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제논 족의 정수가 담겼다는 행성 파괴 로봇 DR01. 그 크기는 거인족의 평균 이상일 정도로 상당히 거대하다. 그러나 거대하다는 건 어디까지 그 비교 대상이 인간일 때나 통용되는 이야기다.
조율자, 아틸라.
통찰안의 네 번째 시험관인 그의 몸집은 전함 중 가장 거대하다는 타이탄급 전함조차 어린아이 취급할 정도로 거대했다. 하물며 DR01은 자그마한 벌레 수준 정도.
그러나 크기가 반드시 강함을 말해주는 건 아니다. DR01에서 녹색의 파괴 광선이 발사된다. 행성조차 단숨에 파괴할 수 있다는 파괴 광선은 정확히 아틸라의 몸을 꿰뚫었다.
거대한 섬광과 함께, 연쇄적으로 아틸라의 몸이 폭발을 일으킨다. 마치 종이처럼 거대한 용의 몸이 우주 공간 아래로 나풀나풀 스러진다. 그 몸집에 비하면 참으로 허무한 최후.
그러나 그 순간, 세계가 복원되기 시작한다.
전투를 지켜보던 오퍼레이터, 미야는 조용히 읊조렸다.
“887.”
887번째였다. 이진서가 아틸라를 죽이고, 세계가 복원된 것이. 이진서는 500번을 넘어서서는 복원 횟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으나, 미야는 그를 대신해 계속 숫자를 세주고 있었다.
큰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고, 그를 위한 그녀의 배려였다.
이내, 888번째 전투가 시작된다.
이진서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이제 112번 남았다. 일천 번을 넘어서면, 그녀는 그에게 칭호를 수여할 예정이다. 그녀가 미리 준비해 놓은 안배 중 하나로, 나름의 힌트를 담고 있는 칭호였다.
물론 그 힌트는 사소하다면 사소했지만, 그녀는 그가 힌트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야는 내심, 그를 응원했다.
바로 그때였다. 치지직.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화면에 점차 노이즈가 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먹통이 돼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면 복구를 시도했다.
그러나 화면은 복구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플레이어, 이진서와 그녀의 링크(Link)가 끊어졌다는 것. 미야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가 점검을 했다.
링크가 끊어질 수 있는 이유는 둘 중 하나.
‘내게 문제는 없어.’
혹시나 하고 다시 링크를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화면은 먹통일 뿐이다. 즉, 그 말은 외부- 코어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 미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지구의 시간으로 따지면 272년.
그녀가 오퍼레이터 일을 시작한 지 272년이라는 세월이 흐를 동안, 코어(Core)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컴퍼니의 유구한 역사를 통틀어 한 번- 전대 회장이 죽었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로 두 번째. 바깥에 무언가 ‘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상념을 이어나가던 그녀는 이내 중얼거렸다.
“다이브 아웃.”
어차피 알아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직접 바깥으로 나가 확인하는 것. 미야는 눈을 뜬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어두운 밀실은 사라지고, 유리 수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플러그를 떼어낸 그녀는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
‘로켄이···’
응당 있어야 할 관리자- 안드로이드 로봇, 로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야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유리 수조를 바라본다. 유리 수조 안에서 잠들어 있는 소년, 소녀들.
잠시 그들을 깨울까 말까 망설이던 그녀는,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아직 단념하기는 일렀으니까. 몸의 물기를 털어낸 그녀는 슈트를 걸치고, 벽에 걸린 총까지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고요했다. 응당 관리자가 서 있어야 할 복도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무언가 일이 터져도, 단단히 터진 모양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전 우주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컴퍼니다. 그리고 플레이어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오퍼레이터 관리소는, 그런 컴퍼니의 중추라 말할 수 있었다.
이 우주에, 컴퍼니의 중추를 건드릴 만큼 담 넘은 이가 누가 있을까? 설령, 슈엔자오라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떠올렸다. 무언가 소란을 일으킨 것이 컴퍼니 내부의 인물이라면.
‘내란이라도 터진 걸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미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 중앙에 있는 궤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로비로 올라가 볼 생각이었다.
버튼을 꾹 누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로켄?”
먼저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있는 이가 있었다. 로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바로 그의 상태가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맹수의 발톱에 할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머리와 몸통의 일부가 뜯겨 나간 채 기계 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자해를 했을 리 만무하니,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미야?”
“무슨 일이에요, 로켄?”
“습격을 받았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기록자.”
기록자. 동화 세계를 만들어낸 장본인임과 동시에 전대 회장이 죽은 지금, 누구보다 회장에 가까운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자. 그러나 스스로 회장이 되기를 거부한 자.
그런 기록자가 어째서 이 오퍼레이터 관리소를 습격했단 말인가?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도망치십시오.”
“하지만 어디로···?”
“비상계단을 통해 최하층에 내려가면,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설치한 워프 장치가 있습니다. 장치 안으로 들어가 우선 몸을 피하십시오.”
