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당신은 제논족의 비사(祕史)에 담긴 진실과 마주하고, 극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여도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당신의 기여도 : 100%]
[능력치 포인트 45를 획득했습니다.]
[제논족의 데이터 칩(EX)을 획득했습니다.]
<제논족의 데이터 칩>
종류 : 데이터
등급 : 초월(EX)
설명 : 제논족의 데이터가 담겨 있는 데이터 칩. 제논족이 이룩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데이터 칩을 가볍게 손에 쥔다.
겉보기엔 평범한 USB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무려 초월 등급 아이템. 설명에 쓰여 있기로는, 제논족이 이룩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단다. 그 모든 것에는 과학 기술 역시 포함돼 있을 것이다.
제논족의 과학 기술은 대단했다.
당장 그들이 사용하던 ‘플라즈마 대포’만 해도 테라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 대포를 손에 넣는다면, 우리 그룹은 상당한 전력 상승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진짜는 제논족의 결전 병기인 ‘행성 파괴 병기’다. 이 데이터 칩엔 행성 파괴 병기에 관한 정보 역시 담겨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 병기를 양산할 수만 있다면···
잠시 이 데이터 칩의 활용 방법을 고민하던 나는 데이터 칩을 손 위에서 몇 번 던지다가, 아공간 창고 안에 넣어버렸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이 데이터 칩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지상을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수습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멸망해버린 지상. 마음에 들지 않아, 중얼거렸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시계.”
시간을 되돌려, 이 세계를 원래대로 복원할 생각이었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는 즉흥적인 판단. 그러나 그 순간, 내게 떠오르는 메시지.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시계(EX)를 사용합니다.]
[세계를 복원하기엔 보유 기프트가 부족합니다.]
[보유 기프트 : 0]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0?”
보유 기프트가 마이너스가 된 적은 있을지언정, 초창기를 제외한다면 ‘0’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째서 기프트가 0이 된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보유 기프트가 바뀌었다.
[보유 기프트 : 129,996,896,123]
한순간 1,300억의 기프트가 생긴 것이다.
‘시에니가 기프트 관리를 하다, 뭐 실수라도 했나 보군.’
찝찝함이 남긴 했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이내, 나를 바라보고 있는 크레인 제독의 영혼에 눈길을 돌렸다. 현실로 돌아가면 이걸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그의 영혼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의 입에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무언가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그를 노려봤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까의 그 크레인 제독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추한 모습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앞으로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조금 혹하는 것을 느꼈다. 크레인 제독은 강했다. 나도 그를 상대하는 데 애를 먹었을 정도. 분명 그를 부하로 삼는다면 대단한 전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혼자가 아니다. 함장 및 그의 세력까지 전부 흡수할 수만 있다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믿지?”
- 이런 전투를 보고서도, 배신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통찰안으로 판별하니,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의 말이 진실일지라도, 훗날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대비해 ‘계약’이라는 게 존재한다.
“계약을 맺지.”
<제독 노예 1호>
- 계약금 : 1,000,000,000기프트
- 을은 갑의 말에 절대 복종한다.
- 을은 갑의 허락 없이는 무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을은 갑의 허락 없이는 갑을 떠날 수 없다.
- 갑이 원할 시, 추가 기프트를 소모하여 언제든 계약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
“어때, 마음에 드나?”
일단 생각나는 것만 대충 끄적였다. 필요하면 그때마다 추가해도 되니까.
- 아니, 제독 노예라니···
“아니면 그냥 죽든가. 죽을래? 맺을래?”
- ···맺겠습니다.
[10억 기프트를 지불해 직접 계약자, 이진서와 직접 계약자, 크레인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 내용은 상호 동의하에 수정이 가능하며 만약 계약을 어길 경우, 저희 컴퍼니에서는 어긴 쪽에게 상당한 패널티를 부여할 것입니다.]
“일단 돈부터 내놔.”
그는 머뭇거렸지만, 이제 그는 내 말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얼굴을 구겼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예.
[직접 계약자, 크레인이 당신에게 9,564,876,435기프트를 양도했습니다.]
“생각보다···”
- 예?
제독이라면 한 수백억 기프트 정도는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90억 기프트라니.
“거지네. 너 기프트 모아서 숨겨놨지?”
내 딴에는 제법 합리적 의심이었다.
- 없··· 아니, 이, 있습니다.
“어차피 말할 거, 숨기긴 왜 숨겨?”
- ······
그는 비련의 남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처량한 표정을 지었지만, 통찰안으로 그 속내를 꿰뚫어 본 내게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기록자의 거울을 들어, 지금의 나를 ‘저장’했다.
그렇게 우리는 동화 세계 바깥으로 나왔다.
