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마치 세상을 뒤덮을 것 같은 분홍색의 빛줄기를 바라보며, 제이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방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곧, 빛줄기와 그의 방패가 부딪친다.
충격은 방패를 타고, 그의 몸에 전해진다. 내장을 진탕 시키는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그의 온몸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눈에서도, 귀에서도, 입에서도···
영겁 같았던 찰나가 끝난다. 다행히,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살아있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그는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삶’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빛나는 그의 몸을 살피며 의아해하는 그. 하지만 그가 의문을 풀기 전에, 제이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온몸이 푸른색 강철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 1 함장, 마스티치였다.
- 대단하구나, 인간이여. 순수한 무위로, 신성을 각성하다니.
“······”
제이드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그가 1 함장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스티치가 강자라는 것을. 어쩌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이내 방패를 굳건히 쥐었다. 설령 승산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그만 죽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 참으로 아쉽구나. 하지만··· 인간, 네가 오늘 나를 만난 것 역시 운명일···
그러나 마스티치는 끝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제이드가 들고 있던 방패를 그대로 원반처럼 그를 향해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 성질이 급하군.
그는 쓰게 웃으며 창을 휘둘러 방패를 쳐냈다. 그때, 방패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던 그의 몸이 튀어나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에 마스티치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미소 지으면서 제이드의 공격을 받아치기 시작했다.
한편, 트레이의 우주선.
“트레이님, 어떻게 하면 좋죠?”
어느 그룹원의 물음에 트레이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아니, 이 친구들아. 나는 자네들 상관이 아니야··· 나는 그저 나약하디 나약한 우주 상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래도···”
이진서의 그룹원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내심 트레이를 상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방금 전 그가 보여준 신묘한 운전 기술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저 친구를 버리고 도망가야겠지만···”
그는 슬쩍 그룹원들의 눈치를 봤다. 만약 그룹원들이 동조하는 눈치면, 그러자고 할 생각이었지만 그에게는 애석하게도, 그룹원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제이드님을 버리다니요.”
“지금까지 제이드님 혼자, 전함의 공격을 막아내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내가 언제 버리자고 했는가. 나는 이성적이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세.”
“사람?”
“크흠, 어쨌거나···”
그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함에서 튀어나온 ‘괴물’과 제이드가 싸우기 시작하며, 전함 역시 공격을 멈췄다는 것. 그러나 이쪽 역시 제이드 때문에 도망치지 못한다.
즉, 이 상황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우주선의 계기판을 아무리 둘러봐도,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전함 한 대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추락? 우주 공간에서 추락이라니···
트레이는 그가 헛것을 본 건 아닌지, 눈을 끔뻑거렸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전함이 빨려 들어간 곳이 다름 아닌 행성, ‘그랜드 머천트’였기 때문이다.
그랜드 머천트 쪽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정확히 말하면 돕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수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
회귀(回歸), 과거로 시간을 되돌린다.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 ‘1분’ 정도를 되돌리는 셈이지만, 그 범위가 무려 행성 전체다. 이전의 나라면 꿈도 못 꿀 터무니없는 짓인 만큼 기프트가 많이 들 거라고 예상은 했다.
[15,789,854,912 기프트를 소모해 행성 전체의 시간을 되돌립니다.]
그래도 이렇게 많이 들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는데···
‘···괜히 되돌렸나?’
조금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158억 기프트. 1분을 되돌리는 데 드는 비용치고는 지나치게 비싼 감이 없잖아 있다. 물론 저 비용에는 제논족 전사들의 목숨값도 포함돼 있겠지만.
하지만 내 생각과는 별개로, 내 스킬은 착실하게 기프트 값을 해냈다. 행성 전체가 역 재생되기 시작한다. 사소한 생각은 잠시 접어둔 채, 그 신비를 두 눈에 담았다.
그것은 하나의 창조 과정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가짜 신이 아닌, 마치 세계를 창조하고,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이 된 것만 같은 느낌. 그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통찰안의 4단계 시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시험 제한 시간 : 한 달]
[한 달 안에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사용자는 통찰안의 내부에 갇히게 됩니다.]
‘통찰안의 4단계···’
다름 아닌, 통찰안의 시험 조건을 충족했다는 메시지였다. 저 ‘시험 조건’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렴, 좋은 게 좋은 거다.
통찰안의 단계를 각성할 때마다 나는 강해졌고, 4단계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3단계 시험 때와 달리 제한 시간은 한 달.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행성은 완벽하게 1분 전으로 되돌아갔다. 오로지 크레인 제독만을 제외하고.
제논족 전사들은 스스로의 몸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내 그들은 나를 향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일어난 ‘기적’이 내 소행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나저나···’
일시적이지만, 크레인 제독을 무력화시켰으니 이 동화 세계를 클리어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나는 동화 세계의 내용을 떠올렸다.
