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당신은 테라에 퍼진 재앙을 성공적으로 수습했을 뿐만 아니라, 숨겨진 흑막을 제거했습니다.]
[기여도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당신의 기여도 : 79.99%]
79.99%.
이전까지의 동화 세계에서 획득했던 기여도보다 낮다. 당연한 일이다. 다른 그룹원들이 이 세계에서 6개월 이상 머문 반면, 내가 머문 시간은 잘해봐야 보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다.
때문에 내심 나는 50%만 나와도 잘 나온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79.99%라는 수치는 내 기대를 한참 웃도는 수치인 셈이었다. 그 원인을 짐작해보자면 아마도… 발라르 때문이겠지.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묵묵하게 메시지를 기다렸다. 아직 가장 중요한 보상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략 1분쯤 흘렀을까, 떠오르는 두 줄의 메시지.
[능력치 포인트 20을 획득했습니다.]
[기록자의 거울(EX)을 획득했습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능력치 포인트 때문이 아닌, 기록자의 거울 때문이었다. 기록자의 거울은 EX등급 아이템이었다. 즉, 초월 등급 아이템이라는 소리다.
초월 등급 스킬이 존재하듯, 초월 등급 아이템 역시 존재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동화 세계의 보상으로 초월 등급 아이템을 획득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나는 거울을 손으로 쥐었다.
<기록자의 거울>
종류 : 악세서리(Accessory)
등급 : 초월(EX)
설명 : 세상 만물을 기록할 수 있는 거울.
옵션 : ①저장 :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복사해서, 저장합니다. ②불러오기 : 저장된 모습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건…’
재밌는 기능을 가진 아이템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복사해서, 저장하고 불러온다? 설명에 적힌 대로, 어떤 것이든 저장할 수 있다면…
‘지금 내 모습 역시 저장할 수 있다는 건가.’
내심 나는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다. 신의 선물을 받아들인 나는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지금의 내가 소환한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본체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상태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위험 부담이 적지 않았다. 신의 선물은 지금껏 내가 받아들인 적 없던 미지의 힘이다. 어떠한 부작용이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지금이야 성격이 변화하는 정도지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 내가 변이체처럼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는 날엔… 그건 최악 중의 최악이었으니까. 때문에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 상태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힘을 버리는 대신 리스크를 제거하느냐. 그러나 내 예상대로, 이 거울이 작동한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공교롭네.’
이건 비단 지금뿐만이 아닌, 예전부터 느꼈던 것이다.
‘스킬 개조’ 때문에 행운이 필요한 상황에서 네 잎 클로버가 보상으로 주어졌던 것. 그밖에도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에서 나는 동화 세계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곤 했었다.
그때마다 내 행운 능력치 때문인가 생각했지만, 사실 내 행운 능력치는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조금 의심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개입한 것이 아닌가.
내 상황을 알면서, 개입할 수 있는 존재는- 적어도 내가 알기론 하나밖에 없었다.
‘컴퍼니에서 개입한 것 같은데?’
자문(自問)이 아닌, 시스템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맞습니다.]
시스템은 순순히 긍정했다.
‘고맙긴 한데… 어째서지?’
[플레이어, 이진서가 동화 세계 스킬을 얻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동화 세계는 무작위 전설 등급 스킬 카드를 개봉하여 얻은 스킬이었다. 당연히 무작위로 얻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 시스템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동화 세계 스킬을 VVIP 상점에서 구매할 수 없는 이유는, 컴퍼니의 서포트(Support) 시스템입니다.]
‘아, 그런 이유였나?’
나는 멋쩍게 웃었다.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다. VVIP 상점에서 나는 동화 세계 스킬을 구매하려 했었다. 동화 세계의 단점이라 한다면 30일이라는, 긴 재사용 대기시간.
여러 사람이 동화 세계 스킬을 구매해서 사용한다면 그런 단점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화 세계 스킬은 구매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으며 계획은 물거품이 됐지만.
‘내가 그 서포트 시스템의 대상자라는 건가?’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컴퍼니에선 플레이어, 이진서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고맙네.’
호의를 베풀었는데, 바보도 아니고 이쪽에서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대화를 끝마친 나는 기록자의 거울을 들어 올렸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장.”