이후는 일사천리(一瀉千里). 이빨을 드러낸 제2 함장, 케이론이라는 놈을 죽인 후에는 1 함장, 마스티치를 비롯한 그의 세력 대부분이 이쪽에 합류했다. 그 과정에서 상인 연합과 ‘사소한’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내게 먼저 공격을 가한 전함 한 대를 깔끔하게 압축해버리자, 그들은 더 이상 덤벼올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함 내부에서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상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라니아, 꼭 죽여야 합니까?”
라니아를 죽이는 것이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만약 내가 라니아까지 죽인다면 상인 연합 전체는 명백히 내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들이 적으로 돌아서더라도 어렵지 않게 궤멸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리 ‘오래’ 이 형태를 유지하지는 못할 거라는 걸.
내가 생각해도 명백한 오버페이스. 아마 이 형태가 끝나면 나는 그 부작용으로 인해 며칠 병상에 누울지도 모른다. 즉, 더 이상 힘을 사용하는 것은 내게도 무리가 있었다.
귓가에 시에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상관없습니다. 이제는··· 이진서의 귀환이 최우선 목표로 변경됐습니다. 곧, 저희 측 청소부들이 파견될 예정입니다.
그런 청소부들이 있다면 진즉 보내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뭐, 이쪽에게 기프트 받은 값을 해내라고 말하면 뭐 할 말은 없지만.
“청소부? 여길 깔끔하게 지우겠다는 겁니까?”
청소부들을 보내겠다는 의미가 그들을 ‘제거’하겠다는 의미임을 모를 리 없었다.
- 예.
“어째서?”
- 당신을 봤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상인 연합을 흡수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 그건··· 통제만 가능하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막무가내 같은 요구라 거절당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으나, 허락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단 말이지?”
물론 내가 우리 그룹에 합류하라 말한들 그들이 순순히 합류할 리 만무하다. 그들 입장에서, 나는 저 우주 해적들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우주선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우주선 내부에 탑승해있는 ‘트레이’를 나지막이 불렀다.
“트레이.”
“어, 어?”
“부탁합니다.”
“···대체 뭘 부탁한단 말인가?”
“협상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어··· 갑자기 협상을?”
“예.”
“···협상의 목표는?”
“포섭. 저기 있는 상인 연합 전체의 포섭입니다.”
“포섭? 내가 뭘 잘못 이해한 건 아니지?”
“잘 이해하신 거 맞습니다. 전부 다 제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싶습니다.”
“저기 상인들은 하나같이 다 쟁쟁한 상인들뿐일세. 그들이 우리의 밑에 들어올 이유는 없단 말일세.”
“곧, 저들은 죽습니다.”
“?? 자네가 죽이겠다는 이야긴가?”
“아뇨, 뭐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렇게만 알고 있으시면 됩니다.”
나는 트레이를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트레이는··· 침몰하는 배의 선장인 겁니다. 누굴 구명보트에 태울지 선택할 수 있는. 이렇게 비유하시면 간단할 거 같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트레이.”
“아, 알겠네. 그러면 뭘 어떻게···”
“병수야.”
“예, 형.”
“트레이님과 함께 좀 다녀와라.”
그는 갑작스러운 내 말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는 연병수를 바라본다.
근 몇 달간 보지 못했던 그와 회포를 풀고 싶긴 했지만, 지금은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의 마법 능력이 더해진다면 협상을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 라우라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매력 있어졌네. 뭔가 좀 차가운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는 그녀는 두 손으로 상기된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 역시 몇 달 만에 보는 것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바뀐 것은 없었다.
아니, 굳이 바뀐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보다 성숙해졌다는 것일까? 물론, 이건 육체적인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령술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우라,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습니까? 그런데 라우라가 여기까진 어떻게···”
“혜연이 때문이지, 뭐.”
나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당발인 진혜연은 그들과 연락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으므로 그녀가 힘을 쓴 모양이다.
“그래도 돌아와서 기쁘네요. 저도 풀어놓을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는 이따 더 나누시죠.”
“그래.”
그녀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통찰안으로 보이는 그녀의 속마음은 전혀 쿨하지 않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 트레이에게 메시지를 전달받은 상인 연합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충격적인 내용이니 당연하다. 나는 우주선 위에 앉은 채, 조용히 협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협상이 너무 길어져 청소부가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
트레이, 4대 상단주의 자리에 오른 그는 회의를 소집할 자격이 충분했다. 각 상단의 상단주들과 거래소 사장들은 그의 소집에 순순히 응했다.
“트레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제 귀가 잘못된 거 아니죠?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똑바로 들은 거 맞습니다. 곧··· 큰 게 옵니다.”
“큰 거? 대체 뭐가 온다는 건데요?”
라니아는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부각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다른 이들도 직접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녀와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갑자기 자신들이 죽는다고 말한다면, 저런 반응이 아닌 게 더 이상하다.
“그러니까 아이온 상단을 궤멸시킨 저놈이 우리를 죽인다는 건가요?”
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저 친구는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