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트레이의 경고를 들은 상인 연합의 상인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곧,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데, 태연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거래소 사장인 라니아라 하더라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홍?”
“글쎄요···”
홍은 말을 흐리며 청을 봤으나, 청은 눈을 감고 있다.
미래시 스킬을 사용해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몇 초면 눈을 떴던 지금까지와 달리, 이미 몇 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째서?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굳게 다문 청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평소와 달라.’
평소와 다른 청의 행동은, 라니아를 한층 더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불안하네.’
그녀는 트레이를 사기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한층 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그의 경고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로··· 저 남자 때문이다.
우주선 위에 앉은 채, 인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인간 남자.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그녀는 그 실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케이론, 크레인 제독 휘하에서 수백 년 간 함장 직위를 맡아온 괴물. 그의 손에 스러진 우주의 강자들만 수십 단위는 훌쩍 넘을 터. 그런데 그런 그가 소멸했다.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한순간에.
‘아이온 상단주 역시 마찬가지지.’
물론 아이온 상단주는 케이론과 비견될 강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전함은 다르다. 그의 함선 엑시온은 타이탄급 전함. 내구로 따지면 어지간한 소행성과 맞먹을 정도.
그런 엑시온이 공처럼 압축된 채 우주 공간을 표류하고 있었다.
타이탄급 전함인 엑시온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힘이 필요한지 그녀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인간 남자가 므르므르 이상의 천외천(天外天)이라는 것. 그리고 트레이의 경고는, 저 인간 남자를 대신해 보내온 경고일 확률이 높다는 것. 사실 내심 이미 마음은 기울었다.
그의 경고가 사실이라는 쪽으로. 그러나 설령 그의 경고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경고를 받아들여 행동하는 것은 쉽게 내릴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의 휘하에 들어오라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동안 그들이 그랜드 머천트와 상인 연합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닌가. 그녀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인가.
그때···
“청?”
라니아는 청을 돌아봤다. 청이 눈을 떴다.
“어떻게 됐어?”
청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 돼요.”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 라니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청의 목소리를 들어봤던 기억이 있던가. 곰곰이 떠올려 보니 없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귀를 의심하며, 그녀는 홍에게 물었다.
“지, 지금 쟤 말한 거야?”
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별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 역시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래서 뭐라는 거야?”
“그게··· 들어가야 된대요. 트레이, 아니 저 남자의 밑으로.”
“···그래.”
청의 말이 결정타였다. 라니아는 머릿속의 번민이 지워지는 걸 느꼈다. 조종석에 걸터앉은 그녀는, 직접 전함을 몰기 시작했다. 인간 남자에게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라니아의 선택을 시작으로, 망설이던 상인들도 하나둘씩 선택하기 시작했다. 전함의 숫자로 따지면 절반 정도. 인간 남자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오신 분들은··· 계약서부터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서?”
곧, 그들에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한 그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계약서에 적힌 조항들이 하나같이- 그들이 느끼기엔- 독소 조항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노예 계약이잖아?’
상인으로서 이런 계약을 맺으면 개호구라는 생각이 들 만큼.
“우리는 돌아가겠습니다.”
먼저 소밀레 상단주가 제일 먼저 빠르게 손을 들었다. 다른 상인들이 그 뒤를 잇는다. 라니아는 손을 들까 말까 고민했지만, 청의 말을 떠올리며 손을 들지 않았다.
절반 정도 되는 전함은 이제 1/4로 줄어들었다.
전체 숫자의 1/8. 아직까지 상당히 많은 숫자긴 했지만, 그들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 그들의 선택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노예 계약이긴 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딱히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선을 넘을 경우에는 강제할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제··· 트레이, 인솔 부탁드립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트레이가 입을 열었다.
“자자, 모두 이 우주선을 따라오십시오.”
트레이의 우주선을 따라 이동하면서도, 그녀는 아직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이 옳은 선택을 한 건지. 이대로 그를 따라가서 평생 노예로 노역하게 되는 건 아닐지.
그때였다. 이동하던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저건···”
우주선의 창가에 비친 거대한 전함을. 타이탄급? 아니,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타이탄급 전함 수십 척은 합쳐놓은 것 같은 거대한 전함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저쯤 되면 그냥 이동하는 행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파괴자?”
파괴자(Destroyer). 그녀도 소문은 들었었다. 타이탄급의 전함과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전함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그러나 그녀는 그저 헛소문 취급했다.
