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광폭화가 끝난 그린돈의 상태는 처참했다. 그의 비대한 몸집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홀쭉해졌고, 눈빛 역시 초점이 흐릿해지고 생기가 사라져버렸다. 광폭화의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모든 능력치 50% 감소라고 했었지.’
스킬 압축을 사용하면 스킬의 효율은 배 이상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부작용 역시 배 이상이 될 것이다.
내 추측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 통찰안으로 그의 정보를 살피니, 그의 모든 능력치는 100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이제는 우리 그룹에 있는 일반 그룹원들보다도 능력치가 낮을 정도였다.
나는 군신의 검을 들어, 그린돈의 머리에 찔러 넣었다. 푹. 그걸로 끝이었다. 잘려 나간 신체마저 순식간에 재생할 정도로 괴물 같은 재생력을 자랑했지만, ‘죽음’까지 막지는 못했다.
[플레이어, 그린돈을 살해했습니다.]
[1,653,675,890기프트를 획득했습니다.]
그가 보유하고 있던, 무려 16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프트가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별로 기쁘진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쁠 여력이 없었다는 표현이 옳다.
[마인화(改)(EX)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시간 가속(G)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충만하던 힘은 사라지고,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온다. 나는 바닥에 걸터앉은 채, ‘미미르의 샘물’을 마셨다. 미미르의 샘물을 쭉 들이켜자 체력과 마력이 100%로 차올랐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걸 느낀 나는 입을 열었다.
“이쪽은 끝났습니다.”
그러자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알았어요. 수송선을 보낼게요.
수송선의 목적은 당연히 화성인들을 태워 가기 위함이었다. 화성에 존재하는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대략 사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드래고니안 5호에 탑승했던 플레이어의 숫자가 오천이었으니, 대략 일천 명 정도의 화성인들이 이곳 화성에서 목숨을 잃은 셈이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왔다면 그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일찍이 화성에 신경을 썼더라면, 그들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쉬워해 봐야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기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설령 내가 가진 기프트를 모조리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뭐…’
사실 가능했다 하더라도 저울질을 했겠지만 말이다.
- 그런데… 지금 화성 주위를 돌고 있는 수송선이 하나 있어요. 아마 ‘그’가 탑승해있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이 가로막혀 맨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통찰안을 사용한 나는 구름 너머에서 비행하고 있는 수송선 한 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탑승해있는 탑승자들까지. 마침내 예런 일리아티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떨어져라.”
비행하던 우주 수송선은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나는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거대한 ‘평야’에 도착해 있었다. 하늘을 바라본다.
불타는 수송선이 떨어져 내린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방출된 마력에 의해 수송선의 낙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곧, 수송선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빠져나온다.
우주복을 걸친 그들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물론 내 관심사는 그들의 가운데에 있는 ‘남자’였다. 예런 일리아티, 직접 그를 두 눈으로 보는 건 거의 일 년 만이었다.
물론 화성에서 제이드에게 송출해온 영상 속에서 종종 보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내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오, 나의 친구여.”
“예런.”
“우리를 구해주러 온 건가?”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당신은 죗값을 치러야 할 겁니다.”
“죗값이라… 내가 뭘 잘못했다 그러는 거지?”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그의 허리춤에 찬 총으로 향해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총으로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가 들고 있는 총이 설령 신화 등급 총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내게 타격을 입힌다는 건 불가능하다. 들고 있는 소유주가 예런 일리아티이기 때문이다.
분명 지구에 있던 시절, 그는 플레이어들 중에서 최상위권에 속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다. 지금 지구 기준으로 그는 잘 쳐줘 봐야 하위권에 불과했다.
원래부터도 컸던 나와의 격차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건 내 주관적인 것이 아닌, 통찰안으로 살핀 ‘객관적인 평가’였다.
“진서, 네가 주는 위압감이 너무 대단해서 그냥 한번 잡아본 거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예런, 당신에게 ‘계획’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방금 통찰안으로 살핀 건 그의 능력치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 역시 읽었다. 그가 지금 꾸미고 있는 계획의 내용과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진서, 너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지.”
“…그런 짓을 하고서도 예런, 당신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내 요구 조건을 들어주면 돼. 그건 지금의 너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물질 전송 장치. 화성과 지구를 연결하는 통로. 그는 만약 내가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통로에 핵폭탄 수천 개를 일제히 밀어 넣겠노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괘씸하네.’
제일 먼저 든 감정은 당연하게도 ‘괘씸함’이었다. 애초에 통로의 존재 목적은 화성에 물자를 전송하기 위함이었다. 이건 은혜를 그냥 원수로 갚는 게 아니라, 핵폭탄으로 갚는 격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계획은 제법 현실성이 있었다. 만약 그의 말대로 된다면 하늘 요새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플라즈마 보호막이 있긴 하지만 그건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용도일 뿐, 내부의 충격을 방어하는 용도는 아니다.