[기록자의 거울(EX)에 플레이어, 이진서의 현재 모습이 저장됩니다.]
기록자의 거울을 바라보니, 이름이 바뀌었다.
<기록자의 거울(이진서)(EX)>
속으로 초를 센다. 대략 1분쯤 센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불러오기.”
[기록자의 거울(EX)에 저장된 모습을 불러옵니다.]
겉보기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무엇이 변화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1분 전의 나로 회귀했다. 아니, 회귀와는 조금 다르다 봐야 했다.
회귀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인 반면, 이것은 저장된 과거의 모습을 불러오는 것이니까.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기록자의 거울을 아공간 창고에 집어넣고 시간 회귀의 물약을 꺼냈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회귀하기 시작한다.
몸 안에 있던 신의 선물이 깔끔하게 사라진다. 검은 문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끔한 피부에 만족할 새도 없이, 나는… 지독한 탈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충만했던 힘이, 지금은 몇 토막이 나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시 기록자의 거울을 사용할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내, 관두고는 회복제를 들이켰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바깥으로 나가자 그룹원들이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화 세계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했다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번의 동화 세계를 겪으며 나 역시 그랬으니까.
‘아직 시간이 남지 않았나?’
[30분 정도 남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라인들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화 세계가 클리어되면, 동화 세계에 기록된 이들은 ‘기억’을 되찾는다.
물론 이 세상이 초기화되면, 마찬가지로 초기화돼버릴 테지만 말이다.
나는 이 시간을 그냥 허투루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금발의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발라르의 연인, 티나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기억이 납니까?”
내 물음에 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네.”
“발라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제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어요.”
“후회하진 않습니까?”
“후회라… 재밌는 말을 하네요. 굳이 대답을 한다면… 저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통찰안으로 판별한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하기야, 그녀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그를 막아주세요.”
“……”
“그는 바이러스를 스스로의 몸에 투입하기 전에, 제게 부탁했었어요. 아예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지도 모르니, 그렇게 되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그가 그런 부탁을 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신의 선물 때문에 변화한 건가.’
직접 신의 선물을 겪어본 나였기에, 나 역시 발라르가 어째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는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죠.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보내긴 싫었거든요. 이후엔…”
그녀는 말을 흐렸다. 이후의 상황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테라가 생존자 하나 없이 완전히 멸망해버린 것은, 아마 변화한 발라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건,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발라르를 막아라?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이다. 그런 속마음과 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밝아진다.
“감사합니다.”
30분 있으면 사라지는 존재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이 흐르고, 세상이 소멸되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가루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찬란한 낙원의 건축물들도, 여전히 멍한 표정의 테라인들도… 그리고 우리 역시.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들어가기 전, 풍경 그대로였으니까.
“돌아왔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그룹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울먹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잠시 그렇게 있으니, 간부들이 나타났다.
“형님, 어떻게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혹시…”
대략 7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쪽 세상에선 고작 세 시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혹시 뭐.”
“실패하신 겁니까?”
정민혁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성공했다. 그저, 시간의 흐름이 이쪽하고 달랐을 뿐이지.”
“예?”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그동안 별일 없었지?”
말해 놓고도 나는 피식 웃었다. 그동안이라고 해봐야, 내가 다시 들어간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는…
“별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화성에서 선전포고문이 날아온 것만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긴 했다.
“화성에서?”
그의 말처럼 크게 별 일은 아니긴 했지만…
“예런 그 양반이 드디어 미쳤나? 아니면 물자 달라고 칭얼대는 건가?”
예런 일리아티. 나는 화성의 군주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자 달라고 사정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도발을 하다니.
“그런 것치고는 진짜 해보자는 듯한 어조긴 했습니다.”
“어차피 우주 전함 완성되면 끝일 텐데… 뭐, 그 양반이면 그걸 알고 그런 걸 수도 있겠네.”
“어떻게 할까요?”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 우주 전함이 완성되면 제이드가 우주 전함에 탑승해, 예런 일리아티를 ‘심판’하러 갈 것이다.
“그냥 내버려둬. 알아서 제풀에 지치겠지.”
관종에겐 신경을 끄는 게 답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쉬어야겠다. 클로에의 만찬장에서 만찬 여는 걸로 하고, 다른 그룹원들 좀 잘 좀 챙겨줘.”
“예, 형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