타이탄급 전함의 유지비만 해도 수십억 기프트가 소모된다. 그보다 거대한 전함이면, 그보다 많이 들었으면 들었지, 적게 들 리가 없다.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라니아는 다른 전함들을 바라본다. 그들도 파괴자의 존재를 확인했는지 전함들은 마치 맹수 앞의 초식 동물들처럼 그대로 정지해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자신이 엄청난 ‘우주적 사건’에 휘말렸다는 것을. 파괴자의 그림자가 그들에게 드리워진다. 어두운 우주 공간은 암흑에 잠긴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우주 해적들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한편, 트레이의 우주선에 탑승해 있는 인간 남자- 이진서 역시 파괴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통찰안을 사용한 그는 파괴자에 탑승해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이진서는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파괴자는 곧 사라진다. 그의 우주선 역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검은 개, 로어는 온통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짓눌려 있었다. 그랜드 머천트의 행성신, 므르므르는 그런 로어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분개(憤慨)하고 있었다.
“감히 나를 배신하고 이 그랜드 머천트에 분란을 일으키다니···”
그는 상인들을 통해 트레이의 경고에 대해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트레이가 자신의 세력을 빼앗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후회하게 될 거다, 트레이.”
트레이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 그는 다시 로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은··· 네놈에 대한 응징이 먼저겠지.”
“젠장···”
“로어, 네놈 때문에, 오늘 견인족은 이 그랜드 머천트에서 깔끔하게 지워지게 될 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견인족 포로들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그들의 몸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로어는 그들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중얼거렸다.
“이 개새끼가···!”
“그래, 개새끼가 주인을 몰라보고, 주제넘게 굴면 이렇게 되는 거다.”
므르므르는 그의 표정을 보며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저 오만방자한 행태를 참아왔던가.
‘진즉, 이럴 걸 그랬어.’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네놈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거다.”
므르므르는 피식 웃었다. 패배한 개가 말이 많다.
“그래,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게, 적어도 오늘은 아닌 것 같군.”
분노와 모멸감에 로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느낀 듯 므르므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하늘에서 내려온 섬광이 그를 뒤덮었다. 섬광이 덮은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닌, 그가 있는 행성 전체를 뒤덮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한 섬광.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섬광에 깔끔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로어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아직 살아있던 견인족 포로들도.
사형식을 지켜보던 상인들도, 그랜드 머천트의 시민들도. 전부 다 그랜드 머천트의 ‘죽음’과 함께 그 운명을 함께하게 됐다. 행성의 멸망을 확인한 파괴자는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있는 ‘날벌레’들을 해치우기 위해서였다.
***
그랜드 머천트는 작지 않은 행성이다. 그 크기는 무려 지구의 서너 배에 이를 정도. 그런 그랜드 머천트가 파괴됐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경이로운 파괴력이었다.
저런 병기에 정통으로 맞는다면, 나조차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행성을 박살 내는 데 무사하길 바라는 것도 웃기지. 뭐, 그건 어디까지나 노멀 상태의 나고.
지금의 나라면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전함에 탑승해있는 저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는 말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저런 괴물을 청소부로 부리는 슈엔자오는 내 생각을 뛰어넘는 거물이라는 걸. 파괴자의 모습을 눈에 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트레이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왜 그럽니까, 트레이?”
“아니, 그랜드 머천트가 파괴된 거 아닌가.”
“그렇죠.”
“모든 상인들이 그리던 꿈의 행성이 파괴됐는데, 어떻게 대상인으로서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아, 이해합니다.”
그의 말을 듣자,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방금, 대상인이라고 스스로를 자칭한 건가.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는 앞으로 우리 그룹에 합류한 우주 상인들을 컨트롤하게 될 것이다. 그 숫자는 1,500명 정도. 1,500명의 우주 상인들을 이끄는 그가 대상인이 아니라면 뭘까?
지구로 돌아올 때까지, 다행히 별일은 생기지 않았다. 수십 척의 전함들은 지구에 착륙했다. 나는 트레이와 정민혁에게 뒷일을 맡기고 집으로 향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상태가 해제되자, 마치 마취가 풀린 것처럼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나친 체력 소모로 인해 육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확률이 증가합니다.]
[영구적으로 체력 능력치가 1.5 감소합니다.]
[영구적으로 민첩 능력치가 1.5 감소합니다.]
실시간으로 능력치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회복제 한 병을 비우고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계속 능력치 감소 메시지가 떠오르긴 했지만···
지금은 피로회복이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