핵폭탄 수천 개의 폭발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할 터, 물론 지금의 나는 설령 그 폭발 한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다. 아니, 제대로 시간만 있다면 생채기 하나 안 날 자신 있다.
하지만 다른 그룹원들은? 아니다. 만약 그들이 핵폭발에 휘말린다면 틀림없이 죽는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수백, 수천 명이…
“그 요구 조건이라는 게 뭡니까?”
“10억 기프트, 그리고 내가 탑승할 우주선.”
“10억 기프트라…”
10억 기프트. 결코 적은 기프트가 아니다. 그러나 그룹원들의 목숨과 저울질할 정도는 아니다.
“진서, 고민하지 마. 그리고 꿍꿍이 부리지도 마. 만약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린다면 그 즉시 핵폭탄을 터뜨려버릴 거니까.”
손으로 빵, 하고 터지는 시늉을 하는 예런 일리아티의 모습은 그야말로 얄밉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한다.’
그가 인지하기 전에 그를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이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 그가 아무런 대비를 해놓지 않고, 내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이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리 만무하다.
“10억 기프트? 예런, 당신의 말대로 어려운 조건은 아니야. 우주선 역시 마찬가지지. 하지만 내가 당신의 뭘 믿고, 당신에게 10억 기프트를 넘겨야 하지?”
예런 일리아티라면 내게 10억 기프트를 받은 후, 핵폭탄을 터뜨린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아니, 이건 확신이었다. 그의 성격상, 그는 후환(後患)을 만들기를 극도로 꺼렸으니 말이다.
“그래, 네 의심은 타당해.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어. 진서, 날 믿어.”
나는 그의 눈을 응시한다. 1초, 2초… 잠시 간의 불편한 침묵. 짧게 중얼거렸다.
“터져라.”
“??”
느닷없는 내 한마디에 의아한 그의 눈빛. 그러나 그의 머리는 그대로 폭사되고 말았다. 즉시, 나는 ‘크로노스의 시계’를 사용해, 시간을 되돌렸다. 화성 전체의 시간을.
물론 눈앞의 예런 일리아티의 것만을 제외한.
지상에 낙하한 우주선이 역재생된 것처럼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나는 그 즉시 움직였다. 멍청하게 그 이적(異蹟)을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1분 1초가 급하다.
***
폭발 스위치를 들고 있던 예런 일리아티는 휘청거렸다. 방금 죽은 건 그의 분신. 분신이 죽는다 해서 본체가 죽는 건 아니지만, 그 정신적인 데미지는 상당한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은 그의 손은 빠르게 스위치를 향해 움직였다. 협상은 결렬됐다. 사실상 그의 마지막 활로(活路)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복수의 시간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의 팔은 스위치를 누르기 전, 검에 의해 잘려 나가고 말았다. 신화 속의 영웅과 같은 갑옷, 붉은 망토… 누구의 소행인지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다.
엄청난 격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남은 손으로 스위치를 쥐었다. 그러나 반대쪽 팔 역시 잘려 나가고 말았다. 양팔이 잘려 나간 그는 스위치를 허무하게 떨어트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 이진서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죽여라.”
번쩍, 검이 빛났다. 검에 의해, 그의 목이 그대로 관통당하고 말았다. 이진서는 떨어진, 그가 들고 있던 스위치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곧 심각하게 바뀐다.
‘이건… 핵폭탄 스위치가 아니다.’
생각을 잘못했다. 이 스위치는 오히려 핵폭발을 ‘멈추는’ 스위치였다. 그는 스위치를 꾹 눌렀다. 그러나 스위치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스위치가 고장 났거나, 아니면…
‘이미 터졌거나.’
핵폭탄이 이미 터졌다? 그는 떨리는 음색으로 물었다.
“다들 괜찮습니까?”
- ……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진서는 고개를 들어, 지구를 바라봤다. ‘통찰안’으로 살피기엔 너무 멀었다. 10분. 지구에서 그에게 다시 교신(交信)이 오기까지 걸린 시간.
그동안 그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손톱을 물어뜯거나, 담배를 연신 뻐끔뻐끔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그는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렇게 10분이 흘렀고, 마침내 지구에서 교신이 걸려왔다.
- 미안해요, 교신 끊어졌었죠. 갑자기 하늘 요새 중앙에서 폭발이 일어났어요.
아나스타샤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아 있었다.
“다친 사람은… 혹시 죽은 사람은 없습니까?”
- 한 명도 없어요. ‘괴물’이 다 막아줬으니까.
“괴물?”
- 시나트리온 말이에요. 그가 단신으로 폭발을 막아냈어요. 그런데 대체 그의 정체가 뭐…
아나스타샤의 말이 길게 이어졌지만, 이진서는 더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길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처음으로 신을 찾았고, 감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