[전 우주를 통틀어서 강대한 종족이었던 제논족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몰락했습니다. 진실을 파헤치고, 동화를 끝내십시오.]
‘수천 년 전,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몰락했다라···’
그렇다면 동화 세계의 클리어 조건 역시, 그 ‘정체불명의 존재’를 쓰러트리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단신으로 제논족을 몰락시킬 정도의 존재라면 엄청난 강자일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아직 그런 강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무언가 따로 출현 조건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때,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주 공간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 놨던 투명한 막을 비집고, 거대한 ‘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참으로 우습게도,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저건···’
몸이 경직된다. 당장이라도 도망치라고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공포에 사로잡힌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통찰안을 사용해, 정보를 바라봤다.
<잊혀진 신의 육체>
- 통찰안의 단계가 낮아, 자세한 정보를 살필 수 없습니다.
‘신의 육체?’
설마, 시스템이 말했던 그 아득한 과거에 나타났다는 ‘신의 육체’일까. 그렇다면··· 상대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때, 홀쭉해진 크레인 제독의 영혼이 간신히 짜내듯 입을 열었다.
- 대체 저건 무슨 괴물인 거냐···
아무리 약해진 상태라고는 하나, 명색이 우주 제독인 그조차 겁에 질렸는지,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니, 설령 그의 원상태- 설령 몸이 온전했다고 해도 예외는 아닐 것이었다. 그 정도로 저 눈의 주인은 우리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나는 혼란한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거대한 손이 세상을 비집고 그 자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주먹은 그대로···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막아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위력을 품고 있었다.
“···텔레포트.”
텔레포트를 사용해 손을 피해낸다. 내가 있던 자리는 물론, 일대에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주먹. 쾅! 귀를 찢는 듯한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대로 지면이 산산조각 난다.
기술이 담긴 것도 아니고, 고작 수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이 사달이 났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런 걸 두 번 맞았다가는, 행성은 파괴돼버릴 것이라는 걸.
묻고, 따질 것도 없었다. 그러면 나도 죽는다.
‘이런 미친 난이도가···’
동화 세계의 난이도를 욕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죽느냐, 발악하고 죽느냐, 둘 중 하나. 그중 내가 택한 것은 바로··· 후자였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발악할 시간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서, 부딪치고 싶어졌다.
“크로노스의 시계.”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시계(EX)를 사용합니다.]
시계 태엽들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행성의 멸망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용한 스킬들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하기 위해서다.
[600,000,000기프트를 사용해,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했습니다.]
[시간 가속(G)을 사용합니다.]
[마인화(改)(EX)를 사용합니다.]
[영령 빙의(G)를 사용합니다.]
[행운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신급의 영령, ‘군신, 아레스’가 빙의됩니다.]
아레스의 힘이 내 몸에 깃들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나는 영령 빙의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다시 초기화했다.
[영령 빙의(G)를 사용합니다.]
[행운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신급의 영령, ‘빛의 신, 루’가 빙의됩니다.]
[마력에 따라 동화율이 설정됩니다.]
[마력 777.9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동화율 60%] [지속 시간 : 60분] [재사용 대기시간 : 48시간]
[영령의 능력치와 스킬의 일부를 불러옵니다.]
[일시적으로 민첩이 54 상승합니다.]
[광휘의 검(G)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육체 가속(G)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몸에 엄청난 반동이 가해진다.
영령 빙의를 중첩해 사용하는 건 오랜만이다. 하물며 지금 중첩한 건 그냥 영령도 아닌, 신. 아무리 지금의 나라 하더라도 신을 둘이나 받아들이는 것은 명백한 ‘무리’였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영령 소환(G+)를 사용합니다.]
[행운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신급의 영령, ‘지혜의 신, 미미르’를 소환합니다.]
“미미르.”
“오랜만이구나.”
그녀를 소환한 건 꽤나 오랜만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미미르는 마치 중세 귀족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이 세계야 그렇다 치고··· 저렇게 터무니없는 걸 ‘기록’해놨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저 존재에 대해 아십니까?”
“네가 생각하는 대로다. 가짜 신이 아닌 진짜 신의 육체.”
“미미르님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나와, 쟤를? 농담이 과하구나. 당연히···”
그녀는 씁쓸하게 말했다.
“비록 이성을 잃긴 했지만, 저건 한때 우주를 창조하고 멸망시켰던 진짜 신의 육체다. 나 같은 가짜 신과는···”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군신의 검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떨어지는 손을 향해 휘둘렀다. 극한의 발도술.
신성이 담긴 검기가 거대한 손을 향해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