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마스티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려 그의 함대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처럼, 본대도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투 상대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처음 보는 전함들.
그는 이내 그 전함의 정체가 우주 상인들의 전함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전함들이 저마다 상인기를 내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숫자는 물경 일백 척에 이르렀다.
그건 어디까지나 전함만 셌을 때 숫자고, 상선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그 두 배도 훌쩍 넘었다. 시간이 지체된 탓에 ‘그랜드 머천트’에서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한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그 전투에서, 본대는 명백하게 밀리고 있었다.
분명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전함의 숫자만 육십 척에 달하는 대함대였다. 그러나 지금 그 대함대의 숫자는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그리고 남은 전함들의 상태 역시 온전치 못했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패전’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내, 케이론을 바라본다. 케이론은 인간 검사와, 마도사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괜히 2 함장을 맡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는 밀리기는커녕, 그 둘을 상대로도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불리했다.
압도할 뿐, 승부가 나지 않는다. 물론 시간이 흐른다면 승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지만, 더 이상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마스티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건 비단 케이론뿐 아니라, 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걸. 그리고 그의 함대에도···
‘내가 이렇게 한가롭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던가.’
그 또한 여유가 없다는 걸. 마스티치는 몸을 틀어, 그에게 날아드는 어둠의 구체를 피해낸다. 그를 스쳐 지나간 어둠 구체는 표류하던 운석을 그대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아, 아깝네. 거의 맞은 거였는데.”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인간 여자. 그녀의 뒤에는 흑갑주를 걸친 거대한 화염 거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놀랍게도- 그녀는 정령왕 둘을 소환했다.
그것도 상극 중의 상극이라는 불과 어둠을.
여자- 라우라는 웃으며 말했다.
“좀 나한테 집중해주지 그래? 오랜만에 싸워서 신났는데.”
마스티치는 한숨을 쉬면서 검을 들었다.
‘···제독님, 어디 계십니까.’
어렵다. 설령 이 전투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미래는 없다. 한마디로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크레인 제독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의 생각엔 그랬다.
“내가 한눈 팔지 말라 그랬지.”
“우쭐대지 마라, 인간이여.”
그는 검을 들어, 이프리트의 화염검을 쳐낸 후, 라우라를 향해 검을 투척했다. 아무리 정령왕이 강대하다 한들, 소환사가 죽으면 역소환될 터.
정령사를 쓰러트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정령을 무시하고, 정령사를 먼저 쓰러트리는 것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어둠의 손에 의해 가로막힌다.
마스티치는 도박수를 던지기로 했다.
‘위치 전환.’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의 몸이 그의 검과 전환된다. 다음 순간, 그는 라우라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마침내 그의 주먹이 라우라의 몸에 닿기 직전,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위화감을 무시하고 주먹을 뻗었다.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지 모르는 기회를 단순히 느낌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설령 이게 독주라 할지라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라우라의 몸과 주먹이 닿는다. 그 순간, 라우라의 몸은 흐릿해지더니, 그녀의 몸은 케이론의 그것으로 변했다.
“이건···”
그제야 마스티치는 깨달았다. 마도사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불시에 그의 주먹에 기습당한 케이론의 몸이 그대로 우주 공간을 날아간다. 마도사의 말이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위치 전환은 그쪽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의 속을 긁는 이죽거림이었다.
“네놈은 내가 죽여주마.”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가뜩이나 최악이던 상황이 더 최악으로 변했다고 생각했다. 케이론이 리타이어 됨으로써, 그는 검사와, 마도사, 정령사까지 상대할 운명에 처했다.
‘어떻게든 버틴다. 설령 여기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강렬한 빛과 함께, 차원문이 열렸다. 그는 차원문을 돌아봤다. 차원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인간 남자- 이진서가 걸어 나온다.
마스티치와 전투를 벌이던 인간들- 제이드, 연병수, 라우라 등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스티치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크레인 제독은 타인의 몸에 빙의할 수 있다. 이진서의 몸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이진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항복해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만약 이진서의 몸을 차지한 것이 크레인 제독이라면 저런 말을 할 리 없었으므로. 즉, 이진서에게 크레인 제독이 패배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믿기 힘들지만, 크레인 제독이 ‘고작’ 인간에게 쓰러진 것이다.
“···제독님은 어떻게 됐지?”
무표정한 얼굴의 이진서가 입을 열었다.
“죽었다.”
조금 전까지도 승산은 희박했는데, 지금은 이진서의 출현으로 그 희박한 승산마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벌레처럼 최후의 저항을 하는 것뿐. 그러나 마스티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벌레의 최후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않는다는 걸,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우리를 그냥 보내주면 안 되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만약 우리를 살려준다면, 우리가 가진 기프트를 모두 넘기지.”