로켄은 관리자 카드를 꺼내, 미야에게 건넸다. 그녀는 주춤 카드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다른 오퍼레이터들은···”
로켄은 씁쓸하게 웃었다.
“장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로지 생명체 한 개체뿐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로켄이 들어가지 않고···”
“오퍼레이터, 미야. 들어갈 수 있는 건 오로지 ‘생명체’뿐입니다. 서둘러요.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유일한 탈출 장치를 안드로이드 로봇인 그는 이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야는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린 그녀는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비상계단에 채 이르기도 전에, 금세 미야의 숨이 찼다. 이렇게 뛰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오퍼레이터가 된 이후에, 뛰는 것은 많이 봐왔어도 본인이 뛸 일은 없었으니까.
미야는 걷는 것과 뛰는 것을 번갈아 가며 반복하여, 마침내 비상계단에 도달했다. 문에 힘을 주고 밀어봤으나 열리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총을 들어, 문을 향해 겨눴다.
그리고 속으로 숫자를 세다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발사된 탄환은 블랙홀처럼 문의 일부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생긴 틈으로 그녀는 몸을 던졌다. 그녀가 사라진 뒤, 문은 다시 원래대로 그 형태를 되찾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켄은 고개를 들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천장에 진동이 울린다. 그러나 소리는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다음 순간, 쾅!
백발의 사내가 가볍게 그의 앞에 착지했다. 그가 차고 있는 검은 그의 외모와 대비되는 흑검. 그는 로켄을 향해 흑검을 겨눴다. 로켄은 입을 열었다.
“기록자시여.”
“술래잡기도 끝이 난 것 같구나.”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건지 알고 계십니까.”
코어가 가동을 정지했다.
그 말은 모든 플레이어 시스템이 ‘먹통’이 돼버렸다는 의미와 같았다. 시스템이 제공하던 모든 서비스가 중지됐고, 상당 부분을 시스템에 의지하고 있는 현재의 우주에는···
대혼란이 빚어질 것이다.
“내가 그걸 모를 리가.”
“뭐, 플레이어 시스템을 대체할 서비스를 만들기라도 하셨습니까?”
“의미 없는 농담이구나. 그래도, 시간 끌기라면 퍽 효과적이었다.”
로켄이 무언가 입을 열려 할 때, 그의 흑도가 움직였다. 단숨에 파고들고,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핵을 파괴한다. 몸을 파르르 떨던 로켄의 몸이 기울어진다.
생명체가 생명을 잃듯, 로켄은 그것으로 작동을 중지했다. 전대 회장으로부터 탄생한 지 수천 년간 관리자 역할을 맡았던 그의 최후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최후라 할 수 있었다.
이내, 기록자 ‘마셀러스’는 느껴지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슈트를 걸친 소년, 소녀들이 어리둥절한, 혹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정체는 오퍼레이터들.
그들 역시 미야와 마찬가지로 이상함을 느끼고, 바깥에 나왔다가 로켄 살해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마셀러스는 그들을 향해 흑도를 들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때마침 전력이 끊어져, 조명이 음산하게 변한다. 초 단위로 깜빡거리는 조명의 불빛으로, 마셀러스를 바라보던 오퍼레이터들은 이내 총을 들어 마셀러스를 향해 겨눴다.
그들의 대처는 제법 신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기적’ 같은 건 없었다. 그의 흑도가 휘둘러진다. 소년의 몸이 일격에 양단된다.
겁에 질린 표정을 짓던 소녀는 그의 주먹에 맞아 통감자처럼 으깨지고 말았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결과가 이미 정해진 전투. 학살이라는 게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는 죽이고, 또 죽였다. 오퍼레이터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들이 도망치기에, 이 복도는 너무나도 비좁았다.
“사, 살려주세요.”
“미안하게 됐군.”
이 층의 마지막 생존자에게 흑도를 쑤셔 넣은 마셀러스는 고개를 돌려, 비상계단이 있는 문을 바라본다. 그는 손을 들어 가볍게 움켜쥐었다. 문이 통째로 뜯겨 나간다.
그는 비상계단을 향해 내려갔다. 1층, 2층··· 그렇게 마침내 최하층까지 도달했다. 이미 빛을 잃은 워프 장치를 확인한 그는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놓쳤군.”
워프 장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
그러나 그는 이내, 워프 장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능력이 발동한다. 이 행성에서 일어난 그의 살해 행적은 ‘하나의 세계’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를 그는 관조한다. ‘미야’라는 이름의 오퍼레이터가 워프 장치를 통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어디로 향했는지를.
‘······’
목적지를 확인한 그는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지상에 도착해 있었다. 그를 기다리던 컴퍼니의 간부들이 그에게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녀가 도망쳤다.”
“도망, 말입니까?”
“워프 장치가 있더군.”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그런 사실을 미리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상관없다. 이제는 목적지를 알았으니까.”
“어디입니까?”
“U-999.”
U-999. 간부들이 침을 삼켰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U-999의 소유자는···
“하이낸스와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