다.
즉, 힘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나는 미미르의 샘물을 사용해, 단숨에 들이켰다. 체력, 마력이 차오른다. 그러나 마치 구멍 뚫린 그릇처럼 다시 새어 나간다.
“시나트리온, 일단 침착하시는 게···”
“어차피 시간이 없다. 내가 녀석을 막는 사이, 진서, 너는 워프 포탈을 찾아라.”
그렇게 말하는 시나트리온의 온몸은 강대한 신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공간 창고에서 노틸러스 5호를 꺼냈다. 노틸러스 5호, 노틸러스 0호, 1호를 개조한 개조품. 물론 그 성능은 1호와도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초월 등급 탈 것- 광속(光速)에 비하면 전체적인 성능 면에서 한참 모자라긴 하지만, 바다로 가득한 이 행성을 탐색하는 데에는 광속보다 더 나을 터였다.
-애초에 나 혼자선 광속을 움직일 수 없기도 했고.
광속을 아공간 창고에 넣은 나는, 아공간 창고를 닫은 후 노틸러스 5호에 탑승했다. 함장실에 앉자 전력이 가동된다.
“시나트리온을 도와줘.”
- 확인했습니다.
노틸러스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동시에 내부에 있던 생체형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생체형 안드로이드 로봇 E.
‘End’라는 이름에 걸맞은, 온갖 과학 기술과 마법, 그리고 통찰안의 능력까지 집대성된 완성품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E는 플레이어들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오히려 학습에 있어서는 플레이어들보다 뛰어나, 시간이 흐른다면 플레이어들을 대체하는 걸 넘어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아나스타샤가 자신만만하게 말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안드로이드 로봇들조차 저 둘 간의 전투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워프 포탈을 찾아, 나는 노틸러스 5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틸러스 5호는 빠르게 물살을 헤쳐나간다. 온통 검게 변해버린 해양 생명체들이 노틸러스 5호를 공격했다. 그러나 노틸러스 5호의 속력이 워낙 대단해, 대부분의 공격은 빗나갔다.
이따금 스치는 공격조차, 죄다 보호막에 튕겨져 나가기 일쑤였다.
‘어디 있냐.’
- 행성을 탐색 중입니다···
- 이곳에서 1,850km 동쪽에서, 강력한 에너지 반응을 감지했습니다.
“워프 장치야?”
대신 대답한 건 오퍼레이터, 미야였다.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가봐야겠지. 노틸러스, 가자.”
-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선회한 노틸러스 5호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곧 느낄 수 있었다. 노틸러스 5호가 무언가에 잡혀,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화면을 통해 확인하니, 거대한 문어- 흔히 크라켄이라 불리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결코 평범하지 않다. 크다. 지나치게 크다. 어림잡아 그 크기가 레비아탄급은 되는 것 같았다.
다른 해양 생명체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걸 보면, 녀석의 비범함을 잘 알 수 있었다.
‘행성의 신···은 아니고, 왕 정도는 되려나?’
그런 녀석이 변이체가 됐다. 그 강함은 결코 경시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무력한 상태의 나라면 더더욱. 그러나 나는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노틸러스 5호에 장착된 ‘무기’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대응을 시작하겠습니다.
동시에 크라켄의 거대한 촉수 역시 들렸다. 그러나 그 거대한 촉수가 노틸러스 5호를 후려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노틸러스 5호의 플라즈마 대포가 불을 뿜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플라즈마 대포가 아닌 제논족의 기술로 만들어진 플라즈마 대포. 막대한 기프트까지 때려 부어 강화한 대포의 이름은 ‘아포피스’, 혼돈을 관장하는 고대 이집트 신의 이름이다.
파괴 광선은 단숨에 크라켄의 몸을 관통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크라켄의 몸에서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다. 녀석은 고통스러운지 몸부림쳤지만, 폭발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크라켄은 검은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남은 촉수 다발 몇이 징그럽게 꿈틀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녀석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촉수 다발에서 아주 조금씩 녀석의 몸이 재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놀라운 재생력. 그러나 나는 굳이 녀석을 마무리 짓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포피스의 위력에 힘입어, 나는 강력한 에너지 반응이 탐지됐다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연보라색 포탈을.
그 순간, 나는 저 안에서 ‘무언가’가 마치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멍하니 포탈을 바라보던 나는 노틸러스 5호에서 내렸다.
그러나 나는 섣불리 포탈 안으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시나트리온이 염려돼서다. 그는 살아있는 걸까? 발라르와 전투에서 이미 패배해, 내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설령 내 상상처럼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발목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내 앞에서 새하얀 빛과 함께, 금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라르였다. 망설이는 그 찰나의 순간, 그는 시나트리온을 쓰러트리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진서,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가?”
그는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조금 놀랐지만, 생각해보니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지구인들 중엔 내가 독보적이었으니, 꽤 괜찮은 ‘채굴기’ 정도로 기억할 수도 있고···
떠오르는 게 몇 가지 더 있지만, 아무렴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상념을 이어나가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시나트리온은 어떻게 됐지?”
발라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은 예정돼있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선택된 자가 아니라면 쉽지 않거든. 너와 나처럼.”
나는 시나트리온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시나트리온의 죽음이 예정돼있다는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역시. 그는 사뭇 뻔뻔하게 말했다.
동화 세계 - 테라에서의 발라르가 떠올랐다. 내심, 지금 그의 모습이 동화 세계의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일 인물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를 구하고 싶나?”
나는 실소를 흘렸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발라르, 네가 아닌가.”
“글쎄,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 궤변인 거 같은데. 나는 그의 공격을 받아친 것밖에 없다.”
한편으로 나는 의아해졌다. 시나트리온에게 ‘굳이’ 자비를 베풀면서까지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붉게 빛나는 그의 눈을 응시하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네가 볼일이 있는 것처럼 나 역시 U-999에 볼일이 있다.”
“···그러면 들어가면 될 거 아닌가?”
“나는 이 포탈을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너는 가능하지. 너와 함께라면 나 역시 포탈을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발라르가 하이낸스가 보유한 ‘신의 육체’를 찾고 있을 거라는 걸. 즉, 그를 신의 육체가 있는 U-999로 데려간다는 것은 그를 도와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만약 그가 신의 육체를 차지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잠시 생각을 뒤로 미뤄두고, 궁금했던 것을 마저 물었다.
“하지만 그럴 거면, 나를 강제로 데려가면 되는 거 아닌가?”
“네가 죽음을 각오할,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라르의 말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통찰안을 사용한다면 그를 죽이지는 못해도 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나는 고민해야 했다. 내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이곳에서 막을지, 아니면 그와 함께 U-999로 넘어갈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짤막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퍼레이터, 미야 역시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다.”
그가 내게 재촉하듯 말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