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이프리트.”
소환된 이프리트는 단숨에 불의 검으로 아틸라의 몸을 찔렀다. 그러나 둘의 몸집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선 벌레 물린 정도에 지나지 않은 자그마한 상처를 내는 데 그쳤을 뿐이다.
물론 그의 주무기는 검이 아닌, 검에 담긴 ‘불’이다. 상처에 붙은 불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타고 전신에 번지기 시작한다. 그는 거대한 불에 뒤덮였다.
이내, 전신이 타오르며 고통스러워하던 아틸라는 나를 향해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 맺힌 초록색 구체. 이프리트는 이번에는 불의 창을 소환해 그의 입에 투창했다.
불의 창은 구체와 부딪쳐, 강렬한 폭발을 일으킨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영향을 줄 정도의 거대한 폭발. 그의 머리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1,000.”
그를 일천 번 죽였다.
500번 이후로 세는 걸 관뒀다. 시스템이 대신 숫자를 세줬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800번대까지였다. 허나, 시스템이 숫자를 세는 것을 관둔 이후, 나는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혹시 시스템이 숫자를 세는 것으로 무언가 힌트를 준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천 번 정도 되면, 무언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변화는 없었다.
‘이거 나갈 수 있긴 한 거야?’
나를 지켜보고 있을 시스템에게 질문을 던져봤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어째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당연히 답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 다시 세계가 복원되기 시작한다.
새까맣게 타버린 아틸라의 동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멀쩡한 아틸라의 동체가 대체한다. 금색 눈을 빛내며 내려다보는 용. 이 세계에서 복원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나’뿐.
‘대체 뭐 어쩌라는 거야?’
그나마 다행인 건 1,000을 넘은 체력과 마력 능력치가 충실하게 제 기능을 해주고 있다는 것. 소모하는 것 이상으로 순식간에 차오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틸라를 죽이는 건 이론상 무한으로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죽이는 것만으로 이 세계를 탈출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적어도 이대로면 패배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1,001번째, 이런 내 예상을 깨는 변화가 생겼다. 미약한 변화였지만, 무려 일천 번이나 이 세계를 겪은 나는 금세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프로그래밍해놓은 듯, ‘동일한’ 패턴으로만 공격해오던 아틸라의 패턴이 달라졌다. 브레스를 발사하기 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날개를 펼치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변화.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나는 아틸라를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 회차부터 변화는 더욱더 또렷해졌다.
1,002번째. 나는 시험해보기 위해 그에게 일부러 시간을 줬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주 공간에 소환된 무수한 운석들. 미티어 스웜. 내가 시전한 것이 아닌 그가 시전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미티어 스웜의 공격력은 별 볼 일 없었고, 끝내 내 마력 보호막을 뚫어내는 것조차 실패했다. 나는 운석 비를 뚫고, 그에게 검을 찔러 넣는 것으로 1,002번째 죽음을 선사했다.
1,003번째의 아틸라는 분신술을 사용했다. 분신. 마치 예런 일리아티가 사용하던 것처럼, 수십 개의 분신으로 몸이 나뉜 그의 본체와 분신들은 나를 향해 일제히 브레스를 날렸다.
그러나 나뉜 분신만큼이나, 브레스의 위력 역시 경감됐고 마찬가지로 내 마력 보호막을 뚫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1,004번째도, 1,005번째도···
결과는 같았으나, 전투 내용은 모두 달랐다. 그러나 변화는 단순히 내용의 변화뿐만이 아니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육체 능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모든 능력’이 상승하고 있었다.
이걸 표현할 만한 단어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나는 간단하게 표현했다.
‘폭풍성장 하고 있다.’
아틸라는 마치 만화 주인공처럼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와 나의 격차는 컸으나, 많이 좁혀졌다. 당연했다. 그는 성장하는 반면, 나는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1,031번째,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고작 이게 전부인가.
메아리처럼 우주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
나는 대꾸하지 않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체력과 마력의 소모 역시 배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미미르의 샘물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 세계에서는 플레이어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 등을 사용할 수 없기에,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대꾸하지 않자, 한숨까지 쉬면서 이죽거렸다.
- 꽤 좋은 대화 상대가 돼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래서는··· 기대 이하군. 지난번에 왔던 놈과 비교하면 형편없을 정도야.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는 시험을 통과했나?”
대화를 시도해 회복할 시간을 벌어볼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금세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아틸라는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 지난번에 왔던 놈은 타 우주의 지배자였다. 나조차 놀랄 정도의 강대한 힘을 가진 녀석이었지만, 그런 녀석조차 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통찰안의 내부에 갇히고 말았지.
‘타 우주의 지배자?’