그들의 거점에 숨겨 놓은 기프트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수백억에 이르렀다. 그래도, 수백억 기프트면 협상대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는···
“글쎄, 기프트는 별로 필요 없어서 말이야.”
‘되지 않는군.’
“······”
마스티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여기서 끝인가. 그때, 이진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는 꽤 쓸 만해 보이는군. 휘하로 들어오면 살려주지.”
“···그게 정말인가!?”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설마 살려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휘하에 들어간다는 게 조금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그 인간이 크레인 제독조차 쓰러트린 강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악연만 아니었다면, 오히려 먼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 정도.
“그래, 약속하지.”
“앞으로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곧, 마스티치에게 계약 내용이 떠오른다. 중세 시대 노예 계약 뺨칠 정도의 계약 내용에, 마스티치는 이진서의 눈치를 살폈으나, 이내 그와 계약을 체결했다.
어차피 선택지는 ‘복종’이냐, ‘죽음’이냐 둘밖에 없는데 죽기는 싫었으니까.
[10억 기프트를 지불해 직접 계약자, 이진서와 직접 계약자, 마스티치가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 내용은 상호 동의 하에 수정이 가능하며 만약 계약을 어길 경우, 저희 컴퍼니에서는 어긴 쪽에게 상당한 패널티를 부여할 것입니다.]
“직접 계약자가 한 명 더 있는 걸로 아는데.”
그는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존댓말이었다.
“···아, 예. 저기 있습니다.”
“마스티치-! 이 박쥐 같은 새끼! 우리를 배신하다니!”
마치 그의 분노를 표현하듯 우주선 위에서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길길이 날뛰는 켄타우로스를 바라보며, 마스티치는 슬그머니 말했다.
“제가 제압할까요?”
“아니, 필요 없다.”
“예?”
이진서는 손을 들었다. 우주선이 분해된다. 그 위에 있던 켄타우로스 또한 흔적도 없이 분해돼버린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의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스티치는 공포를 느꼈다. 케이론은 직접 계약자다. 그와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그러나 이진서의 손짓 한 번에 그대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저런 짓은 제독님도 못 했다.’
이진서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 살아있는 함장 중에 포섭할 이들을 고르도록.”
“예··· 나머지는 간접 계약자들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티치는 조용히 교신 기구를 들며 말했다.
“제1 함장 마스티치다. 내 새로운 주군께서,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살고 싶다면, 나와서 주군께 복종을 맹세해라.”
- 저런 개새끼가···!
- 그게 사실입니까?
함장들 중엔 케이론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욕설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수 이상이 그의 말에 혹해했다.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겠다. 사실이다. 주군께 제독님··· 아니, 제독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
그의 말에 한층 더 가속화됐다. 전함에서 빠져나온 함장들은 그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살겠다고 나온 선원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이진서는 그들 전부와 기프트 계약을 맺었다. 선원까지 포함하니, 그 숫자가 한둘이 아닌 만큼 상당한 기프트가 소모됐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편, 이렇게 되니 묘해지는 건 ‘상인 연합’이었다.
그들 역시 이진서의 등장과 그가 힘을 행사하는 것을 두 눈으로 봤다. 때문에 그들은 대놓고 이진서가 우주 해적들을 흡수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저 인간은 누구지?”
아직 그들은 인간의 정체가 트레이 상단의 보디가드인 ‘여우 가면’이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때, 4대 상단 중 하나인 아이온 상단주가 입을 열었다.
“젠장···! 이러다 죽 쒀서 개 주게 생겼군. 뭐 하고 있냐, 공격해라. 저놈들을 공격하란 말이다.”
아이온 상단의 전함이 이진서의 옆에 있는 우주 해적들을 겨냥했다. 물론 주포의 피해 범위를 생각하면 사실상 이진서를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주 해적들이 다급하게 달아난다.
쾅!
마침내 주포가 불을 뿜었다. 그리고 주포는 그에게 정확히 명중했다.
“멈추지 마라, 계속 쏴라.”
주포가 쉴 새 없이 발사된다. 하지만 그들은 곧 깨달았다. 일대에 둘린 새하얀 막에 의해 주포가 가로막히고 있다는 것을. 새하얀 막은 아무런 피해조차 입지 않았다.
기묘한 현상을 그들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던 중, 이진서가 가볍게 손을 쥐었다. 전함은 그대로 찌그러졌다. 그 속에 있던 아이온 상단주는 물론 상인들 역시 ‘압축’돼버렸다.
상인들은 그 모습을 경악 어린 얼굴로 바라본다. 방금 케이론이 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진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공격한다면, 너희도 적으로 간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