그가 말하는 대로라면, 지난번에 왔다는 존재는 나보다 강할 것이다. 어쩌면 나 따위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존재조차 통찰안의 네 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단다.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이미 그 말로는 정해진 것이 아닐까.
일말의 절망감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패배하면 그걸로 끝이다. 통찰안의 내부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 왜, 두려운가?
“아니, 두렵기보다는···”
- 벌레처럼 발악해라, 그리고 절망해라.
그의 말과 동시에, 나를 향해 낙뢰가 떨어졌다.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강력한 번개. 그는 나와 더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예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꽤 시간을 벌었다.
“꿰뚫어라.”
지배 능력을 사용해 명령을 내리자, 검이 마치 고무줄처럼 늘어나 그의 심장을 노렸다. 그러나 그는 마치 이전의 그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몸을 틀어 심장을 피했다.
나 역시, 나름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검을 굳게 쥔 채, 신성을 주입했다.
“성역 선포.”
그의 몸에 꽂힌 내 검을 ‘성유물’로 성역을 선포한다.
내 신성은 빠르게, 그의 몸으로 퍼져나간다. 그는 황급히 뒤로 이동하는 것으로 거리를 벌렸지만, 한번 선포된 성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저쪽에서 같은 성역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그러나 난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신성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 없다.’
그가 신성을 사용하는 모습을. 그는 강대한 마력을 사용하며 저항했다. 우주 공간이 무너져 내릴 정도로 그 저항은 거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역은 해제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비교적 손쉽게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를 죽이진 않았다. 휴식할 시간을 더 벌기 위해서였다. 제압한 이상, 바로 죽일 필요는 없다.
세계가 복원되는 ‘트리거’는 그의 죽음이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그가 죽지 않는 이상, 세계가 복원될 일도 없다. 나는 그의 눈을 발로 짓밟으며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이젠 누가 벌레지?”
- 재밌군.
아틸라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체력과 마력이 모두 회복된 후, 그의 몸을 찔렀다. 내 검은 그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1,031번째는 그렇게 끝났다.
또다시 세계가 복원된다.
그러나 성역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몸은 내 성역이었다. 긍정적인 신호다. 어쩌면 내 생각처럼··· 성역은 이 세계를 빠져나갈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뻐하던 것도 잠시 내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1,032번째의 아틸라의 몸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것이- 신성이라 불리는 힘 때문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단 0.1초도 버티지 못하고, 성역은 그대로 파괴돼버렸다.
그는 벙찐 내 표정을 바라보며 또다시 이죽거렸다.
- 고작 인간이 쌓아 올린 신성으로, 이 몸이 쌓아 올린 신성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나는 이내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향해 검을 들었다. 1,033번째, 1,034번째··· 나는 다시 세는 것을 관뒀다. 최대한 정신력을 집중해, 전투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죽이고, 죽인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겨 가며, 아틸라를 베고, 찌르고, 태우고··· 내가 선사할 수 있는 모든 죽음의 형태를 그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종지부를 맞이하고 말았다. 왜냐고? 나는 결국··· 1,070번째에 패배하고 말았으니까. 아직 죽진 않았지만, 곧 죽을 예정이었다.
마치 벌레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으깨진 채.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만한 체력과 정신력은 이 상황에서도 ‘사고’를 이어나가게 해줬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설령, 여기서 천운이 도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1,071번째가 찾아올 터였다. 1,071번째의 아틸라는 1,070번째보다도 강해졌을 텐데, 몸 상태로 그를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내가 수용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 인간치고는 꽤 훌륭했다. 마지막 유언은?
“죽여라.”
- 분부대로 하지.
나를 향해 떨어지는 브레스 앞에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으로 마지막. 나는 1,070번째의 그에게 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죽음이 이 세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번에는 내 몸이 복원되기 시작한다.
1,070번째의 아틸라가 말을 걸어온다. 그는 전혀 놀라지도 않은 듯한, 여전히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 꽤 그 표정이 볼 만했다.
“······”
무슨 상황인가, 의문을 담아 묻는 내 표정에 그는 순순히 설명을 해줬다.
- 이 공간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삭제한’ 공간이다. 그 법칙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인간, 네놈에게도 적용되지.
“그러면 애초에···”
조금 억울해진다. 이럴 거면, 굳이 체력이나 마력을 아껴가며 싸울 필요도 없었는데.
- 네놈이 꽤 재밌어 보여서, 장단에 어울려줬을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너, 괜찮냐?
“뭐가, 괜찮냐는 거지?”
- 아니다. 곧 알게 되겠지.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를 향해 도약했다. 더 이상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이고, 죽인다. 이전까지의 루틴에 추가된 게 있다면 죽는다는 하나의 루틴이 추가된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